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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작은 아씨들' 리뷰] 나는 '에이미'가 되고 싶은 '조'였다

어릴 적 읽은 '작은 아씨들'과 25년 후에 본 영화 '작은 아씨들'은 어떻게 달랐나

  • 박수진
  • 입력 2020.02.17 15:32
  • 수정 2020.02.22 22:46

*영화의 전개와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펭귄클래식
펭귄클래식

Jo 

네 자매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아니어도 아이들은 자기가 감정이입할 캐릭터를 하나 찾아내 응원하게 마련이다. 주위의 대부분은 조나 베스를 가장 좋아했다. 조야 말할 것도 없이 진취적인 히로인이었기 때문이고, 베스는 그때 연약하면서 가정적이고 비극적인 여주인공 캐릭터가 어린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했기 때문이다. 어린이용으로 편집한 책 중에는 베스의 죽음이 나오지 않는 것도 있다던데, 그 아이들이 그 부분까지 읽었으면 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소년소녀세계명작전집에서 ‘작은 아씨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도 조를 응원해야 할 것 같았다. 글을 써서 인정 받으려고 한다든지, 여자라 안 된다는 이야길 들으면 화가 난다든지 하는 공통점들이 있었다. (나이가 어릴수록 여자든 남자든 갖고 태어난 성별에 충실하게 행동하라고 가르치는 ‘전통’은 지금도 깨지지 않았다.) 게다가 조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었고, ‘예쁘고 가녀리고 아이를 돌보는’ 미래를 꿈꾸지 않는 아이들에게 유일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나는 좀 더 정확히는 에이미가 되고 싶은 조였던 것 같다. 주도권을 갖고 책임지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면서도 막내로 집안의 걱정거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에이미에게 분개하고, 보수적인 사회에 적응하지 못 할 것 같아 두렵지만 에이미처럼 살 수 있겠느냐고 하면 도망쳐버리는. 에이미의 과감한 말과 치기 어린 행동들이 부러웠고,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1990년대에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책에서 받은 그 인상은 그레타 거윅이 연출한 2019년 영화 ‘작은 아씨들’ 에도 등장한다. 베스의 부탁으로, 유럽 여행 중인 에이미에게 베스가 위독하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조가 첫 반응으로 (에이미가 일부러 유럽으로 도망친 게 아닌데도) “에이미는 항상 나쁜 일에서 빠져나가는 재주가 있다”고 화를 내는 장면이 그렇다. 그런데 2019년 영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에이미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부여했다.

2019 '작은 아씨들' 속 에이미
2019 '작은 아씨들' 속 에이미

Amy

“여자는 돈을 벌 방법이 없어. 돈이 있다해도 그건 결혼하는 순간 남편 소유가 돼. 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남편 소유가 돼. 너(로리)한테는 결혼이 경제적인 거래가 아닐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그래.” 

“나는 로마로 가서 세계 최고의 화가가 될 거야.”

“나는 어중간한 재능만 가지고 있나봐.” 

조가 말했을 법한 이 대사들은 2019년 영화에서는 성인이 되어 파리에서 그림 수업을 받고 있는 에이미의 것이다. 이 영화가 에이미를 보여준 방식은 많은 이들이 기억할, 1994년 나온 위노나 라이더 주연의 영화와는 큰 차이가 있다.

2019년 영화 속 에이미(플로렌스 퓨)는 코가 납작하다고 불평하지도 않고, 여전히 로리(티모시 샬라메)를 짝사랑하기는 하지만 키스를 못 해보고 죽는 게 인생 최대의 두려움도 아니다. 에이미가 학교를 그만두는 계기가 된 체벌 사건도,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 라임 피클을 서랍에 숨겼다가 벌어진 일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다가 벌어진 일로 변주됐다.

네 자매가 함께 행복한 유년기를 보낸 7년 전과 성인이 된 시기를 모두 담은 이 영화에는 아역 에이미가 나오지 않는다. 성인 배우가 연기하는, 그렇게 어리지 않은 7년 전의 에이미는 그가 나중에 유럽에서 그림을 배우고 싶다거나 부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 것에 일관된 목표와 맥락을 준다. 외모에만 신경 쓰는 철없는 어린이로 한 말이 아니기 때문에, 이후 유럽에서 에이미가 하는 모든 행동들은 자신이 목표로 하는 화가로서의 성공과 가족의 안정된 생계를 위해 한 현실적인 선택으로 설명된다.

2019 '작은 아씨들'
2019 '작은 아씨들' ⓒ소니픽처스코리아

책을 영화로 각색하고 연출한 그레타 거윅은 ‘책에서 에이미의 실리적인 면을 보여주는 유럽 부분을 정말 좋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원작에는 없는 “여자에게 결혼은 경제적인 거래”라는 에이미의 대사는 그런 선택을 해야했던 상황을 더 명확하게 설명하자는 대고모 역 배우 메릴 스트립의 제언이었다고 한다.)

또다른 자매 멕(엠마 왓슨) 역시 영화에서 자신의 결혼을 말리려는 조(시얼샤 로넌)에게 “내 꿈이 네 꿈과 다르다고 해서 그게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라고 말할 기회를 갖는다. 심지어 조의 새로운 연인이 되는 프리드리히(루이 가렐)조차 그저 조가 선망해 온 ‘유럽에서 온 지식인’으로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나름의 철학과 문학관을 말한다. 대표적인 에피소드들은 책의 대사들을 거의 그대로 따왔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런 식으로 훨씬 입체적으로 자매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2019 '작은 아씨들'
2019 '작은 아씨들' ⓒ소니픽처스코리아

물론 그렇다고 조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는 건 아니다. 조는 여전히 배우가 되고 싶었고, 작가가 되었고, 피아노를 잘 쳤고, 화가가 되고 싶은 자매들과 딸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 엄마의 이야기를 대변한다. 

″여자도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어요. 외모만이 아니라 야심과 재능이 있어요.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라는 말, 지긋지긋해요.”

1860년대에 나온 ‘작은 아씨들’을, 그것도 그레타 거윅이 다시 만든다는 소식에 누구나 다 아는 명작을 굳이 다시 봐야할까 의아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거윅이 에이미를 포함해, 이전 영화들에서 조의 장식처럼 느껴졌던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현재적으로 살려냄으로써 ‘작은 아씨들’은 다시 한번 매우 ‘모던한 고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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