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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04일 05시 23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1월 04일 14시 12분 KST

정사 [삼국지], 패배자가 쓴 승자의 역사?

내가 제일 싫어하는 클리셰 중의 하나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임. 전제왕조 시절에 망한 나라의 백성 진수가 교묘히 기록해 둔 촉한의 사적에 힘입어 천년 후에! 촉한정통론이 대세가 되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기록하는 이가, 잊지 않는 이가 승자가 되는 게 아닐까?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워낙 유명한 탓에 중국의 정통 역사서 [삼국지]는 가루가 되게 까이는 경우가 많은데 정통 수꼴(쿨럭;)을 자처하는 이로서 정사(正史)를 옹호해야 할 느낌적 느낌(응?)인지라 진수가 지은 정사 [삼국지]에 대한 썰이나 간만에 풀어 보기로 한다.

우선 정사 [삼국지]가 까인 이유부터 살펴 보자면 25사(二十五史)라 불리는 중국 정사들의 전통에 따라 이 [삼국지]도 전 왕조가 끝난 후 다음 왕조 때 나온 것. 즉 중국의 삼국시대를 최종적으로 끝낸 진나라(서진, 西晉) 때의 저술이다. 그런데 진은 삼국 중 위(魏)의 마지막 천자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았음. '선양'은 요새로 치면 '착한 양보'(쿨럭;) 같은 것으로 '착한'이란 말이 오용되듯이 실은 전 왕조의 황제를 협박해 그 자리를 강탈하는 것임에도 일단 겉으론 전 왕조의 마지막 임금이 덕이 부족하다며 새 왕조의 창업자에게 물려주는 형식이다. 실은 [삼국지연의]에도 나온 위 문제(文帝) 조비가 후한(後漢)의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은 것이 그 시초로, 일본의 중국사 연구자 미야자키 이찌사다가 아예 왕조 교체의 패턴이라며 약간 비아냥-_-거렸듯이 그 후 위-진-송-제-양-진 즉 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조 왕조 교체시에 계속 발생한 상황이기도 했다. 속내야 어쨌든 겉으론 평화적인 왕조 교체였기에 선양을 받아 열린 새 왕조는 전 왕조의 황실 일족들을 잘 대우해주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보니 서진 때 쓰여진 정사 [삼국지]가 자기네한테 선양해준 위를 삼국 중 정통으로 본 편향이 있었다는 것은 꾸준히 지적되어 왔다. 남송의 배송지가 쓴 이른바 배송지주(注)가 역사쪽에서의 정사 [삼국지]에 대한 반론이라면 한족(漢族)이 유목민족에게 판판히 당해가는 송대(宋代) 이래의 정치상황은 급기야 삼국 중 가장 약했던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본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를 낳기에 이른다. 물론 역사서 중에서도 사마광의 [자치통감]까지만 해도 유지되던 위를 정통 왕조로 보았던 사관이 주희의 [자치통감강목]에 이르러서는 촉한을 정통왕조로 보는 걸로 일종의 수정주의(웃음)사관으로의 전환이 이뤄지기는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일종의 전근대 중화민족주의랄까 그런 것에 의해 집중포화를 맞은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어떤 사람인가? 서진 왕조의 개(쿨럭;)이거나 천하의 대악당(흠흠;) 조조빠인 것인가? 그러나 놀랍게도 이 진수는 바로 위가 멸망-_-시켰고, 촉한 정통론자들이 드높게 떠받들었던 그 촉한 (지금의 중국 사천성) 출신. 즉 진수는 촉한의 망국민이었던 것이다ㄷㄷㄷ 그런데 이 진수가 왜 촉한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찬탈자 조조/조비 부자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썼단 말인가?! 이는 마치 백제 망국민 부모를 둔 태안만려가 일본에서 [일본서기]를 쓰면서 신공왕후의 신라정벌 얘기를 창작해 냈다는 최인호 작가님의 [잃어버린 왕국]식-_-;의 아이러니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촉한 망국민 진수에게는 어떤 사연이?!

