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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나래의 성적 농담이 불쾌하다는 남성들에게 : 성을 소재로 농담할 권리는 남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15금’ 수위가 적절했냐면 글쎄지만, 경찰조사·성추행 논란까지 될 일은 아니다.

  • 이승한
  • 입력 2021.05.08 12:05
  • 수정 2021.05.08 14:39
박나래
박나래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2018년도의 일이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코미디언 트레버 노아는 그해 러시아 월드컵에서 프랑스 대표팀이 승리한 것을 축하하며 “아프리카 팀의 승리를 축하한다”고 했다가 일부 프랑스인들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트레버 노아는 23명의 대표팀 선수 중 14명이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흑인 혈통이라는 점을 짚으며 그 사실을 기념한 것인데, “아프리카 팀”이라는 표현이 하필이면 프랑스 내 극우 인종주의자들이 “이 팀은 프랑스 팀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때 사용하는 레토릭과 닮았다는 것이 항의의 이유였다. 트레버 노아에게 항의한 사람 중에는 주미 프랑스 대사도 있었는데, 트레버 노아는 자신이 진행하는 시사 토크쇼 <더 데일리 쇼>에서 대사의 항의 서한을 소개하며, 자신은 흑인 선수들의 아프리카계 혈통을 기념한 것이지 그것을 근거로 그들이 프랑스인임을 부정하려던 것이 아니라고 부연했다.


차별의 농담에도 맥락이 있다

해명과 항변의 말미에, 트레버 노아는 서구 백인 국가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식민 지배하고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았던 역사를 짚은 뒤 이렇게 덧붙였다. “요즘 세상은 뉘앙스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미국을 예로 들자면 대안 우파 세력들이 그러죠. ‘우리가 말하던 게 그거잖아. 저 선수들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트레버 노아는 그런 이야기를 해도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닌데, 우리가 하면 인종차별주의자인 거야?’ 네, 전 그렇다고 말하겠습니다. 왜냐고요? 전 맥락이 전부라고 믿거든요. 전 제 친구들에게 ‘어떻게 지내, 내 검둥아’(my nigga, 흑인을 비하하는 인종차별주의적 멸칭이라 다른 인종, 특히나 백인이 쓰면 큰 논란의 대상이 되지만, 이 말을 재전유하며 흑인이 쓸 때는 인종차별의 뉘앙스가 있다고 해석하지 않음)라고 말할 수 있지만, 백인이 와서 같은 표현을 쓴다면, 네, 엄청난 차이가 있는 거죠.”

농담은 언제나 까다로운 작업이다. 농담을 던지는 사람과 농담을 듣는 사람, 농담의 대상이 된 사람이 각각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에 따라 그 맥락과 뉘앙스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트레버 노아가 지적한 것은 크게 농담의 당사자성과,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권력관계로 나눠볼 수 있겠다. 자기 자신 또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흑백 혼혈로서, 트레버 노아는 자신에게 흑인과 관련된 농담을 주체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트레버 노아가 인종 농담에 대한 담론을 펼치며 단순히 ‘나는 흑인이니까 흑인 농담을 할 수 있음’이라고 납작하게 주장한 것은 아니다. 트레버 노아는 백인 이외의 다른 인종들을 대상으로 인종차별과 식민 지배를 자행해왔던 백인들의 유구한 역사와 여전히 백인 중심으로 구성되어 인종차별을 다 극복하지 못한 서구 사회의 권력구조가 인종 농담의 배경 맥락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트레버 노아는 자신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통해 자신이 명확한 당사자성을 획득하지 않은 이슈에 관해서도 서슴없이 농담을 던진다.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에 관한 농담이나, 백인들이 발리와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를 여행하면서 해당 국가를 어떻게 대상화하는지에 관한 농담은 그의 스탠드업 코미디 안에서 가장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여전히 우위에 서 있는 집단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트레버 노아는 자연스레 청중에게 상대적 소수자 집단의 관점을 설득한다. 이런 전략이 트레버 노아만의 것은 아니다. 수많은 흑인 코미디언들이 백인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춤을 못 추는지를 농담의 소재로 삼고, 수많은 영국 코미디언들이 영국 왕족이 신분 차이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왕실 특유의 발음을 과장되게 흉내 내며 신분제의 존재를 상기시켜도 비판받지 않는 건, 현실에서 작동하는 권력관계의 위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백인 코미디언들이 흑인들의 행동거지나 말투를 흉내 내며 농담의 대상으로 삼거나, 영국의 귀족 출신 코미디언이 평민들의 발음을 과장되게 흉내 낸다면 당장 인종차별주의자나 계급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을 것 또한 같은 이유다. 그 어떤 농담도 현실 세계의 권력관계로부터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15금’ 수위 적절했냐면 글쎄지만, 경찰조사·성추행 논란될 일 아냐

