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뉴디터의 신혼일기] 신랑의 가방에서 정체불명의 러브레터를 발견했다

분노했다가 반성하게 된 썰.

허프 첫 유부녀, 김현유 에디터가 매주 [뉴디터의 신혼일기]를 게재합니다. 하나도 진지하지 않고 의식의 흐름만을 따라가지만 나름 재미는 있을 예정입니다.

* 약간의 비속어가 있습니다.

* 이것은 진짜 다 실화입니다.

얼마 전, 충전기를 회사에 놓고 퇴근해버렸다. 신랑은 갤럭시, 나는 아이폰을 쓰기 때문에 케이블이 달라 신랑 충전기로는 충전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지 하고 혼자 맥주를 몇 캔 마시던 중 신랑 가방에 갤럭시, 아이폰 겸용 케이블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쿨쿨 자는 신랑에게 물어보기 뭐해서 조용히 신랑 가방을 뒤지다가 웬 NYUN이 쓴 러브레터를 발견했다.

XX씨(신랑 이름)?

글씨 엄청 못쓰는데 문학소녀?

저 하트는 뭐고?

결혼한 지 2년이 된 아직까지 저딴 걸 저렇게 품고 다녀??

봉투 뒷면에는 하트가 잔뜩 그려져 있고 입술 도장까지 찍혀 있었다. 아주 지RAL도 풍년이구만.

내가 신랑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신랑의 대학 동기들이 10년쯤 전에 일본에서 온 교환학생이 같이 수업을 듣던 신랑을 짝사랑했지만, 그 시절에도 신랑은 가슴 속에 척화비를 세운 위정척사파라 매몰차게 거절했다는 얘기를 해 준 적이 있다. 그 때 ”그냥 그 여자도 혼다 케이스케 팬인듯”이라고 비웃었던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 NYUN인가?

쒸익...,,

나는 콧김을 뿜으며 분노했다. 아니, 우리가 연애하고 결혼하는 동안 지방선거를 두 번, 대선을 한 번, 총선을 이제 곧 두 번 치르는 세월이 흘렀는데 이딴 걸 아직도 갖고 다닌단 말이야? 아주 세상 소중한 추억인가 보지? 이딴 걸 정리도 안 하고 살게? 진짜 빡치네... 고개를 돌려 코를 골고 있는 신랑을 한 번 째려보고, 이 편지를 버려버리기 전에 뭔 지RAL을 써 놨나 읽어나 보자 하고 열어봤다.

>>>그런데 반전!<<<

내가 쓴거였다.

나도 어이 없었음...
나도 어이 없었음...

″처음으로 함께 맞이하는 오빠의 생일을 축하하고 어쩌구저쩌구”... 쓴 날짜는 ‘二千十四年 六月 三十日’.

세상에 너무 옛날이다. 새카맣게 잊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방선거를 두 번, 대선을 한 번, 총선을 이제 곧 두 번 치르는 세월 동안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알콜에 기억이 묻어진 모양이다.

편지는 무려 다섯 장이나 됐다. 글씨도 개미 똥구멍만큼 작았다. 오타 하나 없었고 한 글자 한 글자 사랑이 쏟아졌다.

내가 이런 걸 썼다고?

이렇게 사랑과 정성 가득하게?

한참을 곰곰 떠올려보니 썼던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오타를 안 내려고 집중해서 썼던 기억이 났다. 입술 도장도 예쁘게 찍겠답시고 몇 번이나 루즈를 발랐다 지웠다 했던 것도 떠올랐다. 루즈라니, 짬 찬 유부녀 에디터인 지금은 루즈라는 말이 입에 익지만 저 편지를 쓰던 당시에는 귀여운 대학생 인턴이었기 때문에 립스틱이라고 불렀겠지. 참으로 오래 전 편지였다.

웬만하면 나에게 벌어졌던 일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싸그리몽땅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이다. 6년 전에는 이렇게 개미 똥구멍만한 글자로 편지도 5장이나 써 주고, 지금처럼 신랑을 구박하지도 않았다.

신랑은 내가 6년 전에 써 준 편지를 아직도 이렇게 매일 갖고 다니는데 나는 내가 써 준 것도 잊어버리고, 맨날 신랑을 이렇게 하대하기만 했다.

ㅜㅜ
ㅜㅜ

새삼스러운 반성이 몰려왔다. 그러고보니 신랑은 늘 나에게 한결같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나야말로 결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던 것이다. 뜨거운 열정이 미지근한 마음으로 바뀌었다고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신랑의 입장이면 가끔 서운할 것도 같았다.

갑작스러운 미안함에 자고 있는 신랑 옆에 드러누웠다. 이제부터는 코 곤다고 너무 구박하지 말아야겠다, 고 생각했다.

김현유 에디터: hyunyu.kim@huffpos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