그 비밀(?)을 탐구해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잠시 [삼국지연의] 전체에서 중요한 분수령 중의 하나인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은 제갈량의 제1차 북벌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그 글을 읽고 눈물을 안 흘리면 충신이 아니라는 말까지 있었다는 유명한 "출사표"를 촉한의 2대 황제인 유선에게 바치고 제갈량은 숙적 위나라를 치기 위해 북벌의 장도에 오른다. 제갈공명의 첫 주군이었던 유선의 아버지 유비의 평생의 꿈인 한나라 황실의 부흥이라는 촉한의 건국이념에 따른 대사업으로 제갈량이 융중의 초야에 묻혀 있다가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마음을 움직여 세상으로 나와서 제시한 천하삼분지대계(天下三分之大計)라는 대전략의 마지막 완성 부분에 해당하는 사업이 바로 이 북벌이기도 했고. 그러니 공명 본인에게도 이는 그야말로 필생의 사업이라 할 것이다.

제갈량은 이 북벌을 위해 철저하고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 주군 유비를 분사(憤死)하게 했고 삼국지연의에 의하면 유비와 의형제인 관우를 죽였고 장비의 죽음과도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오나라와 구원(舊怨)을 잊고 동맹을 맺었으며 남만(南蠻)을 쳐서 그 왕인 맹획을 일곱 번이나 사로잡았다가 다시 일곱 번을 풀어주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신공을 발휘하는 것도 다 북벌시에 배후를 안전하게 하여 두려는 전략이었다. 나아가 제갈량은 그의 최고의 적수인 사마의를 모함하는 역공작까지 펼쳐서 그가 위나라 황제 조비의 동생인 진사왕 조식을 옹립하려 한다는 모함까지 해서 그를 배제시키는가 하면 촉한을 배신하여 위나라에 붙었던 상용성의 맹달이 다시 촉에 귀순하겠다는 것까지 수락했으니 뭐랄까 이 북벌은 위의 국력의 5분의 1에 불과한 촉이 쓸 수 있는 모든 카드를 총동원한 느낌적 느낌이다.

이 북벌 초기에 촉한의 장수 위연은 자신에게 5천의 병력만 주면 전한의 수도였던 장안을 함락시키겠다고 대담한 계획을 내세우기도 했는데 분명 A형이었을(뭐래니?) 제갈량은 그런 모험주의적 전술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돌다리도 두들겨보는 식의 용병을 시행했고 천수, 안정 등 농서의 3군을 취하는가 하면 제갈량이 의발을 전하게 되는 백약 강유라는 인재를 얻는 망외의 소득도 이 때 얻은 것이었음.

그러나 위나라가 어떤 나라던가, 당시 중국의 3분지 2인 중원 즉 화북평원을 모두 장악한 나라. 기나긴 중국사에서 중원에 기반하지 않은, 남쪽에서 일어난 통일왕조는 제갈량의 시대로부터 1,000여년이 지난 명이 처음이고 그 외에는 장개석이 있을 뿐. 강남의 경제력이 중원을 뛰어넘은 건 송대에 이르러서였으니 촉한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싸움을 시작한 것이었고 (사실 제갈량 덕에 40여년 버틴 것도 기적이었음) 첫 북벌에서조차 초기에 잠시 흔들렸으나 사마의(나중에 서진의 고조 선황제로 추존)가 복귀하고 나자 빠르게 전열을 정비해 모반한 맹달을 진압했고 희대의 라이벌 제갈량과 사마의는 그 첫번째 용병대결을 가정에서 펼친다.

