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2014년 11월 20일 12시 22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11월 20일 12시 28분 KST

출퇴근만 4시간 청춘이 다 가네

11일 오전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 신도림역에서 시민들이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다. ⓒ한겨레

출근 거리는 행복과 반비례한다.

서울연구원이 지난해 내놓은 ‘대중교통 서비스 개선을 위한 서울시 출근통행의 질 평가’ 보고서를 보면, 출근 거리가 짧을수록 대중교통 행복지수가 높았다. 단거리(5km 미만) 통근자의 행복지수(73.9)가 가장 높았고, 중거리(5~25km)는 71.6, 장거리(25km 이상)는 70.1이었다. 당연하다. ‘지옥철’과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건강을 잃는데 행복할 리 없다.

그동안 이것은 내 탓이었다. 돈이 없어서 서울 외곽에서 사는 죄, 이 회사 떠나면 다른 곳 갈 데 없는 죄였다. 슬프지만 커피믹스 한 잔 타먹고, 에너지드링크 마시며 웃고 지나가야 하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공장이 아닌 사무실의 노동자에게도 노동권이 있다. 장시간 출퇴근, 늘 있는 야근, 강제로 동원되는 사내 행사, 상사의 언어폭력 등 오래된 직장문화를 이른바 ‘웃픈’(웃기고 슬픈) 현실로만 넘길 수는 없다.

먼저 세계 최고 수준이면서 점점 늘어나고 있는 장시간 출퇴근을 하는 한국 직장인의 삶을 살폈다. 설문조사 결과 ‘출퇴근 때문에 아픈 적이 있다’는 직장인 비율은 41.3%에 달했다. 둘 중 한 명 꼴이다. 장시간 출퇴근으로 인해 가족과 지역 커뮤니티와의 대화가 줄어 정치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장시간 출퇴근이 사소하게 보일지 몰라도 개인의 삶과 기업,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컸다.

<한겨레21>은 앞으로 직장인들이 일상에서 겪는 크고 작은 애환을 꾸준히 다룰 예정이다. 사내 체육대회나 봉사활동에 강제로 참여해야 한다거나, 상사의 욕설 등 비합리적인 기업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자우편(wani@hani.co.kr)으로 보내주시면 함께 고민하며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찾아보련다. _편집자

새벽 6시10분 휴대전화 알람으로 설정한 노랫가락이 귓전을 파고든다. 직장생활 3년차인 김민주(31·가명)씨가 억지로 눈꺼풀을 올렸다. “아아, 가기 싫다.” 몇 차례 몸을 꿈틀거려보지만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순 없다. 화장실에 다녀와 로션을 바른다. 잠시도 지체할 시간은 없다. 입고 갈 원피스와 코트는 간밤에 미리 챙겨뒀다. 새벽 6시30분, 함께 사는 가족들이 깰까 싶어 조용조용 현관문을 열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 짙게 깔린 어둠을 헤치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이 하나둘 보인다. 김씨는 검은색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5분 동안 종종걸음을 했다. 16번 마을버스를 타야 한다. 멍하니 5분을 흘려보낸 뒤 마을버스를 탔다. 10여 명을 싣고 달리는 마을버스 안에는 라디오 뉴스만이 쩌렁쩌렁 울린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 내의 이슬람국가(IS) 공습을 명령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사막 전쟁은 멀고도 먼데, 내 앞 출근 전쟁은 누가 막아주려나.

낯선 이들이 함께하는 ‘수면버스’

새벽 6시46분 M4101 급행버스 종점 정류장에 내렸다. 눈앞으로 시커먼 뒤통수들이 즐비하다. M4101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다. 어림잡아 100명은 될 것 같다. 버스 두 대는 겸허히 보낼 수밖에 없는 수다. 입석은 허용되지 않는다. “으아, 월요일이라 그런가.” 어느덧 해가 솟았다. 검은 인파 사이로, 버스가 언제 오는지를 살피는 초조한 얼굴만이 보일 뿐이다. 한 인터넷 누리집에는 M4101 버스를 두고 ‘출근시간대마다 이 노선을 타기 위한 줄이 매우 길게 늘어선다’고 소개돼 있다. ‘국가대표 난개발 지역의 구원투수’라고도 했다. 지하철 등 대중교통망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곳에 이사온 직장인들은 광역버스밖에 믿을 게 없다.

아침 7시 버스에 올랐다. 예상대로 버스 두 대를 보낸 뒤였다. 이 버스도 놓칠까봐 앞서 타는 사람들의 수를 셌다. 항상 앉는 곳인 두 번째 줄 창가 좌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가방엔 숙면을 위한 비장의 무기가 있다. 안대다. 옆 좌석 승객들은 주섬주섬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10여 분이 흐르자 모두들 잠이 든다. 낯선 이들이 함께하는 거대한 ‘수면버스’는 경부고속도로 버스전용차선에 올라탔다.

