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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1월 23일 17시 07분 KST | 업데이트됨 2020년 01월 23일 17시 07분 KST

농수로에 빠진 개구리 구하는 '개구리 사다리'가 설치됐다 (사진)

고라니와 개들에게만 위험한 게 아니었다

환경운동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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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구리는 이동하다가 도로경계석을 넘지 못하고 맨홀에 빠진 것 같습니다. 겨울잠에서 깨어날 때쯤이면 맨홀에서 굶고 지쳐서 죽거나 포식자에 잡혀먹힐 텐데, 이젠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살 수 있겠네요.”

지난 21일 오전 영국파충류협회 트레버 로즈(57) 사무국장이 경기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의 물거미 서식지 옆 도로 지하 60㎝가량의 맨홀 안에서 참개구리를 꺼내 들고 이렇게 말했다.

한겨레
지난 21일 영국파충류협회 트레버 로즈 사무국장이 경기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물거미 서식지 옆 도로 맨홀에 ‘개구리사다리’를 설치한 뒤 겨울잠을 자는 참개구리를 꺼내 보이고 있다.

개구리는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개구리가 잠자고 있던 맨홀에 로즈 국장은 이른바 ‘개구리사다리’를 설치했다. 콘크리트 농수로나 도로 맨홀에 빠져 갇힌 개구리 등 양서류가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스테인리스와 나일론으로 만든 것이다. 사다리는 너비 15㎝, 길이 1m가량이다.

로즈 국장은 영국에서 맨홀에 빠진 개구리를 구조하기 위해 이 사다리를 최초로 설계했다. 2015년부터 최근까지 영국 83개 지역에 그가 직접 설치한 개구리사다리는 1700여개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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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영국파충류협회 트레버 로즈 사무국장이 경기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물거미 서식지 옆 도로 맨홀 안에 ‘개구리사다리’를 놓고 있다.

그는 이날 개구리사다리를 연천의 수로와 맨홀 3곳에 놓았다. 지난 18일에도 인천 백령도 진촌리의 농수로에 이 사다리 6개를 설치했다.

“영국에는 한국과 달리 콘크리트 수로가 없어요. 하지만 맨홀에 개구리가 두꺼비가 많이 빠져 죽어요. 그런 것을 보고 궁리 끝에 개구리사다리를 만들었어요. 개구리는 등반능력이 뛰어나서 맨홀에 떨어진 개구리 80%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것으로 조사됐어요.”

개구리사다리 제작에 나선 이유에 대해서는 “양서류가 없어지면 생물 사이에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이 파괴돼 생물다양성과 자연 생태계 균형에 큰 혼란이 온다”고 답했다.

그는 한국의 콘크리트 농수로에 대해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영국은 자연형 수로인데, 한국은 수 킬로미터나 이어진 거대한 콘크리트 수로여서 놀랐어요. 이유가 있겠지만, 생물다양성 측면에서는 자연수로와 전통방식의 농업이 가장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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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생명의 터’ 대표인 나일 무어스(왼쪽) 박사와 영국파충류협회 트레버 로즈 사무국장이 지난 21일 경기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의 콘트리트 농수로에 길이 80㎝, 너비 15㎝ 크기의 ‘개구리사다리’를 설치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가 한국에서 개구리사다리를 설치하고 있는 것은 환경단체인 ‘새와 생명의 터’ 대표 나일 무어스 박사의 요청 때문이다. 20년동안 한반도 남북을 오가며 탐조와 생태계 조사활동을 해온 무어스 박사는 “4년 전 백령도에서 농수로에 갇힌 개구리 수백 마리를 밖으로 옮긴 적이 있다. 수많은 개구리가 콘크리트 농수로에 갇혀 떼죽음을 당한 것을 보고 효율적이고 비용이 적게 드는 해결책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무어스 박사는 “황새나 두루미, 따오기, 수원청개구리 등이 희귀해진 이유는 이들이 영양을 공급받을 서식지인 습지가 주택이나 도로, 공장 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며 “농부들이 논을 벼 재배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지역사회와 생물다양성을 보전하는 데 이용하도록 도와야 한다. 개구리사다리는 개구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환경운동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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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작은 관심은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김춘이 환경운동연합 사무부총장은 “이미 바뀐 콘크리트 농수로에는 개구리사다리 설치를 지원하고, 농수로를 시멘트로 전환하지 말고, 자연형 수로를 이용하는 농민에게는 인센티브를 주자고 정부에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연천군 관계자는 “실태조사와 관계기관 협의를 거쳐 군남면 남계리 수원청개구리 서식지 등 일부 구간에 개구리사다리 설치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