제갈량이 요충 가정을 맡긴 이는 가장 신뢰하는 부하 마속. 나중에 제갈량은 마속이 삼국지 전체의 향방을 바꿀 대형삽질을 하자 울며 마속을 베며 자신이 울었던(읍참마속, 泣斬馬謖) 이유는 아끼던 부하 마속의 목을 쳐야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속을 중용하지 말라고 했던 주군 유비가 생각나서라고 했지만(아아 무서븐 제갈량ㄷㄷㄷ) 마속이 칠종칠금(七縱七擒)과 같은 전술을 제갈량에게 건의하고 그랬던 걸 보면 아주 허당인 모사(謀士)는 아니라고 보여진다. 또한 마속의 형이 마량(마씨 집안 다섯 형제 중 맏형인 흰눈썹의 마량이 으뜸이라서 백미(白眉)란 말을 낳은 이)으로 유비가 첫 근거지인 형주를 얻은 후에 이를 안정화 시키는데 크게 기여했고 나중에 유비가 오를 침공했을 때도 제갈량과의 교신역할을 맡길 정도의 명문 거족이라 글쎄 나는 "우리 유비님은 언제나 옳으심" 같은 제갈량이 사후에 만든 신화가 아닌가 싶은 느낌적 느낌임. 즉 유비로선 마속을 쓰고 말고에 대해 비평할 정도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 같고 실제 마속이 그리 형편없기만 하지도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제갈량의 울음은 실제로 마속을 아끼는 심정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는 쪽에 나로선 한 표 던지고 싶음. 하여간 마속이 가정에서 한 짓을 보면 마속이 분명 재능은 있었으나 뭐랄까 병법을 책에서만 배우고 실병력운용을 제대로 안 해 본 스멜이 풍기는 것은 사실이다. 마속과 비견할만한 책상물림(응?) 장군은 그 규모면에선 마속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대형삽질을 한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 장평대전의 패장 조괄(趙括) (당시 장평대전에서 패전한 40만 조나라 병사는 구덩이에 파묻혔음-_-;) 정도가 아닐까 싶음;

사실 제갈량은 거의 족집게 과외 선생님 수준으로 마속에게 위군(魏軍)이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했고 사마의도 당근 촉이 길에서 버티고 있으면 큰 낭패일 것이라고 걱정했으나 마속은 부장 왕평의 조언도 무시하고 산 위에 진을 치고 이러면 적을 압도할; 것이라 장담했으니 정신력 제일주의의 태평양전쟁 때의 어느 나라 군대도 막 떠오르는 모습이 아니라 할 수 없음. 그래서 정말 쉽게 이길 수 있었던 이 가정에서의 전투는 마속의 어이없는 병력 배치 탓에 촉의 참패ㅠ로 끝났고 제갈량은 공성(空城)의 허허실실(虛虛實實) 전법으로 그나마 목숨을 부지했고 그것도 박근혜 대통령의 첫사랑이었다는 조운(조자룡)장군(지못미 조장군님ㅠㅠ)이 노구를 이끌고 후위에서 적의 추격을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아슬아슬한 퇴각 전술이었다.

그럼 도대체 진수와 이 가정전투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여기에는 세 가지 정도의 설이 있다(쿨럭;). 우선 진식이란 가정 전투에 참가했다가 마속과 함께 목이 잘린ㄷㄷㄷ 장수가 진수의 아버지라는 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촉한 망국민 진수는 조승상빠가 된 것? 그러나 진식이 죽은 것은 가정 전투 2년 후인 서기 230년이고 이 때는 위와 촉의 전투가 없었기에 이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다.

두 번째 주장은 진수의 아버지가 가정 전투에 참여했는데 패전의 책임을 지긴 했지만 그리 높은 자리는 아니어서 곤장만 맞고 끝났다는 설인데 이는 실은 진나라의 역사를 다룬 진서 열전 중 진수전에 나온 내용인데 다만 진수의 아버지가 받은 형벌인 곤을 잘못 해석한 것이고 곤은 강제 삭발(쿨럭;)을 의미한다는 세 번째 설로 이어진다-_-

어쨌거나 세 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부친이 가정 전투에 참전했다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제갈량으로부터 벌을 받았고 이로 인해 촉에서의 출세길이 진수대에도 막혔으니 그에 대한 복수심에 활활 불타서 필주(筆誅)하는 심정으로 촉한을 까고 이제 새로운 통일왕조가 된 서진에 복무했다는 서사가 되겠다. 마치 조선 말기 조선의 국가 시스템에 절망하여 친일파가 된 조선의 천민 출신과 닮았다는 느낌적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쩐지 아귀가 딱 맞는 것 같은 이 주장은 그럼 사실일까?

하지만 아직 우리는 가장 결정적인 마지막 증거를 검토하지 않았다. 그건 바로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 그 역사서는 과연 흔히 알려진 대로 촉한의 선주 유비와 '물과 물고기처럼 가까운 사이'(수어지교, 水魚之交)인 그의 군사(軍師) 제갈량을 부당하게 폄하한 책인가? 나 같은 남한의 일반 독자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김원중 교수님에 의해 완역본이 나와 있어서(전4권, 민음사) 실제로 그런 편향이 있는지를 직접 읽어 보고 나름대로 판단을 내려볼 수 있다.

