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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7일 06시 40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10월 17일 06시 41분 KST

날마다 사표 쓰는 워킹맘의 이야기

[기획] 저녁 있는 삶

② 날마다 사표 쓰는 여자

불규칙한 퇴근과 심야근로로 일과 가정을 함께 가져가지 못하고 사직을 고민하는 서비스직(40), 공무원(39), 사무직(35) ‘워킹맘’ 3명을 인터뷰했다. 이들의 사례를 엮어 날마다 사표를 고민하는 워킹맘의 이야기로 재구성했다.

ㄱ성형외과 상담실장인 김수영(40)씨는 원래 자신감이 충만한 여성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부모와 동생에게 경제적 도움도 아끼지 않았다. 옷도 잘 입고 화장도 잘하고 어울려 노는 것도 좋아해 사교모임에도 빠지지 않았다. 화려한 ‘골드미스’의 삶을 살던 그도 결혼해 아이를 둔 친구들이 하나둘 늘어나자 ‘결심’을 했다.

36살에 만난 남자와 100일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1년 뒤엔 남편을 닮은 첫아이를 낳았다. 친정엄마의 ‘육아 지원’ 아래 병원 상담실장으로 재취업에도 성공했다. 친정엄마의 ‘24시간 보육’ 덕분에 다른 워킹맘들처럼 마음 졸이지 않고도 오전 10시 출근, 밤 9시 퇴근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친정아빠가 암에 걸리면서 모든 게 엉클어졌다. 친정엄마는 ‘남편’ 병간호에 나서며 더 이상 육아를 대신해 줄 수 없게 됐다. 친정엄마가 사라진 집은 곧바로 ‘전쟁터’로 변했다. 제때 퇴근할 수 없는 남편과의 싸움도 잦아졌다. 이러다 가정 전체가 무너지겠다는 생각에 김씨는 심각하게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

#전쟁

수영: “좀 일어나봐! 아니, 왜 애 옆에서 씻지도 않고 자?”

남편: “이제 왔어? 율이 재우다가 같이 잠들었네….”

수영: “안 씻고 자면 애가 감기 걸린다는 거 몰라? 좀 씻고 자!”

남편: “왜 늦게 들어와서 사람 보자마자 짜증이야.”

수영: “이번에 율이 감기도 자기가 안 씻고 재워서 그런 거 아냐!”

남편: “내가 지금까지 씻을 시간이 어딨어! 밥도 못 먹었어!”

밤 9시30분. 퇴근한 나는 양말을 신은 채 세살 난 아들 율이와 함께 침대에서 널브러져 자고 있는 남편에게 싸움부터 건다. 전쟁의 시작이다. 율이는 아침에 열이 39도가 넘는데도 갈 데가 어린이집밖에 없었다. 율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하는 동안 나는 또다시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일하는 내내 나를 짓누르던 죄책감이 찾아낸 화풀이 상대는 남편의 더러운 양말, 아니 남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눈 밑에 ‘다크서클’을 드리운 남편은 배가 고파 보였다. 식탁에는 아이가 먹은 뒤 남긴 작은 그릇과 수저만 어지러울 뿐 남편이 밥을 먹은 흔적은 없다. 남편은 밥 먹을 시간이 없었다. 저녁 7시에 어린이집이 문을 닫기 전에 율이를 데려오고, 집에 와서 밥을 먹이고, 씻기고, 옷 입히고, 재우는 시간만 있을 뿐이다. 집에서 살림하는 아내가 남편을 위해 챙겨주는 따뜻한 저녁밥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또 지고 말았다.

밤 9시30분은 우리 부부에게 퇴근시간이 아니라 ‘교대시간’이다. 내가 퇴근하면 남편은 야근을 하러 ‘출근’한다. 야근하는 팀장의 눈도장을 받으러 다시 회사로 들어가는 건 어린이집에 가기 위해 일단 ‘칼퇴근’하는 남편의 처세술이자 생존법이었다.

남편은 새벽 1~2시에나 진짜 퇴근을 한다. 나는 아직도 남편을 보면 마음이 설레는데, 새벽에 들어온 남편은 나와 아이가 자고 있는 이불 속에 조용히 들어와 죽은 것처럼 잠을 잔다. 남편의 지친 숨소리를 들으면 참았던 눈물이 흐른다. 일하는 아내, 일하는 엄마는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갈등

수영: “엄마, 오늘 하루만 와주면 안돼? 율이가 열이 너무 많이 나서 그래.”

엄마: “아빠를 두고 내가 어떻게 가니. 그냥 어린이집에 보내야지. 시어머니는?”

수영: “시어머니도 오십견 때문에 시조카만 겨우 봐주시는데 어떻게 또 부탁해?”

엄마: “그러니까 시댁 근처로 이사가라고 했잖아!”

친정엄마가 율이의 보육에서 손을 뗀 지 1년이 넘었지만 ‘비상상황’에서 1순위 도우미는 여전히 친정엄마다. 그동안 친정엄마를 능가하는 보육 대안은 찾지 못했다. 열이 나는 아이를 또래 아이들 틈에 보내고 싶지 않은 워킹맘을 위한 보육 서비스는 찾을 수 없었다. 어린이집은 저녁 7시에 문을 닫지만, 일하는 엄마들은 전업주부 엄마들이 아이를 찾아가는 오후 5시에 맞추느라 ‘하원 도우미’를 따로 쓰는 출혈을 감내하기도 한다. 5시 후에도 남겨놓으면 어린이집한테나 애한테나 미안하기 때문이다.

