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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7일 08시 41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1월 27일 14시 12분 KST

두산연강예술상을 통해서 바라본 예술의 속물화라는 이상

이경성 연출가가 <25시-나으 시대에 고함>에 김창인을 공연자로 섭외한 것은 그가 중앙대학교와 장기간 투쟁했던 김창인의 문제의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10월 즈음에 제5회 두산연강예술상에 대한 보도를 보고 깜짝 놀랐었습니다. 기사를 살펴보니 박용현 이사장과 수상자들이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 있었습니다. 두산연강재단의 박용현 이사장 옆에는 공연부문 수상자인 이경성 연출가가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지요.

제16회 서울변방연극제 <25시-나으 시대에 고함>에서 『맹자』를 낭독하는 김창인의 모습 ©홍태림

올해 7월, 연극과 광장을 주제로 제16회 서울변방연극제가 열렸었습니다. 이번 서울변방연극제는 노동, 경제, 기억, 공간을 키워드로 다양한 작품이 초청되었었죠. 저는 임인자 예술감독의 요청으로 이번 서울변방연극제의 개막작인 <25시-나으 시대에 고함>에 대한 감상후기를 썼었습니다. <25시-나으 시대에 고함>은 이경성이 연출했고 광화문 광장에 위치한 교통섬에서 열렸었습니다. <25시-나으 시대에 고함>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계층의 24인이 한 시간씩 릴레이 일인 시위를 펼치는 공연이었습니다. <25시-나으 시대에 고함>의 첫 번째 공연자는 올해 5월에 중앙대학교 철학과 자퇴 선언을 했던 김창인이었습니다. 김창인은 광화문 교통섬에 작은 책상을 가지고 와서『맹자』를 한 시간 동안 낭독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김창인이 왜 중앙대학교 철학과를 자퇴했는지 모르시는 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김창인이 자퇴 선언을 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좌) 김창인과 표석이 한강대교 위에서 '기업식 구조조정 반대'라는 내용이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고 고공시위를 하는 모습 ⓒNEMOPAN

우) 중앙대학교 철학과 자퇴를 선언하는 김창인 ⓒ연합뉴스

2008년, 두산그룹은 중앙대학교를 인수했고 두산중공업 회장 출신인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은 대학은 산업이라고 말하며, 전공을 불문하고 '회계'를 필수 교양과목으로 지정했습니다. 이 외에도 박용성 이사장은 77개 학과를 40개로 줄이고 취업률이 낮은 학과를 통폐합해 경영대 정원을 늘리는 학과 구조조정을 시행했지요. 이 같은 중앙대의 일방적인 구조조정을 비판한 학내교지는 학교로부터 강제 수거되었고, 학교 방침에 비판적인 의견 표명만으로도 징계가 내려졌습니다. 박용성 이사장과 학교본부는 "구조조정에 있어 대화는 없다"는 태도를 공공연히 취했고, 이러한 노골적인 태도는 학내 구성원들을 더욱 분노케 했습니다. 중앙대는 이에 그치지 않고 총장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금지했으며, 학과 구조조정과 관련된 토론회와 시위를 벌인 학생들에게 '불법 행사'라는 이유로 징계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했습니다. 당시 중앙대에 재학 중이었던 김창인과 표석은 2010년 4월 8일 오전 8시에 한강대교 아치 위에 올라가 '기업식 구조조정 반대'라는 내용이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고 고공시위를 벌였습니다. 같은 날 오전 5시에 노영수는 중앙대 연구개발센터 공사장 타워크레인을 6시간 동안 점거했고요. 이후 학교 측은 노영수에게 2,5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김창인은 한강대교 시위 이후에도 투쟁을 지속한 결과 중앙대로부터 정학과 장학금을 환수조치 당했고, 학생회장 피선거권도 박탈당했습니다. 결국, 김창인은 2014년 5월 7일에 "학생회는 학교의 서비스센터로 전락했고 교수들은 자신의 지위를 건사하는 것에 급급한 비겁함을 보였으며, 대학은 기업이 아니고 상품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면서 중앙대학교 철학과를 자퇴했습니다. 김창인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중앙대는 2014년 10월부터 학과 통폐합 내용을 담은 '학문단위 구조개편 추진계획안'을 여전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5회 두산연강예술상 시상식에 참석한 공연부문 수상자 이경성,