그런데 진수의 정사 [삼국지]의 내용을 실제로 따져보기에 앞서 과연 중국 정사에 있어서 정통이란 무엇인가 하는 자칫하면 스콜라적 늪으로 빠질 수 있는 얘기를 최소한이라도 꺼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고 그러기 위해선 중국 25사의 첫머리를 장식한 [사기]를 저술해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 불릴 역사가이지만 역설적으로 남성으로서는 최대의 치욕이라할 궁형을 당한 탓에 [사기]를 저술하게 된 사마천이 만든 중국 기전체 사서의 특징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느낌적 느낌이다.

결국 누구를 정통으로 보느냐는 간단히 말해 해당 역사가가 어떤 인물을 본기에 넣고 어떤 인물을 세가나 열전에 넣어 썼느냐 하는 것으로 우선 정리가 된다. 그런데 기전체 사서의 창시자 사마천부터 그 후의 중국 25사 저자들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 이를 이어 받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과 [고려사]의 저자([일본서기]나 베트남 사서는 어떤지 잘 모르니 패쓰ㅠ)에 이르기까지 이들 역사가들은 자신이 세운 사관에 따라 황제나 왕, 제후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부른 것과는 상관없이 정통을 판단해 왔다.

당장 사마천부터 확고한 신념에 따라(궁형(宮刑)을 당한 상태에서 포기하지 않고 역사를 썼는데 이 남자(?) 뭘 두려워 했으랴!) 본기(本紀)/세가(世家)/열전(列傳)을 분류했으니 그 자신 전한의 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고조 유방의 최대 적수였던 항우를 항우 본기에 넣었으며 (항우가 한나라 입장에서는 반국기단체의 수괴-쿨럭;- 같은 자이지만 중국대륙을 호령했고 실제 한왕 유방까지 포함해 왕과 제후들을 책봉까지 했다는 점에서 황제의 반열에 넣어 본기에서 서술한 것) 한고조 유방의 부인인 여후(呂后)가 유방이 죽은 후 권력을 휘둘렀기에 그 까마득한 옛날인 기원전 2세기 사람이면서도 사마천은 여자 사람인 여후를 당당히 여후 본기에 넣어 서술했고 여후가 다스리는 동안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류의 헛소리를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때가 태평성대였음을 공정히 기록했다. 제후들과 승상급 유력정치인에 대한 기록인 '세가'에서도 사마천은 춘추전국시대를 수놓은 제후국들의 세가와 한고조 유방의 주요 중신인 장량이나 소하 같은 이들의 세가 옆에 진나라에 대한 최초의 반란을 일으킨 민중 출신의 "왕후장상(王侯將相) 영유종호(寧有種乎)"라는 전 근대 동아시아 평민/천민들의 마음을 뛰게 한, "임금과 제후와 장군과 재상이라고 한들 날 때부터 그들의 씨가 다르겠느냐"란 불온한 말을 최초로 발설한 진섭(진승)을 주저없이 세가에 올린 것이 사마천이었다. 진섭은 불과 6개월 제후 노릇을 했을 뿐이지만 철옹성 같은 진(秦)나라의 철권통치에 최초의 균열을 냈다는 점을 사마천은 높게 평가한 것이다. 열전 72편 중에서도 사마천은 진시황의 암살을 기도했던 형가 같은 협객(나쁘게 말하면 깡패, 쿨럭;)들의 얘기를 모은 유협(遊俠)열전을 별도로 둘 정도로 권력자의 입맛에나 맞게 쓰고 시류에만 편승하는 역사관이 되기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실제 콘텐츠에 있어서도 사마천은 예컨대 자신에게 궁형을 내린 무제(武帝)에 대해서는 무제의 서역진출이나 고조선 정벌 같은 업적들은 비정하게 신문 단신급으로 처리하고 무제가 각종 주술사, 점성술사, 사기꾼에게 놀아나며 불로장생약 같은 걸 찾겠다며 헤매는 얘기들을 깨알같이 다루었던 뒤끝 작렬하는 역사가이기도 했다.

