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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27일 05시 03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1월 27일 05시 09분 KST

치프라스-메르켈 '부채탕감' 전쟁이 시작됐다

ASSOCIATED PRESS
Leader of Syriza left-wing party Alexis Tsipras waves to his supporters outside Athens University Headquarters, Sunday, Jan. 25, 2015. Anti-bailout Syriza, led by the 40-year-old Alexis Tsipras, won Sunday's snap general election, but it was unclear whether he would have enough seats in parliament to form a government alone, or whether he would need the support of a smaller party. (AP Photo/Petros Giannakouris)

그리스와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이 구제금융과 경제정책 방향을 두고 정면충돌을 예고하고 있다. 25일(현지시각) 치러진 그리스 총선에서 유로존 탈퇴(그렉시트)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구제금융 조건 재협상을 공언해온 시리자(급진좌파연합)가 압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상 최연소 총리가 될 알렉시스 치프라스(40) 시리자 대표는 유럽연합이 그리스 재정위기 당시 구제금융 조건으로 내걸었던 ‘가혹한 긴축’을 폐지하고 부채 상환을 일부 유예하거나 탕감받겠다고 공언해왔다. 반면, 유로존의 주축이자 최대 채권국인 독일은 원칙적으로 그런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스와 독일 사이에 명운을 건 게임도 본격적으로 막이 올랐다.

치프라스는 25일 저녁 아테네에서 승리에 환호하는 지지자들 앞에서 “그리스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고 선언했다. 그리스 유권자들이 ‘구제금융 재협상을 추진하겠다’는 자신의 공약을 선택했다는 뜻이다. 그리스는 2010년 심각한 재정위기로 국가부도 위기에 내몰린 끝에, 유럽연합과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 등 이른바 ‘트로이카’로부터 구조조정을 조건으로 지금까지 모두 2400억유로(약 290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독일을 비롯한 유로존 채권국들은 그만큼의 돈이 그리스에 묶여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리스는 앞으로도 72억유로의 자금을 더 지원받기로 되어 있다. 치프라스가 이끄는 차기 그리스 정부엔 이 추가분의 구제금융 조건 협상이 출범 이후 최초의 시험대다. 그리스는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6년 만에 처음으로 플러스로 돌아서 0.6% 성장을 기록한 것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다. 극심한 경제침체에서 겨우 벗어나려는 조짐은 그리스에 협상력을 보태줄 수 있다.

그리스 정치 지형과 정책 노선의 급변으로 유로존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25일 국제외환시장에서 유로화 가치는 장중 한때 1달러당 1.1088유로까지 급락했다. 2003년 9월 이후 11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그리스와 유로존이 채무 재협상을 벌일 가능성이 현실화하면서 불확실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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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총선 결과에 따른 파장과 향후 대책은 26일 벨기에에서 열리는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에서도 최대 현안으로 다뤄질 게 분명하다. 벨기에의 요한 판 오버르트벨트 재무장관은 현지 방송 <베에르테>(VRT)에 “그리스는 단일통화권(유로존)의 원칙을 존중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독일 분데스방크(중앙은행)의 옌스 바이트만 총재는 “그리스의 새 정부가 지킬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약속을 하진 않을 것”이라며 향후 사태에 대한 우려와 바람을 에둘러 내비쳤다. 앞서 23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그리스 총선을 앞두고 “우리 원칙의 핵심은 연대”라며 “그리스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유로존의 일부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지 않는 한 유로존을 탈퇴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리스 역시 파국을 원하지는 않는데다, 달리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최근 “그렉시트가 임박했다고 실제로 믿는 사람은 없다”며 “유로존 국가들은 그렉시트보다는 치프라스의 채무 탕감 요구, 그리스 경제의 부진과 정치적 불안정을 더 우려한다”고 보도했다.

다음달 12일 벨기에 브뤼셀에선 유럽연합 정상회담이 열린다. <가디언>은 25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등 유럽 정상들은 어쩌면 남성 중에선 유일하게 넥타이를 매지 않은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와 마주하게 될 것”이라며 “그 상징성은 매우 크다. 시계는 이미 재깍거리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리스 채무 탕감', 정말 얼토당토 않은 주장일까?

그리스 총선에서 압승한 급진좌파연합 시리자의 대표 알렉시스 치프라스의 ‘그리스 채무 탕감’ 요구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말대로 얼토당토 않은 주장일까? 역설적이게도 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세계의 용광로’가 된 독일의 역사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1945년 2차대전에서 패한 독일이 경제대국으로 일어선 ‘라인강의 기적’은 1953년 런던 합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소련 등 동구 사회주의권의 위협을 두려워했던 채권국들은 서독 경제가 반드시 회복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1950년 합의문 초안을 마련하면서 “독일 경제를 고려해 독일의 부채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과 당사자간의 공정한 협상”을 주장했다. 1953년까지 이어진 협상 끝에 각국 정부는 물론 개인 채권자들도 독일이 갚아야 할 빚의 절반을 탕감해주기로 합의했다. 결국 서독은 150억마르크의 부채를 탕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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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합의는 서독이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할 때만 채권자들한테 빚을 갚을 수 있게 했다. 상환 규모도 무역 흑자의 3%를 넘지 않도록 배려했다. 채권자들로서는 서독한테서 빚을 받으려면 서독 제품을 사는 게 유리했다. 서독의 수출은 늘었다. 미국이 서유럽 나라들에 원조를 제공했던 ‘마샬 플랜’ 만큼 회자되지 않지만, 런던 합의야말로 독일 경제가 전후 부흥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당시 서독은 빚을 탕감받을 만한 자격 여부와 관계 없이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기반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가디언>은 분석했다.

<21세기 자본>으로 유명한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학 교수는 최근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200%에 이르렀다며 “(그리스 등) 남부 유럽 국가들에 (부채의) 마지막 한 푼까지 다 뱉어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역사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프란체스코 카셀리 런던정경대학 교수도 “(시리자가) 꽤 합리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제 싱크탱크 프라임의 앤 페티포는 “공평성에 대한 문제”라며 “우리가 그리스에게 해줘야 할 것은 과거 동맹국들이 독일을 위해 한 일과 같다”고 말했다. 과거 독일처럼 그리스도 무역 흑자의 3% 안에서 대외 채무를 갚게 해 그리스 경제를 살리자는 것이다. 그리스의 부채를 일부 탕감해주는 게 그리스뿐 아니라 유로존 전체를 위해서도 이득이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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