미술부문 수상자 강동주, 이윤성, 안정주, 두산연강재단 박용현 이사장 (뉴스컬처) © 사진=두산연강재단

좌) 현재 두산 중공업 회장 겸 중앙대학교 이사장 박용성

우) 전 두산건설 회장 이자 현재 중앙대, 서울대 이사, 두산연강재단 이사장 박용현

저는 이경성 연출가가 <25시-나으 시대에 고함>에 김창인을 공연자로 섭외한 것은 그가 중앙대학교와 장기간 투쟁했던 김창인의 문제의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10월 즈음에 제5회 두산연강예술상에 대한 보도를 보고 깜짝 놀랐었습니다. 기사를 살펴보니 박용현 이사장과 수상자들이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 있었습니다. 두산연강재단의 박용현 이사장 옆에는 공연부문 수상자인 이경성 연출가가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지요. 저는 이 사진을 보고 한동안 멍해졌었습니다. 박용현은 2008년부터 중앙대 이사를 맡았습니다. 박용현은 두산그룹이 중앙대학교를 인수하자마자 형인 박용곤, 박용성과 나란히 중앙대 이사가 된 것이지요. 따라서 박용현은 김창인을 억압했던 장본인 중에 한 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김창인을 자신의 공연에 섭외했던 이경성 연출가가 두산그룹이 수여하는 상과 상금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두산아트센터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두산연강예술상 메뉴에 들어가니 올해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한 예술가들의 이력이 나오더군요. 여기서 제가 한 번 더 놀랐는데, 그 이유는 올해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한 예술가 중에 중앙대학교를 졸업한 예술가가 두 명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명은 이경성 연출가였고, 다른 한 명은 이윤성 화가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예술가는 자신이 졸업한 학교의 인문·예체능계열 정원감축과 통폐합을 진행하는 장본인에게 상과 상금을 받은 것입니다. 올해 두산연강예술상의 심사위원인 김성원, 임근준, 조선령, 강일중, 이병훈, 이진아의 심사평을 살펴보아도 두산이 중앙대학교를 일방적으로 유린한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너무 혼란스러워 져서 컴퓨터를 끄고 눈을 감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저의 주변에서 활동하는 미술가 중에도 두산연강예술상을 받은 작가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평소에 인권, 여성주의, 공동체, 자본주의, 정치에 대해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견지한 작가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작가 중에 두산그룹이 대학을 운영하는 폭력적인 방식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두산그룹이 주는 돈으로 활동하는 작가가 두산그룹을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왜 일까요? 기업 미술상은 예술가에게 다른 예술가들이 열패감을 느낄만한 돈과 명예를 선사합니다. 예술가가 누군가에게 소개될 때 가장 먼저 언급 되는 것은 그들이 기업에게서 받은 미술상의 목록입니다. 예를 들면, 이 작가는 "두산연강예술상을 받은 000작가, 에르메스 미술상을 받은 000작가, 송은미술대상을 받은 000작가, 포스코의 스틸어워드를 받은 000작가입니다."라고 우선 소개되는 것처럼요. 오늘날 기업이 주는 미술상은 예술가에게 돈과 명예를 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사회, 경제 체계 안에서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게 만듭니다. 따라서 예술가에게 기업이 주는 미술상은 반드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대상입니다. 이러한 예술가의 욕망 안에서 기업의 윤리성은 고려할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IMF 이후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금융자본주의의 확산은 시장만능주의를 낳았고, 공동체의 공동성을 철저히 파편화시켰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시절에 괜히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니까요.

2012년 문화예술활동 관련 월평균 수입_출처: 문화체육관광부

우리는 삶을 잊어버리고 생존의 문제에 저당 잡혀 지독한 불안과 불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예술도 이러한 세태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학·미술·건축·사진 등 10개 분야 예술가 2천 명을 대상으로 한 '2012년 문화예술인 실태조사'를 보면, 창작활동으로 월평균 100만 원도 못 버는 예술인이 66.5%, 아예 수입이 없는 경우가 26.2%. "경제적 능력에 대해 한계를 느낀다."고 답한 이들은 83.6%나 된다고 합니다. 두산연강예술상의 공연부문 수상자 1인은 상금 3천만 원과 7천만 원 상당의 신작 공연 제작비를 지원받을 수 있고, 미술부문 수상자 3인은 각각 상금 천만 원과 9천만 원 상당의 지원(두산갤러리 서울/뉴욕 전시, 두산레지던시 뉴욕 입주)을 받습니다. 현재 경제적 능력에 대한 한계를 느낀다고 말하는 예술가가 80%를 넘어가는 시점에 두산연강예술상이 제공하는 상금은 예술가에게 가뭄에 내리는 단비에 비견될 만한 것입니다. 두산그룹 외에도 예술가에게 상금을 수여하는 기업은 많습니다. 무노조 신화를 자랑하는 삼성, 탈세, 비자금 조성을 위해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했던 OCI, 수억, 수천만 원 의 옷과 가방으로 유명한 에르메스.....

