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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치료 거부서'를 작성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2019년 기준으로 50만명을 넘어섰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상담 기관인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서 의향서를 쓰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노인들의 모습.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제공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상담 기관인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서 의향서를 쓰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노인들의 모습.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제공 ⓒ한겨레

김모(83)씨는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한걸음씩 걷는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국민건강보험공단 수원서부지사였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직원의 말에 그는 “‘연명치료 거부서’(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쓰러 왔다”고 답했다. 지난달 22일의 일이다.

그를 맞이한 상담관은 “의향서를 왜 쓰시려고 하세요?”라고 물었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요. 살 만큼 살았는데 더 살면 뭣 해요. 인공호흡기를 끼면 돈도 많이 든다는데, 애들 없는 살림에 내가 짐이 돼선 안 되죠.” 김씨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는 자녀들에게 의향서를 쓰러 온 사실을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홀로 이곳을 찾았다.

김씨가 작성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살 이상 성인이 앞으로 겪게 될 임종 단계를 가정해 연명의료(치료)에 대한 자기 뜻을 미리 밝혀두는 문서다. 질병이나 사고로 의식을 잃어 본인이 원하는 치료 방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작성자 뜻에 따라 언제든지 철회할 수 있다. 연명치료는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부착과 그 밖의 의학적 시술로 치료 효과 없이 임종 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것을 말한다.

김씨처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쓰는 이들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 9일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자료를 보면, 지난해 12월31일 기준으로 국내에서 이 의향서에 서명한 이는 53만2667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제도가 도입된 2018년 9만1210명이 의향서를 작성했던 것에 견줘 1년 새 5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다. 특히 지난해까지 서명한 이들 가운데 실제로 연명치료 중단 등의 결정이 이뤄진 사례는 약 15%인 8만여건에 이른다. 의향서를 쓴 이들의 연령대를 보면, 70대가 47.5%로 가장 많았다. 이어 80대(21.2%), 60대(20.9%), 50대(6.8%), 40대(2%) 차례였다.

회사원인 최모(58)씨도 의향서 작성을 고민 중이다. 그는 지난해 어머니를 잃었다. 최씨의 어머니는 9년 동안 요양원과 병원을 오가며 생활했다. 3년 전부터는 의식을 잃었다. 음식물은 코에 넣은 관(튜브)을 통해 주입됐고, 한달에 1~2차례 영양제가 투여됐다. “어머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달라고 병원에 말했어요.” 치료비도 만만치 않았다. “요양원과 병원을 오가며 너무 힘들게 가신 것 같아요. 어머니가 고생하신 것을 본 아내가 장례가 끝나고 함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쓰자고 하더라고요.” 그가 말했다.

의향서를 쓴 이들이 급증한 것은 ‘존엄한 죽음’을 맞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자녀들에게 부양을 바라던 시대에서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시대로 바뀌는 흐름과 전국에 지사를 갖춘 건강보험공단에서 의향서를 손쉽게 쓸 수 있게 됐다는 점도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2018년 전까지는 특정 병·의원과 일부 보건소에서만 이런 의향서를 쓸 수 있었다. 건강보험공단 연명의료팀 관계자는 “의향서를 쓰러 오신 어르신들이 가장 많이 하는 얘기가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는 말”이라며 “대화를 하다 보면 그들이 죽음의 시기만 연장하는 불필요한 치료보다는 존엄한 죽음을 맞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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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연명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