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24년간의 맏며느리 역할을 그만하겠다며 '사표' 낸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인터뷰)

내가 좋아서 하는 인터뷰|'며느리 사표'의 저자 김영주씨

코너 소개 : 편집장도, 누구도 나에게 이걸 하라고 시키지 않았다. 말 그대로, 내가 좋아서 하는 인터뷰다. 읽는 여러분도 좋았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영주씨는 1965년 태어났다. 착한 딸로 살다가 1989년 결혼했다. 대가족 장손과의 결혼은 ‘맏며느리’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직장은 그만둬야 했고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24년을 살았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 늦기 전에 ‘나 자신’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2012년 남편에게 이혼을 선언했다. 2013년 추석을 앞두고는 며느리 역할을 그만두겠다며 시부모님에게 사표를 건넸다.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누구는 며느리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냐?”는 화살이 날아왔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대로는 죽을 것 같아 벼랑 끝에서 내린 결단이었기 때문이다. 잃을 게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변화가 시작됐다. 묵묵히 맡은 일을 하던 맏며느리의 사표 선언은 견고해 보이던 기존의 관계에 균열을 가져왔다. 남편은 드디어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제사와 명절 의식이 간소화되었다. 보이지 않는 서열에 따라 움직이던 ‘역할극’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수평적 관계로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개인의 일상에서 벌어진 이 같은 변화는 ‘기적‘, ‘작은 혁명’이라 불러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영주씨 
영주씨 

책 ‘며느리 사표’가 출간된 시점은 2018년 2월이다. 나는 영주씨를 만나고 싶었다. 마침 설 연휴가 다가오고 있었고, 설렘과 답답함이 뒤엉킨 복잡한 심경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이들의 행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싶다. 하지만 가족 중 유일하게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딸, 동생, 시누이로서의 역할은 어떻게 해야 훗날 후회가 없는 걸까? 일면식도 없는 영주씨에게 묻고 싶었다.

인터뷰는 당초 1시간으로 예정돼 있었으나, 2시간이 금방 흘렀다. 마치 수다를 떠는 기분이었다. 둘다 상기된 볼이 되었다. 한 세대 차이가 나고, 서로를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여자’라는 공통분모는 많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우리를 이끌었다. 누구에게도 속시원한 답을 들을 수 없었던 시점에, 영주씨는 세월의 무게를 담은 진심 어린 조언을 들려주었다.

내가 먼저 행복해져야 한다

영주씨는 나에게 ”(가족 내에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일단 내려놓고, 당신이 먼저 행복해지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그건 결코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라 “결국 주변 사람들도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저마다 삶의 무게가 있는 것이니 (가족 구성원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려 하지 말고 스스로 깨우치게끔 해야”하고,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게 진짜”라고 했다. 온화하면서도 강단 있는 영주씨의 말에,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가족과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가깝지 않다.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의외로 가족의 진짜 모습을 잘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가족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영주씨가 먼저 걸어간 길이 여러분에게도 어떤 실마리를 안겨줄지 모른다.

- 반갑습니다. 곧 설인데, 이번 명절에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 그냥 평소대로요. 아, ‘바뀐’ 평소대로요. 며느리 사표를 낸 2013년 이후 2~3년은 시가에 가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다시 가게 됐을 때는 음식을 그냥 사서 먹었고요. 그런데 사서 먹으니까 음식이 너무 별로인 거예요. 그래서 한 가지 요리 정도만 하다가, 작년부터는 가족이 먹을 정도로만 전을 해요. (며느리 사표를 내기) 전에는 저 혼자 했다면, 이제는 모두 함께하죠. 어머님, 아버님이 장을 봐놓으시면 나머지는 저희끼리 나눠서. 넉넉잡아 2시간 정도면 다 끝나요.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자발적인 것과 비자발적인 것의 차이죠. ‘해야만 하는 일’, ‘복종에 의한 일’은 아무리 좋은 일도 하기 싫어지잖아요. 억울하고. 그런데 수평적인 관계에서 자발적으로 하게 되니까 하기 싫은 일이 아닌 거예요. 이제는 명절이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이야기하고, 맛있는 것을 함께 만들어 먹는 즐거운 시간’이 되었어요.

1989년 결혼 후 부부가 찍은 사진 
1989년 결혼 후 부부가 찍은 사진 

- 며느리 사표를 내기 이전에 맏며느리일 때의 명절은 어땠어요?