두산그룹은 2006년에 2,838억 원의 천문학적인 분식회계와 285억 원의 횡령 및 증권거래법 위반(사업보고서 허위기재)을 했고, 이에 박용성 회장은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 벌금 80억 원을 선고받기도 했었죠. 물론, 예술가도 기업들의 이러한 민낯을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술가의 삶도 생존의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결국, 예술가는 생존의 압박 속에서 기업의 윤리성과 무관한 예술을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술가의 자존감과 자율성은 승자독식이라는 체제 안에서 점차 소멸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생존이 모든 것이 된 사회 속에서 타인과 삶을 나눌 수 있을까요. 예술가의 생존 문제는 신자유주위 체제에서 나타나는 예술의 퇴조 현상에도 그 이유가 있습니다. 심보선은 『그을린 예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혁신과 독창성이라는 예술의 주문은 자본의 광고 카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제 예술은 그 광휘를 잃어버린 채 평범하고 궁색한 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서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예술은 우정의 손길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자신의 평범함과 궁색함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술은 즉각 시장(market)의 도움을 빌려 자신의 지위를 되찾으려 한다. 시장의 컨설팅을 수용하는 대가로 예술은 다시 비범해지고 위대해진다."

심보선, 『그을린 예술』, 민음사, p.31-32.

어쩌면 오늘날의 예술은 스마트폰보다도 못한 존재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위무하기 위해서 시장과 생존에 끌려다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가 김훈은 한 인터뷰에서 그가 유년기에 겪었던 전쟁과 가난을 언급하며 "나는 살아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었습니다. 어쩌면 현재의 예술가가 처한 상황은 간접적인 전쟁상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만약, 현재의 예술가가 처한 상황이 간접적인 전쟁상태라면, 예술가가 기업의 윤리성과 상관없이 관계를 맺는 것은 예술가가 사회적인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이 예술의 속물화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업이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예술가가 기업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예술도 분명 존재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속물화도 결국은 이 시대가 낳은 새로운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에 대한 관점은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특정 이상만이 선택되어 현실화된다면, 그 이상은 다른 사람들의 이상을 억압하게 됩니다. 이는 종교 때문에 발생하는 전쟁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따라서 공동체는 다양한 이상들이 상호참조 되며 끊임없이 갈등하는 구조의 속에서 건강한 공동성을 보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상의 다양성이기 때문에, 예술이 속물화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비판할지언정 제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예술의 속물화보다 무서운 것은 예술을 통해서 지향할 수 있는 이상이 획일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술의 속물화가 하나의 이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예술의 속물화에 대해서 건강한 비판의식을 담아낼 이상도 분명히 존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의 양면성이 극대화 되는 이 시대에 예술의 속물화에 반대편에 있는 이상은 독아론적인 순결주의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독아론적 순결주의가 정치적 오류를 범한 모든 사람을 배제함으로써 스스로 고립되는 좌파와 같은 길을 걸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양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모든 것을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환원해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예술생태계는 자본과 결탁한 자신의 남루한 모습에 대해서 건강한 비판을 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심지어 이러한 비판이 예술생태계 안에서 드러날 경우, 그 비판자는 은밀하게 고립되어 왕따가 되기도 합니다. 이는 예술을 통해서 지향할 수 있는 이상이 심하게 획일화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획일화되고 있는 이상에 대해서 건강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보전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을 결국 훼손되고 파괴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윤리성이 결여된 기업과 예술가의 밀회는 제거해야 할 현상이 아니라 삶과 예술이 가진 다면성 중에 하나입니다. 다만 이러한 현상이 우리의 삶과 예술 속에서 확고부동한 이상으로 정립되어 다른 이상을 억압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예술의 속물화가 유일한 이상으로 정립되는 현실 속에서 이에 대하여 비판하고 행동하는 것은 최규석 작가의 말대로 "가장 앞에서 가장 날카롭다가, 가장 먼저 부서져 버리고 마는 송곳" 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술생태계는 매우 좁고 폐쇄적이라 이곳에서 송곳처럼 튀어나와 시류를 거스르는 이상을 제시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앞서 말한 것처럼 조용히 왕따가 돼버립니다. 우리는 삶과 예술이 가진 다면성에 입각하여 균형을 맞추려는 사람들이 왕따로 전락하는 구조를 비틀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김창인의 투쟁을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도 왕따가 될 것이고 우리의 삶과 예술도 결국에는 파국에 치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힘든 현실에서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선 송곳처럼 튀어나와 부서졌던 많은 사람들을 잊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 기억투쟁에서부터 삶과 예술은 다양한 이상을 아우를 가능성을 품게 될 것입니다.

* 이 글은 예술가 생명연장이 주최한 공개컨퍼런스 "우리는 누구에게 저항하고, 무엇을 책임질 것인가"에서 홍태림이 발표한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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