이렇게 사마천 자신이 현란하게 구사한 본기/세가/열전 구분법에 따라서 후대의 전근대 동아시아 역사가들도 자신의 사관에 따라 이 기전체의 틀을 활용했다. 예컨대 사대주의 사관이라고 가루가 되게 까여 온 고려시대에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경우에는 의외로(응?) 고구려, 신라, 백제의 역사를 모두 '본기'에 넣어서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반면에 조선시대로 내려가면 [고려사]를 편찬하며 당장 중국에 더 굴신하며 고려왕들의 기록을 제후의 기록에 해당하는 세가에 집어 넣었고 삼국시대 역사서를 쓰면서는 신라의 세 여왕(선덕/진덕/진성)을 왕이 아니라 여주(女主, 무슨 드라마 주인공도 아니고ㅠㅠ)라고 칭하는 어처구니 없는 찌질-_-;한 사관을 보여준 것이 성리학에 찌들어 여성의 권리란 개념은 없던 조선의 그 알량한 선비들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진수는 중국의 삼국시대를 다룬 그의 정사 [삼국지]에서 이런 본기/열전의 구분을 어떻게 활용했을까? 진수는 위서, 오서(吳書), 촉서로 나누어 그의 정사 [삼국지]를 집필했고 태조 무황제(武皇帝)로 추존된 조조부터 위나라 황제들에 대한 기록을 본기에 넣었고 유비나 손권 등 촉과 오의 황제들의 기록은 열전으로 분류하였으니 본기/열전 체계상으로는 위를 정통으로 보았음이 명백하다. 분량상으로도 (김원중 교수님의 국문번역본 기준임) 위서는 두 권이고 오서가 한 권, 촉서는 오서에 비해서 꽤 적은 분량의 한 권이니 위나라를 중심에 둔 것은 부정할 수 없음. 실제로도 당시 중국 천하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했고, 제갈량도 자신과 형주에서 동문수학했던 친구들 중 위나라에 출사한 이들이 자신보다 훨씬 낮은 자리에서 박박 기는 걸 보고 위나라의 인재풀이 깊음을 보고 한탄한 일이 있다는 걸 보면 절대 분량으로도 위나라 부분이 많이 기술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점은 당연하다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진수는 그 위나라를 선양이란 형식으로 계승한 (서)진 시대 사람이니 전근대 전제왕조 시절에 위가 아닌 다른 나라를 정통으로 인정하기도 어려웠을 터. 실은 그랬다가는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몰릴 수도 있었음. 당장 [삼국지연의]에서 동탁이 제거된 후 그가 중용했던 채옹이 동탁의 죽음을 애도하자 동탁을 제거한 사도(司徒) 왕윤이 그를 처형하려 하였는데 채옹이 당시 집필 중이었던 역사책 [한의 역사]만이라도 끝내고 죽여달라고 호소했으나 왕윤은 전한의 무제가 사마천을 죽이지 않고 궁형만 내린 탓에 [사기] 같은 참람한-_-; 역사책이 나왔다면서ㄷㄷㄷ 채옹을 처형하였음. 그러니 스스로의 생명을 잃을 것을 무릅쓰고서 진수더러 촉한정통론을 취하라 할 수는 없지 않을까? 더군다나 진수의 아버지 진식(?)이 가정 전투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제갈량으로부터 벌까지 받았다면야 진수가 위나라를 정통으로 본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할 수도 있겠고.

그렇다면 진수는 위빠란 결론을 내리면 되는가? "이게 최선입니까?" 그러나 역사 서술이란 외형적인 형태 외에도 그 기술 내용의 실질을 마땅히 살펴 보아야 역사가가 어떤 사관을 가졌는지 최종적인 판단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예컨대 마키아벨리는 만년에 메디치가의 의뢰를 받아 [피렌체의 역사]를 집필했는데 원고료를 준 메디치가 입장을 반영해 겉으로는 피렌체의 참주 가문인 메디치가를 추켜 세우는 듯이 썼으나 실은 메디치가를 디스하는 내용들을 곳곳에 숨겨두어 공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는 것이 마키아벨리 연구자 퀜틴 스키너 교수의 분석.