결혼 전 부모 생활비와 동생 대학 등록금까지 대가며 당당히 독립했던 나는 출산과 동시에 친정엄마에게 종속됐다. 엄마가 율이를 봐줬던 2년은 평화로웠다. 밤 9시에 퇴근해도 집은 깨끗했고, 율이는 즐거워 보였다. 육아휴직이나 어린이집 등 정부의 수십 가지 보육 정책도 친정엄마보다 낫지 않았다. 남편의 잦은 야근과 지방 출장이 아쉽긴 해도 삶을 위협한 적은 없다.

율이가 두돌 되던 때 친정아빠가 위암으로 쓰러졌다. 3명 중 1명은 암에 걸린다는데, 그때까지 나는 한번도 칠순을 앞둔 부모가 아플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친정엄마에 기댄 육아의 평화로움은 엄마가 아빠 간병을 위해 집을 떠나면서 산산이 깨졌다. 율이와 나, 남편은 어린이집만이 유일한 대안인 척박한 보육 환경 속에 내던져졌다.

남편이 지방 출장이라도 가야할 때면 시어머니가 ‘두 탕’을 뛰어야 한다. 어린이집에서 시조카를 받아와 택시에 태우고 30분을 달려 율이까지 하원을 시켜야 한다. 그런 날이면 시어머니는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이런 사정도 모르면서 시댁 근처로 이사를 하라는 친정엄마에게도 원망이 쌓인다. 육아는 돈보다 사람이 필요한 일인데, 정부는 어린이집 비용만 대신 내줄 뿐이다.

#후회

원장: “실장님, ㄴ환자는 그래서 어떤 시술을 하고 싶대요?”

수영: “원장님, 죄송해요. 제가 집에 빨리 가봐야 해서요.”

원장: “나 뭐 하나 부탁할 거 있었는데…. 알았어요. 가보세요.”

수영: “죄송해요, 원장님. 내일 제가 다 할게요.”

제때 하는 퇴근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든다. 퇴근시간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들키는 날엔, 원장이 ‘앞으로 결혼한 여자는 절대 실장으로 쓰지 않겠다’는 말이라도 뱉을까봐 식은땀이 난다. 사람을 만나서 그의 어려움과 필요을 읽어주고 맞춤 처방을 안내하는 상담실장의 일은 사람 좋아하는 내게 딱 맞는 일이다. 지금 나의 자존감을 지탱해 주는 건 일에서 오는 성취감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마저도 퇴근 무렵에는 실종되기 일쑤다.

이런 서비스직에 적성이 있는 줄은 몰랐다. 결혼하기 전에는 작은 기업에서 마케팅 일을 했고 화이트컬러 이외의 직업은 생각해보질 못했다. 하지만 재취업을 할 때 보니 여자들이 진출할 수 있는 화이트칼라 사무직은 많지 않았다. 반면 보육 제도는 화이트칼라 직장인만을 위한 것이 너무 많았다.

돌봐주던 외할머니가 떠난 뒤 율이는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심한 ‘분리불안’ 증세를 보였다. 율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었다. 직장맘지원센터 노무사는 ‘근로시간 단축 제도’를 안내하면서 직무 특성에 따라 사업주가 근로자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1시간 정도 일찍 퇴근하는 대신 급여를 적게 받겠다’는 말이 1년째 입안에서만 맴돌고 있는 것도 그 단서 탓이다.

#결심

수영: “율아, 엄마 왔어. 율아….”

율: “…….”

수영: “율아, 엄마 늦었지? 미안해, 율아. 율아, 이리 와. 응?”

율: “…….”

율이는 자기 이름을 불러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어린이집에서 실시한 아동발달검사에서는 ‘사회성 발달 지연이 의심된다’는 소견이 나왔다. 아동발달센터를 찾았더니 상담 선생님이 ‘심각하지는 않지만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어린 아이를 두고 밤 9시까지 일한 죄로 ‘기소’된 나는 법정에서 ‘아들의 발달 지연’이라는 벌을 받았다.

외할머니와 24시간을 같이 보내던 율이는 외할머니와 헤어진 뒤로 누구와도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나와 남편은 율이와 먹고 씻고 자는 최소한의 시간만을 보낼 뿐이다.

남편이 회식을 빠지지 못한 날, 율이는 밤 9시30분까지 낯선 어린이집에서 낯선 선생님과 함께 나를 기다린다. 율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은 야간보육을 하지 않는다. 저녁 7시에 하원을 못 하면 야간보육을 하는 근처 다른 어린이집으로 옮겨진다. 저녁도 먹지 않고 내내 울기만 했다는 율이는 퇴근한 나를 보고도 다가오지 않은 채 서서 울기만 했다.

율이에게 나는 항상 떠나는 존재다. 나는 죄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사표를 쓴다. 내일도, 모레도, 날마다 나는 마음으로 사표를 쓴다.

PRESENTED BY 호가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