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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2월 05일 12시 07분 KST | 업데이트됨 2020년 02월 07일 10시 17분 KST

상류사회를 그림으로 조롱한 프랑스 귀족 화가의 이야기

현대 그래픽 아트의 선구자로 불린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것이 인생이라 했던가. 슬픔과 기쁨은 때로 양날의 검처럼 얼굴을 바꾼다. 몽마르트의 작은 거인이라 불렸던 ‘툴루즈 로트렉(앙리 드 툴르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이 그랬다. 백작이었던 아버지와 사촌 간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계속되는 근친혼의 영향으로 귀족의 혈통과 재산, 예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장애도 물려받는다. 그리고 이 비극적 재능으로 말미암아 후대 많은 이들에게 놀라운 영감을 남긴다.

adoc-photos via Getty Images
물랑 루즈의 춤 La danse au Moulin Rouge을 그리고 있는 툴루즈 로트렉의 모습. 1890
로트렉이 없었다면 앤디 워홀은 없었을 것이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1. 4피트 6인치의 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다

Bettmann via Getty Images
앙리 드 툴르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

4피트 6인치, 137cm에서 그의 성장은 멈췄다. 14살과 15살 때 넘어져 좌우 허벅지가 차례로 부러진 뒤로는 키가 거의 자라지 않았다. 당시 그는 여러 차례 수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수술 이후에도 2~3년간은 의료기기를 착용해야만 했다. ‘농축이골증’이라는 희귀병이 유전된 것으로 보는데, 발병자 중 20%가 근친혼에서 비롯된다고 알려져있다. 로트렉의 할머니들은 자매였으며, 부모는 사촌이었다. 그의 부모는 다리가 부러져 장애를 겪게 되었을 뿐이라고 유전을 부정하고자 했다. 하지만 로트렉 외에도 장애를 갖고 태어난 이들이 집안에 많았다. 아버지 대에서 태어난 14명의 자녀 중 셋이 선천성 장애를 안고 태어났으며, 그중 한 명은 ‘왜소증’이었다.

훌륭한 품성, 완벽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금욕주의와 용기, 자부심, 타인의 평가를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2.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능은 타고났다”

©Herakleidon Museum, Athens Greece
아리스티드 브리앙 Aristide Bruant Dans Son Cabaret 1893 | Lithography | 138×99cm

머리와 몸통은 정상이지만, 짧은 팔다리 때문에 줄곧 지팡이 신세를 져야 했다. 긴 혀 때문에 침을 자주 흘리고 늘 코를 훌쩍였다. 신분이 높고 돈도 많았지만, 그의 외형을 보고 조롱 섞인 눈빛을 보내거나 무례한 행동을 일삼는 이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타인의 태도에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조롱했던 이들을 매혹할 만큼 눈이 아름다웠으며, 매력적인 성품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위트 있는 말솜씨나 여유 있는 태도가 남달랐는데, 그가 아팠던 청소년기에도 아이답지 않은 유머를 구사했을 정도였다. 

″월요일에 외과 범죄가 실행되었고, 외과 수술의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저한테는 말할 필요 없이 전혀 흥미롭지 않은) 골절이 발견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신바람이 나서 오늘 아침까지 저를 잠재웠어요. 하지만 그러고 나서 저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얄팍한 핑계를 대며 제 다리를 직각으로 구부렸는데 무척 아팠어요” _ 1877년 3월 1일 로트렉이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 中

 

#3. 로트렉의 할아버지는 뛰어난 데생 화가였다

©Herakleidon Museum, Athens Greece
Elles (석판화 연작 中) | 1896 | Color Lithography

아이러니하게도 병과 함께 재능도 대를 이어 내려왔다. 로트렉의 가문은 예술적 성향이 강했다. 할아버지인 레이몽 백작은 뛰어난 데생 화가였으며, 삼촌이었던 샤를 또한 아마추어 화가로 활동했다. 아버지였던 알퐁스 백작 또한 스케치, 채색, 조각을 직접 하는 등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 큰 관심만큼 예술가 친구들도 많았으며, 어린 로트렉에게 그들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로트렉에게 있어 이러한 경험은 삶의 다양성을 엿보는 기회가 됐을 것으로 예측된다. 

