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6월 15일 09시 48분 KST | 업데이트됨 2020년 06월 16일 11시 28분 KST

[한글 의사] 갭 이어 말고 '채움 기간'

글 읽는 속도를 1초로 줄여주는 한글 의사 시리즈 2편

<허프포스트>가 사단법인 국어문화원연합회의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의 지원을 받아 ‘한글 의사’ 시리즈를 진행합니다. 한글 의사는 영어로 써진 어려운 용어 등을 쉬운 우리말로 바꿔주는 이로서 ‘글 읽는 속도를 1초로 줄여주겠다’는 포부를 가진 인물입니다. 2020년 12월까지 총 12회 독자들을 찾아갈 예정이며, 어려운 용어 때문에 정보에 소외되는 국민 없이 모두가 함께 소통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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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영국 대서양 해안선을 따라 배낭여행을 하고 있다.

 

대학을 1년 후에 가고 싶다는 고3

갭 이어 설명하니, 공백기는 절대 안 된다는 부모

갭 이어 대신 ‘채움 기간’으로

 

”애가 어디서 보고 왔는지, 미국이랑 영국 애들은 대학 가기 전에 ‘gap year(갭 이어)’를 보낸다고 자기도 쉬고 싶다지 뭐야.” 숙모가 집에 오시더니 고3 조카가 대학을 1년 후에 가고 싶다고 선언을 했단다.

숙모는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손부채질을 하며 연신 갭 이어를 설명했는데, 어머니께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아 그거 쟤도 했어”라고 답했다. ‘아니 어머니, 명색이 한글 의사에게 쟤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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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 #gapyear을 검색하면 세계 곳곳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청년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갭 이어는 기간이나 시간의 ‘사이’를 뜻하는 갭(gap)과 년도를 의미하는 이어(year)가 합쳐서 탄생한 단어다. 일반적으로 영미 등 서구권에서 대학 진학 전 ‘1년’ 정도의 시간을 갖는 것을 뜻한다. 그동안에 하고 싶던 공부를 하거나 학비를 벌거나 전공을 결정하는 등 마음껏 쉬는 일도 포함해 저마다의 시간을 보낸다.

이제는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영국 윌리엄 왕자(William Windsor)도 대학 진학 전 군사 훈련을 받고 칠레 파타고니아에서 영어 교육 봉사를 한 바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주역인  엠마 왓슨(Emma Watson) 역시 대학 입학 전 공정무역을 바탕으로 한 패션 브랜드 ‘피플 트리(People Tree)’에서 디자이너로 활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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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에 간 윌리엄 왕자(왼쪽),  자신이 디자인한 'People Tree, Love Emma' 컬렉션 화보 속 엠마 왓슨(오른쪽)

물론 이들에 비할 바 아니지만, 대학 졸업 후 캐나다에서 자신을 채우는 시간(?)을 보냈다. 떠나기 전, 짜장면을 먹으러 간 중국집 원 테이블에 앉아 온 식구들에게 심문을 당했다. ”취업 안 하고 도망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더 놀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라는 날카로운 질문이 들어왔고 ”배움을 쌓고 견문을 넓히고 오겠다”고 말했지만, 역시 가족의 눈은 매우 정확했다.

졸업도 한 마당에 하루하루가 어찌나 신이 나던지! 해달이나 물범, 범고래 등을 집 앞 바다에서 보고 지겹도록 비버 가족과 사슴 친구를 마주하면서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 결과적으로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이었고, 인생의 나침반을 찾게 되었으며 지금도 나를 버티게 하는 자양분이 된다. 이렇게 좋은 걸 많은 이들이 했으면 좋겠지만, 실상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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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에서 2020학년도 수시 논술고사를 마친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모습(왼쪽), 2018 상반기 LG 신입사원 공채 인적성검사를 마친 응시생들의 모습 (오른쪽)

우리나라는 대입과 취업을 목표로 교육제도가 운용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대별로 해야 할 것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니 정해진 목표 없이 보내는 시간은 ‘낭비‘라고 여겨진다. 대학 중 ‘휴학‘은 커녕 회사에서 ‘휴가‘를 쓰는 것도 눈치 보는 우리 사회에서 ‘사이 시간’, 즉 갭을 둔다는 것이 좋은 뜻이 될 리 만무하다.

영미권에서는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나 갭이란 단어에 부정적 인식이 없다. 그렇기에 ‘갭이어‘는 단순히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판단한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닭도리탕이 닭볶음탕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조리 과정에 ‘볶음’이 추가된 것처럼 언어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게 하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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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인 ‘갭 이어‘보다 우리말로 ‘채움 기간’이라고 쓰게 된다면 의미나 목적성이 더욱 분명해진다. 단순히 시간을 갖겠다는 형상에 초점을 맞추는 영어식 표현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 채워질 수 있다는 긍정적인 우리 표현법인 ‘채움 기간’은 의사소통을 명확히 만들어줘 더욱 빠른 이해를 돕는다. 또한 정해진 길 없이 인생을 마음껏 설계하는 것 자체가 근사한 시간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다.

시간은 흔적을 남긴다. 쉼은 반대로 열의를 불러내며 여행은 마음과 생각의 시야를 넓히기도 한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사이 시간을 보냈어‘라는 말보다 ‘채움 기간을 가졌어’라는 말이 더 멋진 건 확실하다. 이게 우리 말의 힘이고, 또 우리 스타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