그렇다면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 그런 요소는 없는가? 본기/세가/열전의 구분 외에도 전근대 동아시아 역사가의 사관을 엿볼 수 있는 근거는 개개의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분량을 할애하여 기술했는가 하는 점. 예를 들어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열전 중에 신라 장군 김유신 열전의 분량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열전을 합친 것보다 더 많다ㄷㄷㄷ 단재 신채호선생님께선 [조선상고사]에서 김유신이 그리 대단한 장수라면 뭣하러 당나라 의 힘을 빌렸냐며 투덜대시기도ㅋ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삼국의 역사를 제후의 역사 기술시 쓰는 '세가'란 명칭으로 기술하지 않고 '본기'항목에 형식상 집어 넣은, 후대 조선조 선비들보다는 상대적 자주성을 보여줬음에도 이의 신라중심주의, 사대주의 편향에 대한 비판이 일리가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지극히 불공평한 분량 배정 때문이다. 요새로 치면 선거에서 김유신후보가 모든 다른 후보들의 시간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신문 지면과 방송시간의 배정을 받았다고나 할까(뭐래니?).

그럼 이런 잣대로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살피면 즉 누가 가장 많은 지면(응?)을 배정받았는가를 확인해 보면 후한의 승상이자 위왕이었고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은 다음에는 태조 무황제로 추존받은 조조의 본기가 가장 길다. 역시 진수는 위빠! 하고 무릎을 쳐야하나? 그런데 진수가 두 번째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커버한 삼국의 인물은 놀랍게도 촉한의 초대 황제인 소열제 유비(유현덕)이고 그 다음으로 많은 분량으로 다룬 이는 촉한의 승상 제갈량(제갈공명)!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촉의 국력은 위의 5분의 1, 오의 절반에 지나지 않았고 유비는 제위에 불과 약 3년 있었으나, 공식적으로 위의 초대 황제가 된 조조의 아들 조비의 제위기간은 그의 2배, 오의 초대 황제 손권은 공식적으로 제위에 있었던 기간만 4반세기가 넘음.

그런데 정통이고 자리보전을 오래했고 다 필요없고 구석진 지금의 사천성에서 '황제'노릇을 채 3년을 못한 유비와 그의 일급 참모로 스스로를 전국시대 관중과 악의에 비유했다고는 하나 북벌에서 한 뼘의 땅도 얻지 못한 제갈량을 진수는 집중 조명했음. 왜냐고? 진수도 아버지와 관련된 논란에도 불구하고 결국 촉한서 관리 노릇도 했었던 촉한 망국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가난하고 국력이 약해(제갈량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지만 그가 후주 선에게 바친 후출사표를 보면 촉한이 얼마나 힘겹게 전쟁준비를 위해 국력을 짜냈는지가 나타나는 것 같아 눙물이ㅠ) 심지어 사관도 없어서-_- 위와 오에 비해서는 기록도 부실했던 지경. 그런데 진수는 촉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산일돼 후대에 전해지지 못하는 촉의 걸출한 인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후대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할 작고 약한 나라의 운명을 안타까워 했음. 정사 [삼국지] 전체에서 저자 진수의 본심이 가장 솔직히 드러난 부분이 아닐까? 그는 자신의 부친을 두들겨팼고 암우한 군주 때문에 불과 40여년만에 망해버렸지만 조국을 그래도 사랑하며 '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촉한의 인물들의 이름을 붓으로 하나하나 써가면서 목놓아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이 촉한 망국민 진수가 그나마 풍부한 기록으로 정사에 잘 숨겨둔 유비와 제갈량의 사적이 없었다면 과연 후대에 촉한정통론이 나올 수 있었을까?

내가 제일 싫어하는 클리셰 중의 하나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임. 전제왕조 시절에 망한 나라의 백성 진수가 교묘히 기록해 둔 촉한의 사적에 힘입어 천년 후에! 촉한정통론이 대세가 되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기록하는 이가, 잊지 않는 이가 승자가 되는 게 아닐까? 조국이 부친을 탄압했고 못난 위정자 탓에 망했지만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꾹꾹 눌러가면서 정사 [삼국지](25사 중에서도 빼어난 문장으로 유명)를 남긴 진수선생께 이를 바친다. 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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