아침 7시55분 잠에서 깼다. 수면버스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한남대교 위에서 햇볕을 받고 있다. 다들 눈을 뜨고 있다. 회사가 가까워지고 있다.

“최근 서울시 주택 가격의 과도한 상승과 수도권의 지역별 주택 가격 격차가 장거리 통근을 유발하고 있다.” -한국교통연구원

아침 7시57분 서울 종로2가 사거리 정류장에 도착했다. 출근시간은 8시까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종로 거리를 내달렸다. 8시하고도 1분. 회사 건물로 들어섰다. 지각이다. 1시간30분 전에 출발했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인사팀에서 ‘늦었다’는 경고 전자우편을 보내올 것이다. 출근길 1분, 1분이 스트레스다.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은 오전 9시부터다. 그런데 회사는 업무 시간 전 1시간을 ‘자율학습 시간’으로 정했다. 고등학교에서도 반강제 ‘야자’를 자율학습이라고 한다. 오늘 자율학습 시간엔 근처 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해결했다.

통근시간 1시간 이상, 261만 명

김씨는 회사를 향해 멀리서 오는 수도권 장거리 통근자 261만 명 가운데 한 명이다. 한국교통연구원이 2012년 내놓은 ‘국민 통근통행 부담격차 완화 정책방안’ 보고서는 서울·인천·경기도 거주 통근자 가운데 통근시간이 1시간 이상인 사람은 261만 명(2010년 기준)이라고 했다. 2000년에 견줘 무려 78만여 명이나 늘었다. 경기도가 45만 명으로 가장 많다. 경기도에 대규모 주거지가 개발되면서 인구가 늘었지만, 직장은 여전히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좀더 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살던 김씨 역시 10년 전 부모님을 따라 경기도 용인시로 이사했다. 출퇴근 스트레스가 극심해지자 독립을 고민하기도 했다. “회사와 가까운 집을 찾으려니 종로나 마포 쪽인데 전세비가 억대라서 포기했다. 결혼 준비도 해야 하는데 월세로 돈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교통연구원은 “최근 서울시 주택 가격의 과도한 상승과 수도권의 지역별 주택 가격 격차가 장거리 통근을 유발하고 있다”고 했다.

그 결과 한국의 하루 평균 통근·통학 시간(58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길다. 도쿄를 중심으로 거대한 수도권을 형성한 일본의 평균 통근시간도 40분이었다. OECD 평균은 28분으로 한국의 절반 수준이다. 국토가 넓은 미국은 21분이다. 그나마 한국과 비슷한 나라는 OECD 회원국이 아닌 중국(47분)이다.

세계 최고 수준인 장거리 출퇴근으로 인해 직장인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한겨레21>이 취업 포털 인크루트에 의뢰해 직장인 1582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출퇴근 시간에 스트레스를 매일 느끼는 사람은 31.4%(496명)에 달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느낀다’는 응답도 35.6%(564명)였다.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응답한 이는 10%(158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출퇴근 때 가장 속상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허비하는 시간이 아까울 때’(24.1%)를 가장 많이 꼽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 숨이 막혀올 때’(20.5%)가 뒤를 이었다. 스트레스가 상당하다보니 ‘출퇴근 거리 문제로 집을 옮기려 한 적이 있다’(51.6%)와 ‘직장을 옮기려 한 적이 있다’(52.1%)라는 응답도 절반을 넘었다. ‘출퇴근 문제로 아픈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41.3%(654명)가 ‘있다’고 답했다.

출퇴근으로 매일 스트레스 31.4%

외국에선 장거리 출퇴근이 직장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다. 영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루이스는 런던 통근자 남녀 40명을 대상으로 일주일간 뇌파·맥박수·혈압을 측정했다. 대부분의 시간에 실험 대상자들은 편안한 상태였다가 갑자기 맥박이 엄청나게 빨라질 때가 있는데 그것은 통근 기차가 조금이라도 연착할 때였다고 독일 주간지 <차이트>가 전했다. 이들의 순식간에 치솟는 혈압은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는 사람이나 전투기 조종사들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11월12일 새벽 6시30분께, 경기도 파주운정보건지소 근처 버스정류장에 서울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있다. 아침 7시를 넘겨 정류장에 오면 30분을 기다려야 버스를 탈 수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겨레

미국의 워싱턴대학 연구진도 2012년에 비슷한 연구 결과를 내놨다. 출근 거리가 16km 이상인 4300여 명의 통근자를 연구한 결과 이들이 일반인보다 고혈압일 가능성이 높으며, 24km 이상인 출근자는 비만과 운동 부족일 위험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를 이끈 크리스틴 호너는 “긴 출근 거리가 운동을 어렵게 해 체중 증가와 운동 능력 감소, 고혈압을 일으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스웨덴에서는 장거리 통근자(30km) 부부의 이혼율이 단거리 통근자와 비교해 40%나 높았다는 연구도 있다. 스웨덴 우메오대학의 에리카 샌도우 교수가 전체 장거리 통근자 부부의 16%가 결혼한 지 5년 내에 이혼한 것을 확인했다고 독일 주간지 <차이트>는 전했다. 장거리 통근이 건강뿐만 아니라 가족관계와 사회생활까지 위협하는 것이다.

