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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9월 15일 14시 49분 KST | 업데이트됨 2021년 09월 15일 14시 49분 KST

문학 작품에 ‘성인지 감수성’ 반영해 수정하는 출판계 움직임 : 주인공이 이성 친구와 스킨십 고민할 때 “세 번은 거절해야 한다” 조언은 이제 없다

여자로 ‘만들어진다’ →  여자가 ‘되는 것이다’

Katrin Ray Shumakov via Getty Images
자료 사진

“건우가 손을 잡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소라는 세번은 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자들은 너무 쉬운 여자는 좋아하지 않는다나.”

2004년 출간된 어느 소설 속 친구의 조언은 지난해 개정판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다. “건우가 손을 잡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소라는 전적으로 내 마음에 달린 거라고 했다. 내가 잡고 싶으면 잡고 싫으면 말고”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해 문학 작품을 고쳐 쓰는 움직임이 출판계에서 활발해지고 있다. 확산세를 내다보긴 어렵지만, 미투 운동 뒤 달라진 젠더감수성 기준을 담아 스스로 문장을 들어내고 수정하려는 흐름은 뚜렷이 포착된다.

이금이 작가는 최근 1년 동안 <유진과 유진> <너도 하늘말나리야> <소희의 방> <숨은 길 찾기> 등 자신의 대표작 4편을 고쳐 썼다. 그때는 맞을지 몰라도 지금은 맞을 수 없는 표현이 곳곳에 있었다. 이 작가는 “남자애가”, “여자애가”로 시작되는 문장들, “늘씬했다”처럼 불필요하게 외모를 묘사하는 표현들, 외가·외삼촌 같은 가족 호칭 등을 바로잡았다. 외가의 외는 바깥 외(外)자로, 부계 혈통만 중시하는 가부장제의 잔재라는 지적을 받았다.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은 이를 ‘어머니 본가’로 바꿔 부를 것을 제안했었다.

밤티 출판사
이금이 작가의 책 와 표지. 이 작가는 이 책에 담긴 차별 및 성고정관념 표현을 고쳐 써 개정판을 냈다.

문장을 통째로 들어내거나 바꾸기도 했다. <유진과 유진>(2004년 출간, 2020년 11월 개정)에서 주인공이 이성 친구와 스킨십을 고민할 때 “세번은 거절해야 한다”는 친구 소라의 조언 따위는 이제 없다. 미투(나도 고발한다) 운동 등을 거치며 ‘여자의 아니오(No)는 곧 예스(Yes)’라는 말은 사어가 됐다. ‘예스’라는 표현만이 곧 동의다. 그러니 죽은 조언도 더는 조언일 수 없는 셈이다.

<숨은 길 찾기>(2014)처럼 비교적 최근에 나온 작품도 예외가 되지 않았다. 이 작가는 소설 초판의 “미르는 자기네처럼 허전했을 바우네의 추석을 떠올렸다. 차례를 지낼 테니 덜 허전할까? 남자들끼리 차례 음식 만드는 것을 상상하자 차라리 자기네가 나은 것 같았다” 대목을 이달 초 나온 개정판에서 아예 삭제했다. 주인공 미르는 어머니와, 바우는 아버지와 살기에 아버지 한부모 가정에 대한 편견이 강화될 여지가 우려됐다.

이금이 작가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청소년기는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이때 접한 사상이나 이론에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읽히지 않는 책이라면 모를까, 꾸준히 읽히고 있는 작품들인데 과거에 머물러 있는 생각과 표현을 그대로 놔두기는 작가로서 마음이 불편해 개정판을 내게 됐다”고 했다.

한겨레
젠더 감수성 반영 개정 사례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책도 수정돼야 한다

달라진 성인지 감수성 기준을 반영해, 말하자면 ‘젠더 개정판’을 주도하는 출판사들도 있다. 열린책들은 5년여 전부터 판 갈이를 할 때마다 “처녀작”, “여류 작가”, “계집애” 등 비칭·멸칭을 수정하고 있다. 남성 화자는 반말로, 여성 화자는 존댓말로 번역해오던 관행도 바꿨다.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1992년 한국어 초판 출간)이 대표적이다. 작중 화자인 남편은 아내에게 시종일관 반말로, 아내는 남편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는데 두 사람의 연령대가 비슷하고 평소 격의 없는 사이라는 점을 감안해 옮긴이와 상의 끝에 대화문을 수정했다.

지난 5월 열린책들이 출판사 트위터 계정을 통해 이 사실을 알리자, 5600여건이 리트윗됐다. 반응은 열렬했다. ‘그냥 다시 낸 책이라고 하면 읽은 책이라며 넘길 텐데 수정했다고 하니까 솔깃하다’ ‘다른 출판사도 수정해주면 좋겠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김영준 열린책들 이사는 “흔히 ‘유교패치’라고 하는, 일부 번역 문학에서 남녀 사이 대화에 (불균형적인) 존칭이 적용되는 경우가 있었다. 재쇄 찍을 때마다 이런 부분을 요즘 성인지 감수성에 맞춰 바로잡고 있다. 독자가 오랜만에 책을 보려다 말투나 여성비하적 표현 때문에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는 일이다. 특히 세계문학전집처럼 오래가는 책을 내는 우리 출판사의 경우 책의 생명력을 연장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작업은 필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개정판도 존칭 수정 등을 거쳐 다음달 나온다.

 

여자로 ‘만들어진다’ →  여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여성주의의 저 유명한 경구도 이런 흐름에서 결국 사라지게 될 듯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대표작인 <제2의 성>을 1973년 국내 처음 소개한 을유문화사가 지난 10일 전면 재개정했기 때문이다.

을유문화사 제공
제 2의 성

48년 만에 오역과 시대에 뒤떨어진 표현을 바로 잡으려 한 결과, “우리는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되는 것이다.” 기존의 남성 역자 대신, 보부아르 연구자로 새 번역을 맡았던 이정순 박사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만들어진다’는 여성의 수동성이 부각된 표현이다. 여성에게 자율성이 없으면 여성 해방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표현을 ‘되는 것이다’로 바로잡았다. 또 ‘여권 신장론자’ ‘여성 해방론자’로 번역됐던 페미니스트(féministe)를 ‘페미니스트’ 또는 ‘여성주의자’로, ‘여권 확장반대론자’는 ‘안티페미니스트’로 고쳤다. 이 용어들이 시대에 더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록이자 사료의 성격이 강한 출판물에 동시대의 성인지 감수성을 불어넣으려는 노력은 때로 논쟁거리가 된다. 홍순철 비시(BC)에이전시 대표는 “독일에서는 편집자협회 차원에서 독일어 성별 표시법에 대한 논의를 이어오고 있다”며 “원작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차별을 개선한 표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젠더 개정판’은 이제 시작되었다.

 

한겨레 최윤아 기자 a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