= 제가 중심으로 일을 해야 했죠. 장 보는 데만 2~3일씩 걸려요. 재래시장에서 사야 할 게 있고, 대형마트에서 사야 할 게 있고, 수시로 작은 마트에서 살 것도 있고.

- 세상에. 장도 혼자 다 보셨던 거예요?

= 그럼요. 남편도 없이, 그냥 혼자서. 이만큼 큰 걸 혼자 사 오고, 음식도 다 하고. 명절 음식 뿐만 아니라 밑반찬 같은 것들도 대용량으로 만들어야 했어요. 너무 힘들고, 스트레스였죠.

- 저도 어릴 때 전을 부치는데 아버지가 혼자 누워서 TV를 보셨던 게 기억나요. 그게 그렇게 화가 나더라고요.(웃음)

= 물론이죠. 어머님도 다른 분도 아무 말 안 하는데 제가 어떻게 무슨 말을 하겠어요. 분노와 억울함이 치밀어올라도, 그냥 묵묵히 할 수밖에 없었죠. (일의 고됨보다) 그 감정을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협력과 평등의 관계

- 저는 설이 다가오면서 가슴이 답답해지고 있어요… (먼 산)

= 하하. 작년 말에 가족 모임이 있었는데요. 그동안은 계속 식당에서 만났는데, 이번에는 집에서 고기를 사서 구워 먹기로 했어요. (며느리 사표를 내기) 전 같으면 제가 다 준비를 해야 하는데, 이제 그렇지 않으니까 느낌이 굉장히 다른 거 있죠.

그날이 동지라고 해서 아버님은 동지팥죽을 사놓으시고, 어머님은 배춧국을 끓이셨고, 시누이는 장을 봐오고, 동서 부부는 야채를 다 씻어놓고. 다른 분들은 고기를 굽고 있더라고요. 저는 집에서 밑반찬을 가지고 갔고. 설거지는 저희 남편이 맡았어요.

3세대가 중 어느 한 사람 소외됨 없이 음식을 함께 차리고 치우고. 고기 구워 먹은 후 커피는 아들이 사겠다고 해서, 모두 함께 커피나 차를 마시는데 얼마나 행복한지. ‘협력’과 ‘평등’이 느껴져서 너무 좋더라고요. (미소) 기적같이 일상이 달라졌다는 게 다시금 실감이 났어요.

- 성인들끼리 모였을 때의 이상적인 모습이네요? (나는 이 대목에서 영주씨에게 멋지다며 손뼉을 쳤다. 처음 만난 사이라도, 나는 원래 그때그때 다 표현하는 성격이다.)

= 하하. 그런가요? 저희가 3세대예요. 어머님 아버님 세대, 저희 세대, 저희 아이들 세대. 만나면 사회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거든요. 서로 생각이 달라요. 그래도 ‘네가 뭘 몰라서 그래’라며 무시하거나 하지 않아요. 시각이 달라도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찬찬히 듣다 보면 이해가 되거든요. 그 생각을 내 것으로 수용하진 않더라도.

- 흠. 보통 그런 경우에 누군가 화내고, 결국 싸우지 않나요?

= 그렇지 않아요.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해’라고 하죠. 저는 예전의 모임이 어땠는지 아니까, 지금의 변화들이 너무 기적처럼 느껴져요. 이 사람들이 진짜 좋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오히려 며느리 사표를 이후에 더 친밀감을 느끼고 있어요.

- 그럼 며느리 사표 이후 가족 내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난 거니까, 매우 큰 역할을 하신 거네요?

= 아뇨. 저의 공(功)이라기보다는 ‘작은 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제가 그렇게 해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잖아요. 지금처럼 수평적으로 평화로운 관계로 견고하게 다져올 수 있어서, 가족들에게 고맙죠. 비록 친척들이 모이면 좀 다르더라도, 저희 직계 가족 내에서는 많이 달라졌어요.

- 혹시 며느리 사표 등 일련의 선택을 단 한순간이라도 후회했던 적은 없으셨나요.

= 후회해요. 그런데 ‘좀 더 일찍 그만둘걸’ 하는 후회예요. 제가 좀 더 빨리 용기를 냈었다면, 저희 아이들에게 보다 평등하고 존중받는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시월드가 ‘거대한 바위’처럼 느껴져서 무섭고 두려웠어요.