‘현재 직장에 입사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던 요인’에 대해 한국 직장인은 ‘출퇴근이 편리한 근무 위치’를 3위로 꼽았다. ‘고용안정성’과 ‘경쟁력 있는 급여’ 다음이었다. -타워스왓슨 2012년 설문조사

경기도 파주시에서 서울 종로구 계동까지 출퇴근했던 장아무개(37)씨는 최근 직장을 옮겼다. “집에서 나와 회사에 도착하면 딱 2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6개월 정도 지내니 버스에서 잠만 자고 몸이 축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해도 늦은 밥 먹고 자기 바빴다.” 1년9개월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그는 집에서 자동차로 15분 걸리는 곳에 새 일자리를 구했다. 장씨는 이제 아침 식사도 하고, 퇴근해서는 아이들과 놀고 대화도 한다. “난 운이 좋은 경우다. 30대 중·후반 직장인이 이직하고 싶어 해도 마땅한 곳을 찾기 어렵다.”

일부 대기업 자율출퇴근제, 누가 하나

장씨는 찾기 힘든 경우다. 직장인이 장거리 통근을 벗어나는 방법은 많지 않다. 회사가 주로 몰려 있는 서울 강남권과 종로, 여의도 등의 주변 집값은 비싸다. 매해 치솟는 전세 보증금과 아이들 교육 문제도 발목을 잡는다.

직원이 집을 옮기기 힘들다면 대책을 내놓아야 할 곳은 기업이다. 하지만 기업은 무관심하다. 직원이 아침 교통 정체를 피하기 위해 출근 시간을 뒤로 옮기면 그는 회사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한국의 기업문화는 일찍 출근한다고 해서 일찍 퇴근하기도 어렵다. 장거리 통근자는 단거리 통근자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회사와 집 밖에서 보낸다.

해결책으로 삼성 등 일부 대기업에서는 자율출퇴근제를 도입하고 있지만 현장의 반응은 차갑다. 삼성전자 연구원의 한 가족은 “자율출퇴근제가 있다는 것은 들었으나 일부 부서에서만 한다”고 말했다. “남편은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퇴근하고 있다. 최근에는 3주에 한 번씩 무조건 주 7일 근무를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자율출퇴근제는 겉으로만 좋아 보이는 정책이다.”

대부분의 기업 최고경영자들은 직원들이 장거리 출퇴근으로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직원들이 아침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줘야 하고, 러시아워로 ‘파김치’가 돼서 회사에 출근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다국적 인사컨설팅업체인 타워스왓슨코리아의 김기령 대표는 “경영자들이 생각을 바꿔 유연근무제를 제대로 시행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국은 출근 시간이 아침 7~9시에 몰려 있는 게 문제다. 회사도 직원들이 잘 쉬었다가 아침에 생생하게 출근하는 게 가장 좋다. 그러려면 시간 유연근무제를 도입해 출퇴근 시간대를 다양화하는 게 유일한 대안이다.” 김 대표는 “물론 상사가 직원에게 생각지도 않은 일을 부가시켜 야근하게 하면 유연근무제는 도입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출퇴근 문제는 기업의 성과와도 관련이 있다. 타워스왓슨이 전세계 직장인 3만2천 명(한국 1천 명)을 대상으로 2012년에 한 설문조사를 보면, ‘현재 직장에 입사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던 요인’에 대해 한국 직장인은 ‘출퇴근이 편리한 근무 위치’를 3위로 꼽았다. ‘고용안정성’과 ‘경쟁력 있는 급여’ 다음이었다. 인재를 잡으려면 출퇴근 시간이 고려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30분만 일찍 퇴근해도

저녁 6시 김민주씨는 다행히 칼퇴근을 했다. 집에 좀더 빨리 갈 수 있는 명동 국민은행 앞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대신, 다시 종로2가 사거리 정류장에 섰다. 출근길보다 더 힘든 퇴근길의 시작이다. 승객을 가득 채운 버스는 명동 국민은행 앞 정류장을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종로2가를 출발한 버스는 북창동, 남대문시장, 명동 등 강북 도심을 한 바퀴 돈 뒤 시외로 빠져나간다. 이렇게 도로에서 ‘멍하니’ 2시간을 보낸다. 김씨는 “30분만 일찍 퇴근하면 버스에 앉아 일부러 서울 도심을 30~40분 돌 필요가 없다. 이왕 새벽에 출근하고 있으니, 유연근무제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관련 기사 : 변함 없는 ‘지옥철’ 출퇴근 라인, 2호선

Photo gallery 출퇴근만 4시간 See Gallery

PRESENTED BY 호가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