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2020년 01월 12일 17시 24분 KST

이란 정권이 민항기 격추를 인정하면서 역풍을 맞고 있다

하메네이 사임 요구까지 터져나왔다.

Patrick Fallon / Reuters
Attendees wave flags as Iranian Americans from across California converge in Los Angeles to participate in the California Convention for a Free Iran and to express support for nationwide protests in Iran from Los Angeles, California, U.S., January 11, 2020. REUTERS/ Patrick T. Fallon

이란이 11일 우크라이나 여객기를 오인 격추한 “실수”를 사흘 만에 인정하면서 나라 안팎의 비난과 항의로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란의 주요 도시들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에선 현 정권뿐 아니라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사임까지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슬람 공화국인 이란에서 최고지도자의 사임 요구는 극히 이례적으로, 이번 사태의 파장이 심상치 않을 것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미국이 지난 3일 이란 최정예 혁명수비대 쿠드스의 가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이라크 영토에서 암살하자 이란이 닷새 만에 미국에 보복 공격을 하면서 일촉즉발의 위기도 치닫던 중동 정세가 이란의 어이없는 실수로 급반전되는 모양새다. 미국과 이란이 서로 한 방씩 주고받은 군사적 충돌과 무력 분쟁 위기는 이번 민항기 격추 사건으로 한풀 꺾이는 반면, 민항기 격추 책임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과 경제 제재 등 이란에 대한 비군사적 압박 수위가 한층 높아질 전망이다.

이란 군은 지난 8일 새벽 이라크 미군 기지 2곳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한 지 몇 시간 뒤 수도 테헤란 공항을 막 이륙한 우크라이나 여객기를 미군의 공습으로 오인하고 미사일로 격추해 탑승자 176명이 모두 숨졌다. 이란인 82명을 뺀 외국인 사망자 중 이란계 캐나다 국적자가 57명으로 가장 많았고, 우크라이나(11명)와 스웨덴(10명) 등이 뒤를 이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11일 자국 방공부대의 “재앙적인 실수”를 공식 인정하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전화 통화에서 “깊은 유감과 사과”를 표명하며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약속했다고 이란 관영 ‘이르나’(IRNA) 통신 등이 보도했다. 로하니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더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 국제적 규범 안에서 어떠한 국제 협력도 환영한다”고 밝혔다.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란의 책임 인정은 중요한 조처이지만 더 많은 조처가 이뤄져야 한다”며, “어떻게 그런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는지 철저한 진상 조사와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보상을 포함한 이란의 전적인 책임”을 요구했다.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도 트위터로 “로하니 이란 대통령에게 즉각적인 사망자 신원 확인과 주검 인도를 요구한다. 가해자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며 “(사태 수습을 위한) 법적·기술적 협력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란이 사건 책임을 인정한 만큼 조만간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 논의도 병행될 것으로 보인다.

Patrick Fallon / Reuters
Ambassador Lincoln P. Bloomfield listens as Iranian Americans from across California converge in Los Angeles to participate in the California Convention for a Free Iran and to express support for nationwide protests in Iran from Los Angeles, California, U.S., January 11, 2020. REUTERS/ Patrick T. Fallon

이란에선 정부와 군부의 사과 발표에도 수도 테헤란을 비롯해 시라즈, 에스파한 등 주요 도시에서 반정부 시위가 확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민항기 격추 사건이 지난해 11월 휘발유값 인상 등 민생고 항의로 촉발돼 수백명 사망자를 낸 반정부 민주화 시위에 기름을 끼얹은 모양새다. 11일 테헤란 도심에선 희생자 유가족과 대학생들을 비롯한 시민 수백명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일부 시위자는 “최고사령관(아야톨라 하메네이)은 사퇴하라, 사퇴하라”는 구호까지 외쳤다고 알자지라 방송이 전했다. 개혁파 야당 녹색운동의 메흐디 카루비 대표도 하메네이의 사임을 요구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녹색운동은 2009년 이란의 거센 반정부 민주화 시위의 구심이었으며, 카루비는 당시 대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에 이란의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는 메시지를 잇달아 올리며 정권 흔들기에 가세했다. 그는 “용감하고 오래 고통받는 이란인들에게: 나는 취임 때부터 당신들과 함께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신들의 시위 긴밀하게 지켜보고 있으며 당신들 용기에 감명받았다”고 썼다. 또 이란 정부를 향해서는 “인권단체들의 조사를 허용하고 이란 국민의 지속되는 시위 사실을 보도해야 한다. 평화적 시위대에 대한 또 다른 학살이나 인터넷 차단은 있을 수 없다.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고 압박했다.

한편, 이란 혁명수비대의 아미르 알리 하지자데 방공사령관은 11일 국영 이슬람혁명(IRIB) 방송을 통한 사건 발표에서 “사건 당일 우리 군은 전면전 대비 전투태세였고, 저고도 비행체를 감지한 책임자의 조급한 판단으로 엄청난 재앙이 일어났다”며 정보 실패를 시인했다. 그는 “비통한 소식을 듣고선 정말로 죽고 싶었다”며 “(우크라이나 여객기 격추는) 내게 전적인 책임이 있으며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복종하겠다”고 자책했다. 하지자데 사령관은 테헤란 상공이 비행금지 구역이 아니었느냐는 질문에는 “전시에는 관련 당국이 민항기의 비행을 금지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며 “공항과 항공사는 아무 잘못이 없으며 모든 잘못은 군에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