‘9금과 19금 사이’의 격차를 보여주겠다며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방송인 헤이지니와 코미디언 박나래를 함께 출연시킨 웹예능 <헤이나래>는, 박나래가 남자 모양의 고무인형 ‘암스트롱맨’을 가지고 노는 과정에서 인형 손의 위치를 인형 다리 사이로 잡아당기는 장면이 ‘성희롱’이라는 논란 끝에 폐지되었다. 15살 미만 관람불가라고 자체 등급을 매기긴 했지만, 접속하는 사람들의 연령을 정밀하게 걸러낼 수 있는 장치가 없는 유튜브에 올라온 콘텐츠인데다가,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 <헤이지니>의 문법을 차용해온 프로그램에서 농도 짙은 성적 농담을 했다는 이유로 논란을 피해 가지 못했다. 시청자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제작진은 우선 해당 회차를 블라인드 처리하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래도 논란이 가시지 않자, 박나래와 그의 소속사 또한 공식 입장을 발표하며 방송 내에서 수위 조절에 실패해 부적절한 콘텐츠를 제공한 사실에 대해 사과했다. 그럼에도 논란이 가시지 않자, 제작진은 <헤이나래>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논란은 가시지 않았다. 박나래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박나래 하차를 요구하는 남성 네티즌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있으며, 한 네티즌은 박나래를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불법 정보 유통)로 경찰에 고발했다. <헤이나래>가 ‘음란물’이라는 이야기인데, 법조계는 박나래의 행동이 법률상 ‘음란’의 기준에 미달할 가능성이 높아 형사처벌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지만, 고발장을 접수한 서울강북경찰서는 형사처벌이 가능한지 검토해보겠다며 수사 의지를 밝혔다.


성을 소재로 농담할 권리

박나래가 <헤이나래>에서 보여준 농담이 적절했는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는 힘들다. 상술한 대로 ‘15살 이상 관람가’를 표방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만 15살 미만의 사용자가 접속하는 걸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없는 환경에서, 그것도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의 문법을 차용해온 프로그램에서 성적인 농담의 수위가 과했다는 것은 분명 비판의 대상이 될 일이다. 하지만 이게 과연 ‘성추행’ ‘성희롱’이라는 맥락으로 해석이 되고, 그래서 박나래가 경찰 조사를 받으며 다른 출연 프로그램들에서 하차까지 해야 하는 일인가 따지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헤이나래>의 콘셉트를 짠 것도, 편집과 검수 과정에서 문제가 된 장면을 걸러내지 않고 방영한 것도 제작진이었다. 그런 맥락과 무관하게 오로지 콘셉트를 구현해 보인 박나래만이 조직적이고 집요한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무엇보다 “남자 코미디언이 이렇게 했으면 매장감이었을 것”이라며 박나래의 하차를 주장하는 것은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기계적 기준 적용이다.

 

여성의 성적 농담이란 맥락 봐야, ‘젠더 위계 역전’ 효과 낳기도

한국에서 성을 소재로 농담할 권리는 오랫동안 남성이 독점적으로 누려왔다. 남성이 성을 밝히고 향유하는 것은 짓궂거나 제 욕망에 솔직한 것으로 평가되어왔으며, 이런 농담에 정색하는 것은 심할 때면 내숭이나 위선으로까지 몰리곤 했다. 반면 성에 대한 욕망을 이야기하는 여성은 ‘정숙하지 않은 여성’이라는 낙인의 대상이 되어왔다. 똑같이 성을 추구하고 상대 성별의 육체를 향한 적나라한 욕망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오랫동안 성을 주도적으로 향유해온 남성의 경우와 그것을 억압당해왔던 여성의 경우는 현실 세계 속의 권력관계와 위계라는 배경 맥락이 다른 것이다. 같은 농담도 남성이 할 때엔 끊임없이 여성을 대상화하고 종속시키려는 젠더 위계를 상기시키지만, 여성이 하면 실존하는 젠더 위계를 역전시키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트레버 노아가 말했던 것처럼, 농담은 맥락이 전부인 것이다.

박나래의 농담이 불편할 수 있다. 15살 이상 관람가라고 해도 부적절했다고 지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과문과 해당 프로그램 폐지에도 기어코 이것을 ‘성희롱’ ‘성추행’이란 프레임을 씌우며 “남자나 여자나 똑같네”라는 식으로 물을 타려 한다면, 부득이하게 반문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신이 불쾌한 이유가 현실 세계의 젠더 위계, ‘성을 밝힐 독점적인 권리’를 감히 여성이 침해했다는 특권의식과 무관하다고 확언할 수 있나?

▶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 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명 한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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