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5년 01월 26일 10시 35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3월 28일 14시 12분 KST

누가 되어도 허세 | 박정희 조카사위 김종필총리의 경우

사임 의사를 표했으나 후임자로 지명된 이들이 계속해서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낙마하는 일들을 겪은 후 끝내 집으로 가지 못하고 계속 국무총리를 했던 정홍원 총리의 사례를 통하여 이제 우리나라에서 국무총리라는 자리가 사실 의전이나 하는 실권은 하나도 없는 무용한 자리라는 것이 너무나도 또렷해진 것 같다. 마침 이 쓸데없어 보이는 국무총리 자리를 무려 27년의 차이를 두고 두 번이나 지냈고, 그리고 그가 모셨던 두 대통령(박정희와 김대중 대통령)은 생전에는 단 둘이 얘기를 나눠 본 적도 없는 정적이었던, 우리 정계의 풍운아 김종필이 자신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를 펴낸다는 인터뷰 기사를 보고서 김종필이 처음으로 국무총리를 지냈던 시절에 관련된 이야기나 한 번 풀어볼까 한다.

한겨레

사임 의사를 표했으나 후임자로 지명된 이들이 계속해서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낙마하는 일들을 겪은 후 끝내 집으로 가지 못하고 계속 국무총리를 했던 정홍원 총리의 사례를 통하여 이제 우리나라에서 국무총리라는 자리가 사실 의전이나 하는 실권은 하나도 없는 무용한 자리라는 것이 너무나도 또렷해진 것 같다. 심지어는 일본, 영국, 독일과 같이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정부의 수반으로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는 직함을 계속 총리라고 번역하는 관행이 그들 나라들에게 미안해질 지경이고 수상이라는 말을 고르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이완구 총리 지명자의 인사청문회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논란도 (어차피 실권도 없고 인준되고 나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 없는 자리인데) 좀 시들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심심하던 차에(웃음) 마침 이 쓸데없어 보이는 국무총리 자리를 무려 27년의 차이를 두고 두 번이나 지냈고, 그리고 그가 모셨던 두 대통령(박정희와 김대중 대통령)은 생전에는 단 둘이 얘기를 나눠 본 적도 없는 정적이었던, 우리 정계의 풍운아 김종필이 자신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를 펴낸다는 인터뷰 기사를 보고서 김종필이 처음으로 국무총리를 지냈던 시절에 관련된 이야기나 한 번 풀어볼까 한다(김종필의 두 번째 총리 임기도 이른바 DJP연합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통하여 가능하게 된 것이지만 그에 관련된 이야기는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다음을 기약하여 보기로 한다).

김종필이 박정희 밑에서 소위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웃음)이라는 국무총리를 첫번째 하였을 때인 1971년에서 1975년까지는 오히려 김종필의 힘은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중 매우 약했던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10월 유신과 관련한 김종필의 역할이다. 박정희는 김종필이 총리가 된 이듬해인 1972년의 10월 17일에 종신집권으로의 길을 연 소위 10월 유신을 단행한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정권의 2인자였어야 할 김종필이 이 사실을 통보받은 것은 10월 유신이 발표되기 불과 열흘 전이었다. 그러니까 박정희의 종신집권 계획은 그의 측근인 이후락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 부장 같은 이가 다 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헌법상 삼부 요인이고 행정부에서 대통령 다음 자리라는 국무총리직에 있던 김종필은 그 진행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발표 겨우 10일 전에야 통보받은 것이다. 그리고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열심히 유신 '헌법'을 홍보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종필은 박정희 정권에서 듣보잡이 아니라,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의 딸인 박영옥과 결혼한 박정희의 조카사위였으며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를 기획하였고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를 창설해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을 사전 창당해 4대 의혹 사건과 온갖 흑막의 연출자라는 의심을 받았던, 한때는 정권의 진정한 2인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작 헌법상 대통령 다음의 2인자인 국무총리가 됐을 때는 그는 천지개벽할 음모를 박정희가 꾸미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배제된 것이었다.

어째서 김종필은 최고 권력자의 지근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무기력한 허세 총리가 되었던 것일까? 그 비밀은 김종필의 총리 취임 3년 전인 1968년에 있었던 이른바 국민복지회 사건에 실마리가 있다. 김종필은 나중에 조갑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5.16 쿠데타를 기획하며 대선 두 번 정도를 계속 이기면(당시 대통령 임기가 4년이었으니까 8년 집권하면) 쿠데타를 통해서 구현하려고 했던 나름의 정치적 포부를 이루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는 취지로 술회했는데, 당시 3공화국 헌법은 당초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하고 있었으니 김종필은 자신과 같은 육사 8기생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5.16 쿠데타로 옹립한 박정희(육사 2기)가 8년 정도 집권하면 그 다음엔 자연스레 자신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그런 인터뷰에서 드러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실제 박정희는 이른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쿠데타 후 군정을 실시한 다음 1963년에 민정으로 이양한다고 해 놓고서는 스스로 출마하여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후 1967년에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이제 당시 헌법상으로는 박정희는 다음 대선에 출마를 못하니까 김종필의 측근들이 김종필을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옹립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알려진 조직이 국민복지회이다. 그런데 이 조직은 1968년에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형욱에게 발각되어 회장인 김종필의 측근 김용태는 가혹한 탄압을 받고 김종필도 공화당 당의장을 비롯한 일체의 직책에서 사퇴한다. 즉 박정희는 3선을 금지한 헌법 따위는 우습게 보았고 계속 집권하겠다는 뜻을 굳혔기에 자신을 계승하겠다는 정권 2인자 김종필도 조카사위니 5.16 쿠데타의 기획자니 하는 개인적 공적 관계는 편리하게 잊어 버리고 권력의 경쟁자로만 생각해 가차없이 정치적으로 거세해 버린 것이다.

