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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일본의 노년 아내들이 졸혼을 꿈꾸는 이유

<졸혼을 권함> 2004년 일본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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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Imazins via Getty Images

작가인 스기야마 유미코(69)는 4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공허감을 느꼈다. 육아를 우선시해서 집에서도 일을 할 수 있는 프리랜서 작가 생활을 해왔는데, 육아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번아웃’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편과 다투는 일도 잦아졌다. 때마침 번역가인 남편은 집 근처에 아파트 한채를 사서 작업실로 쓰기 시작했고, 별거로 이어졌다.

“모두 이 시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궁금했던 그는 다른 중년 부부들을 취재했다. 전업주부였지만 지방의회 의원이 돼서 대학교수인 남편과 별거 중인 부부의 사연 등을 취재했다. 2004년 처음 나왔으며 한국에도 소개된 책인 <졸혼을 권함>(한국 번역서 제목 ‘졸혼 시대’)의 지은이 스기야마는 당시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서문에 적고 있다.

이혼하지 않고 졸혼하는 이유

‘결혼을 졸업한다’는 말을 줄인 ‘졸혼’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이 책은 일본에서 여전히 스테디셀러다. 첫 출판 10년 뒤인 2014년에는 문고판으로도 다시 출판됐다. 졸혼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다. 일반적으로는 이혼을 하지 않고 혼인 상태를 유지하지만, 부부가 서로 필요 이상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좋아하는 생활 방식을 고르는 것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통하고 있다. 어감이 비교적 긍정적으로 들리는 점 때문에 사람들의 공감을 많이 받았다. 일본 연예인들이 졸혼을 선언하며 별거를 택하는 경우가 여러차례 있었던 점도 졸혼이라는 단어가 자주 각광받은 이유였다.

스기야마도 ‘졸혼 당사자’이며, 지금도 졸혼을 이어가고 있다. 스기야마는 최근 <마이니치신문>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졸혼에 대해서) 고민했다. 가족이 붕괴되는 것 같았다. (졸혼) 그 이후 약 20년간 몇번이고 헤어지려고 했고 부부 사이가 소원했던 시기도 있었다. 지금은 3분 거리의 각자 구입한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다. 졸혼을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그는 “남편은 ‘숨지면 바다에 뼈를 뿌려달라’고 말한다. 나는 수목장이 좋다. 우리는 분명 숨진 뒤에도 ‘졸혼’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졸혼은 보통 별거와 비슷한 의미로 쓰이지만 같은 가정 안에서 생활하면서도 서로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형태도 있다. 시코쿠 지방에 사는 48살 여성은 남편과 같이 살고 있지만 졸혼 생활을 하고 있다고 최근 NHK 방송이 전했다. 식사는 자신과 딸이 만들지만 세탁은 각자 하고 생활비도 남편과 별도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졸혼의 계기는 딸이 성장한 뒤 부부 관계가 삐걱이면서였다고 한다. 주위에서 왜 이혼을 하지 않느냐는 말도 들었지만 “남편이 특별히 싫지 않고 (아예 남편이) 없는 것은 불안”해서 이혼은 선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졸혼을 선택하면서 부부 사이가 더 원만해졌다는 경우도 있다. 요코하마시에 사는 56살 여성은 이 방송에서 남편의 정년을 계기로 졸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하루 종일 집에 있는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남편에게 졸혼을 제안하니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지만 점차 익숙해져서 요즘엔 부부가 여행을 같이 가는 등 사이가 좋아졌다고 한다.

지바현에 사는 여성은 남편의 전직을 계기로 8년째 졸혼 생활을 하고 있다고 이 방송에서 말했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이 여성은 지금 사는 곳에서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전직하는 남편을 따라서 이사를 가고 싶지 않았다. 별거와 함께 졸혼을 선택했다. 한주에 한차례씩은 남편이 직장 근처 주거지에서 원래 집으로 돌아온다. 졸혼 이후 오히려 대화는 늘었다고 한다. 남편은 나중에는 다시 같이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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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Yagi Studio via Getty Images

일본에서 졸혼에 대한 관심은 일반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에게서 더 높게 나타난다. 2017년 미쓰비시그룹의 다이야고령사회연구재단이 일본 전국 40~50대 직장인 5천명을 대상으로 은퇴 후 생활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졸혼에 대해서 ‘하고 싶다’ 또는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응답을 한 여성이 32.4%에 이르렀다. 반면 같은 응답을 한 남성은 20.2%에 그쳤다. 졸혼에 대해서 ‘애초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부정적으로 응답한 경우도 남성은 37.8%에 이르렀으나 여성은 25.4%로 그보다 적었다.

전력회사인 ‘간사이전력’ 산하 마케팅 회사인 시에스(CS)포럼이 같은 해 40대 이상 기혼 여성에 한정해 졸혼의 이미지에 관한 설문조사를 해보니, 응답자 551명 중 45.7%가 졸혼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응답했다. 또한 ‘졸혼을 해보고 싶은가’라는 질문에는 10.9%가 ‘그렇다’, 20%는 ‘약간 그렇다’고 답했다.

여성에게서 졸혼에 대한 관심이 더 높게 나타나는 배경에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결혼생활에 답답함과 불만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유명한 부부문제 상담 연구가 오카노 아쓰코는 <마이니치신문> 인터뷰에서 “1990년부터 3만5천건 상담을 했는데 졸혼을 연상시키는 상담도 많았다. 육아가 끝나고 남편의 정년퇴직 시기에 ‘남편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육아나 남편 내조를 위해서 봉인했던 (자신의) 일에 몰두해보고 싶다’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혼을 선택할 경우에 “(경제적) 위험이 크다. 이혼보다는 효율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인생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졸혼의 최대 장점”이라며 “‘이혼하고 싶다’는 상담을 하러 온 여성에게 ‘졸혼은 어떤가요’라고 조언한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또 여성이 졸혼에 더 관심이 많은 이유는 정년퇴직 이후에도 아내에게 가사를 의존하는 남편이 적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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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Yoshiyoshi Hirokawa via Getty Images

‘작은 일에는 눈감을 수 있을 것’

졸혼이라는 단어가 10년 세월 넘게 생명력을 유지하는 배경에는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일본에서 획일적 부부 관계를 인생 후반까지 유지하기는 싫은 사람이 늘고 있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스기야마는 <졸혼을 권함>에서 “육아가 끝난 뒤 부부는 좀 더 자유로워져도 좋다. 양자택일, 이혼인가 (결혼생활) 계속인가가 아니라 애매하게 적당히 서로를 속박하지 않는 관계를 보통의 커플은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구축해온 모든 것을 붕괴시키는 것에는 주저함이 있다”고 적었다.

원만한 졸혼을 위해 7가지가 필요하다고 스기야마는 적었다. △부부간에 자주 대화를 할 것 △상대에게 헌신한 적이 있을 것 △상대를 도와줄 용의가 있을 것 △인생의 이상에 대해서 공유가 가능할 것 △작은 일에는 눈감을 수 있을 것 △이성으로서 상대에게 끌릴 것 △자립이 가능할 것이다. 오카노는 적어도 저축액을 숨긴다거나 불륜을 저지른다거나 하는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 최소한 필요하다고 말했다. 결혼도 쉽지 않지만 졸혼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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