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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편집장] 눈치 없는 전 남친은 되지 말자... 그리고 작별

저 사람 그래도 애착이 있네, 라는 말이 그나마 낫다

  • 강병진
  • 입력 2020.02.06 13:21
  • 수정 2020.02.11 09:49
언젠가 잠실 롯데호텔에서 찍은 사진.
언젠가 잠실 롯데호텔에서 찍은 사진. ⓒKang Byung Jin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는 난감한 상황에 놓여있다. 애타게 기다렸던 안철수 전 의원은 새로운 당을 만들겠다고 선언했고, 측근 의원들은 탈당했고, 그래서 바른미래당은 교섭단체 지위를 잃어버렸다. 소속 의원들의 연이은 탈당에 마음이 상했는지, 2월 5일에는 당무를 거부한 당직자들과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욕설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손학규 대표는 ”그날 술 한잔 먹고 있었는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도에 따르면, 손 대표는 ”호남 의원들도 개X끼들, 다 나가라 그래라”고 말했으며, 당직자들을 향해 ”이 X끼들, 나 못 나간다. 대표 그만 못 둔다. 절대 못 나간다”고 외쳤다고 한다.

손학규 대표의 욕설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물론 욕이란 때와 장소와 뉘앙스에 따라 욕이 아닐 때도 있지만, ”모욕적이었다”는 당직자들의 반응을 보면 그의 욕은 욕이었던 것 같다. 다만, ”나 못 나간다. 대표 그만 못 둔다. 절대 못 나간다”는 외침에는 마음이 쓰인다. 솔직히 이렇게 나가려고 했다면, 처음부터 당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만들려고 당대표 선거에 나간 것도 아닐 것이다. 손학규 대표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인은 자신의 자리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애착 없이 정치를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대표 그만 못둔다”, ”절대 못 나간다”고 외쳤던 손학규 대표는 이후 대안신당과 민주평화당 등과의 ‘3당 통합’을 조속히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역시 애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손학규 대표에 관한 보도를 보면서 마음이 쓰였던 이유는 나 자신도 어떤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편집장이 됐다. 약 13년 간, 기자와 에디터로 살면서 나는 한번도 편집장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내가 만난 편집장들은 다 훌륭한 사람들이었지만, 등에는 피로곰보다 더 큰 짐을 얹고 있었다. 왕관의 무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편집장이 되면서 갖는 권한은 매체 밖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 않다. 프로야구 감독처럼 우리나라에 딱 10명만 있는 직업도 아니다. 굳이 떠맡지 않는 게 좋은 자리다. 하지만 편집장이 됐다. 정치인은 아니지만, 한 매체의 편집장이 된 이상, 이 매체와 이 자리에 애착을 가져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느끼고 있다. 

걱정되는 건, 멀지 않은 미래다. 이 자리에서 내려와야할 그때, 나는 술을 먹고 어떤 말을 하게 될까. 애착을 갖고 살다보면 집착이 될 수 있다. 나 또한 ”이 x끼들, 나 편집장 그만 못 둔다!”, ”절대 못 나간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만두려고 편집장을 한 것이 아니고, 그런 미래를 그리면서 에디터로 산 것도 아니니까. 장담할 없는 미래의 일이지만, 그래도 진짜 욕 같은 욕은 하지 말아야 겠다는 다짐은 해본다. 저 사람 그래도 애착이 있네, 라는 말이 그나마 낫다. ”저 X끼, 꼭 눈치 없는 전 남친 같네”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P.S

그렇게 어쩌다보니 편집장이 됐고, 우리와 함께 일해온 전임 편집장에 대한 감사인사를 전해야하는데, 허프포스트코리아에는 잡지처럼 ‘에디토리얼’ 같은 코너가 없어서, 일부러 이 코너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코너의 이름이 ‘어쩌다보니 편집장’입니다. 어쩌다보니 만들게 된 코너이지만, 이번 한번으로 끝낼 수는 없어서 할 수 있는 한 계속 유지하려 합니다. (그렇게 어쩌다보니 알아서 일도 늘렸네요.)

먼저 전임 김도훈 편집장에 대한 감사부터 전합니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는 2014년 2월 28일 창간했습니다. 한국의 한겨레신문과 미국의 허핑턴포스트가 합작해 만든 이 매체는 허핑턴포스트의 전 세계 에디션 중에서는 11번째 였습니다. 영화전문지 씨네21과 패션전문지 GEEK에서 일했던 김도훈 편집장은 그때 이 매체를 탄생시켰습니다. 그 사이 허핑턴포스트는 허프포스트로 이름을 바꾸었고, 김도훈 편집장은 이후에도 허프포스트코리아를 이끌었습니다. 쉼없이 달려온 그는 이제 스스로에게 안식년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김도훈 편집장은 새로운 출발을 결심했습니다.

김도훈 편집장과 함께한 허프포스트코리아의 시즌1은 분명 큰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기획과 추진력 덕분에 성소수자와 여성, 동물의 삶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그 어떤 매체보다도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국제뉴스 가운데 한국 언론이 잘 보도하지 않지만, 독자들에게 신선한 콘텐츠가 되었던 뉴스들을 발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허프포스트코리아가 지치지 않았던 이유는 김도훈 편집장의 그런 역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6년간 허프포스트코리아 시즌1의 크리에이터로 일해온 김도훈 편집장께 감사와 응원을 전합니다.

새로운 편집장이 된 저는 이제 허프포스트코리아의 시즌2를 만들어야 하는 입장입니다. 세상의 모든 편집장이 그랬겠지만, 저 또한 고민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부편집장을 모셨습니다. 그동안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여성문제와 관련된 보도를 주도해왔던 곽상아 에디터입니다. 저와 곽상아 부편집장이 만들 허프포스트코리아의 시즌2에도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허프포스트코리아란 드라마가 몇번째 시즌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든 조기종영은 막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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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편집장 #에디토리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