‘나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라는 깨달음

- 그럼 부딪혀 보니 ‘거대한 바위’가 아니었던 건가요?

= 아뇨, 거대한 바위 앞에서 제가 너무 작고 보잘것없는 나약한 존재로 여겨졌거든요. 그래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어요. 그런데 며느리 사표를 내고 이혼 선언을 하고.. 일련의 선택을 통해 제가 깨달은 것은 ‘나는 굉장히 큰 힘을 가진 사람이구나’라는 거예요.

그전에는 제가 가진 힘을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나부터가 스스로를 ‘서열 낮은 존재’로 내면화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나는 힘이 있는 존재구나.. 깨달은 거죠. 저의 작은 행동이 결국 가족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그들이 변해야 내가 변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 여자 쪽은 ‘처가’이지만 남자 쪽은 ‘시가’가 아닌 ‘시댁’으로 부르잖아요. 그 외에 아가씨, 도련님 등등 가족 내 호칭에 대한 문제 제기도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너무 공감돼요. 결혼한 직후에 아가씨, 도련님이라고 부르는데 제가 시녀가 된 기분이었거든요. 공식적인 자리 말고 따로 있을 때 6살 정도인 ‘도련님’에게 그냥 이름을 부른 적이 있었어요. 그걸 듣더니 친척 어르신이 ‘도련님이라고 하라’며 뭐라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죠.

며느리가 가족을 부르는 호칭에는 ‘님’자가 많이 붙잖아요. 존중이 담겨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자에 대한 호칭에는 존중이 별로 없어요. 저희 세대에서는 감히 손댈 수도 없었던 문제지만, 아이들 세대는 바꾸어나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 2016년 11월부터 10개월간은 혼자 사셨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 기간은 어떠셨나요.

= 결혼하기 전에는 부모님 집에서 살았고, 결혼 후에는 아내·엄마·며느리 역할로 살아왔잖아요. 24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쓰는 경험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본 거예요.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약간의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럴 때는 누구를 만나면 되니까. 역할로 살다 보면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것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는데, 온전히 나로서의 일상을 누리게 됐고.. 그즈음에 책을 썼어요.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

- 지금 남편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영주씨는 2016년 11월부터 혼자 지내다가 2017년 9월 무릎 수술을 한 후 다시 남편과 살게 됐다. 남편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이제는 함께 살아도 된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 바람직한 부부 관계란 각자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부분이 그렇게 변했어요. 제가 나간 이후에 자식들도 독립해서 정말 남편 혼자만 남았거든요. 제가 아파서 집에 다시 돌아올 때는 알아서 청소도 하고 화분에 물도 주고 있더라고요.(웃음) 지금은 요리 준비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해요.

자료 사진입니다. 
자료 사진입니다. 

- ‘며느리 사표’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를 시도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접한 적 없으신가요.

= 많아요. (활짝 웃음) 독자와의 만남에서 만난 중년 남자가 계신데. 제 이야기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대요. 생각지도 못한 거라서. ‘만약에 내 아내가 사표를 내면 어떡하지?’ 멘붕이 왔대요. 사표 내기 전에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명절 준비도 불필요한 것들을 다 없애고, 결혼 18~19년 만에 (명절에) 아내랑 영화를 보러 갔는데 너무 행복해했다고 해요. 앞으로도 바꿀 건 바꿔야겠다고 해서, 정말 고마웠어요.

저처럼 며느리 역할을 그만두겠다고 한 여자분들도 자기 선택이 과연 맞는 것인지 힘들어하던 와중에 제 책을 보고 너무 반갑다고 연락하시고요. 저는 지금의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거든요. 그때는 죽을 것 같아서 했던 일들인데, 거기서 새로운 삶이 탄생했어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회복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힘이 납니다.

-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으신가요.

= 없어요. 충분히 한 것 같네요.

뿌듯한 얼굴이었다. 영주씨는 자꾸만 ‘작은 힘’이라고 표현하였지만, 나는 ‘작은 힘이 아니라 큰 힘’이라고 말씀드렸다. “내가 먼저 행복해져야 한다. 죄책감 느끼지 말고 당신의 행복을 위해 달려가라” 영주씨와의 인터뷰가 내게 준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