그러고는 박정희는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 부장 김형욱과 비서실장 이후락을 앞세워 3선개헌을 달성한다. 이 3선개헌 과정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김종필을 지지하는, 당시 여당인 공화당 내 세력들(이른바 JP계)은 대부분 거세되었다. 박정희는 3선 개헌을 달성한 다음에는 그 1등공신이라 할만한 이후락과 김형욱을 제거했고 쉽게 이길 줄 알았던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40대인 김대중 전 대통령님을 상대로 해서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하고 막판에 "내가 국민 여러분께 표를 달라고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당시는 누구나 3선 임기 후 물러나겠다는 말로 이해했음-_-)이란 말까지 하고도 겨우 94만표 차이로 간신히 '승리'한다. 박정희는 이렇게 돈을 많이 쓰고 자기 딴에는 지난 10년간 집권하며 경제발전도 시켜 치적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야권의 젊은 후보인 김대중 전 대통령님과 이정도 차이밖에 안 나니 정말 미개한 국민(웃음)이라 생각했는지 1971년 대선의 마지막 유세 때 말한 것처럼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만들기 위해서 영구집권계획인 10월 유신을 비밀리에 추진한다.

그 상황에서 박정희는 대선이 끝나고는 이미 수족이 다 잘렸었던 김종필을 다시 불러들여 그를 국무총리에 앉혔다. 물색 모르는 이들은 이제 정말 박정희가 3선만 마치고 물러나려나 보다, 조카사위 김종필을 불러들여 뭐랄까 후계자 수업이라도 시킬 모양이다 하는 성급한 전망까지 하게 할 인사였었다. 그렇지만 박정희의 장기집권 야욕은 그런 상식적 추론을 훨씬 뛰어넘는 일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당시 여당인 공화당의 중진들도 박정희의 이런 영구집권계획을 꿈에서조차 상상 못했던 모양이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의 경쟁자 김대중 전 대통령님만이 총통제 추진 음모라고 내다보셨다.) 이른바 4인 체제라고 불리던 백남억, 김진만, 길재호, 김성곤 이 네 명의 당시 집권 공화당 중진들조차도 박정희가 3선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면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쯤으로 개헌하고 자신들이 막후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들은 3선개헌 때까지는 박정희를 추종하며 김종필을 견제하며 세력을 키웠던 이들이었음. 이들 4인 체제는 특히 경찰 쪽에 자신들의 세력을 깊이 심어 놓았는데 조카사위 김종필도 가차없이 쳐냈던 박정희가 이들을 그대로 둘 리 만무했다. 박정희는 오치성을 경찰을 관할하는 내무장관에 임명해서 경찰 쪽에 이들 백남억/김성곤/길재호/김진만의 4인 체제가 심어놓은 세력들을 뿌리 뽑으라고 지시한다. 4인 체제는 내무장관 오치성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그를 쫓아내기 위하여 당시 야당인 신민당이 내었던 오치성 해임안에 대해 반란표를 내어 해임안이 덜컥 가결된다(1971년 10월 2일). 이 10.2 항명파동의 여파는 대단했는데 박정희는 대로하여 내무장관 해임안에 동조한 여당의원들을 색출하라고 중앙정보부에 지시했고, 4인체제 인사 중에 김성곤은 이때 끌려가 고문까지 당했으며 그 와중에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까지 뽑혔다는 말까지 있었다(그는 결국 강제 정계은퇴를 당했다고 한다).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고, 여당의 중진이 이렇게 중정의 고문을 받아 정계 은퇴를 당하는 와중에 김종필의 국무총리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은 개뿔-_-;이라 하겠고, 앞에서 본 것처럼 실제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이 단행되는 과정에서도 김종필은 그 진행과정을 깜깜하게 모를 정도로 소외되었었다. 이러한 대통령 박정희에의 권력 집중은 대통령에 대한 접근권을 가진 문고리 권력의 강화를 가져 왔고, 10.26이라는 궁정 권력 다툼의 파국으로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1987년의 6월 항쟁으로 쟁취한 현행 헌법 아래에서 박정희 같은 무소불위의 독재자는 나오기 어렵겠으나 우리 헌법이 기본적으로 대통령 중심제를 취하고 있는 이상에는 이렇게 국무총리제는 의전용 자리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쿠데타 동지, 조카 사위)였던 김종필이 국무총리가 되어서도 앞에서 살펴 본 것이 종이 호랑이 노릇밖에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면 언론이라도 이런 허수아비 국무총리 인준을 둘러싼 부질 없는 논란에 대한 보도를 줄이고 차라리 국민들의 삶에 절박한 경제문제 같은 것에 더 관심을 쏟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PRESENTED BY 오비맥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