 

4. 그의 평생 친구는 연필이었다

©Herakleidon Museum, Athens Greece
Cavalier | 1879 - 1881 | Ink Drawing

다리가 부러진 후, ‘연필’은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이 된다. 승마나 사냥을 즐기는 귀족 생활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해지면서 그는 집착적으로 그림 그리는 데만 집중하게 된다. 물론 그림 그리기는 그의 아주 오래된 놀이였다. 거대한 저택이 생활 터전이자, 공부방이었으며 동시에 놀이터였던 그는 집 안에 있는 가족과 하인, 사냥 장면 등을 끊임없이 그렸다. 기록에 의하면 9살 때부터 작은 스케치북에 연필과 붉은색 초크, 수채물감, 잉크, 크레용 등 온갖 재료로 데생을 했고, 11살부터 14살까지 그가 쓰던 연습장을 비롯해 프랑스어, 라틴어 교재와 연습문제장까지 그림이 빼곡했다고 한다. 그는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유화 737점, 수채화 275점, 판화와 포스터 369점, 드로잉 4,784점과 조각과 도자기, 스테인드글라스 등을 남겼다. 위와 같이 방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연유는 유년 시절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5. 말을 타고 싶었으나 타지 못했던 귀족

©Herakleidon Museum, Athens Greece
Le Jockey 1899 | Color Lithography | 51.1 x 35.5cm

프랑스 귀족들의 삶이란 말과 사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때였다. 두 다리를 잃었다는 건 귀족으로서의 삶도 잃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가 특별히 ‘말’을 좋아하고 수많은 드로잉을 남겼던 데 두 다리가 연관이 없다고 하기 어려운 이유다. 특히 그의 인생에서 ‘말’이 주인공이 되었던 적이 두 번이 있는데, 첫 번째는 다리를 다치기 전후였고 두 번째는 1899년, 알코올 중독과 과대망상증 치료를 위해  3개월 간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가장 자유를 갈망했을 때 그는 말을 그렸으며 그 어떤 사람보다 놀라운 관찰력과 포착력으로 역동적인 말의 모습을 화폭에 옮겼다.

단지 인물만이 존재한다. 풍경은 아무것도 아니고 엑스트라에 머물러야 한다. 순전히 풍경만을 그리는 화가는 악당이다. 풍경은 인물의 성격을 이해시키는 데에만 활용되어야 한다.

 

6.  인물화와 사랑에 빠지다

Photo Josse/Leemage via Getty Images
The bed 1892 | Oil on cardboard | 138×99cm 540 x 70cm l Orsay Museum, Paris

19세기 말 프랑스는 산업화로 인해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신분제에 관한 증오와 불안감들이 싹트던 시기였다. 그로 인해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풍자 과잉의 시대가 도래했고, 로트렉은 일찌감치 ‘풍속 캐리커처’를 다루면서 동료들 사이에서 풍자 화가로 불린다. 그는 인물들의 신체적 특징, 독특한 얼굴 생김새, 자세, 내면을 드러내는 외적 신호들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인간의 추하고 나약한 모습을 강조하고 과장된 요소를 도입하면서 모델의 개성을 드러내거나 상황을 강조하는 등 다양한 방식을 시도한다. 또한 일본의 목판화나 풍자 화가인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작품의 영향을 받아 대상의 단순화, 과감한 구도 선정, 빛과 그림자의 대비 등이 로트렉 그림의 특징이 된다.

 

7. 로트렉의 뮤즈는 몽마르트의 여인들이었다

Print Collector via Getty Images
물랭 루즈에서 At the Moulin Rouge 1892 | Oil on canvas | 123 x 141cm

한창 카바레가 성행하던 파리의 밤 문화는 몽마르트의 ‘물랑루즈’에서 꽃을 피운다. 반짝이는 빨간 풍차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면 온갖 예술가들이 모여들었고, 그곳에는 로트렉도 있었다. 다만 그는 꾸며진 화려함이 아니라 진실한 민낯에 주목했다. 캉캉 댄서와 가수, 코미디언들이 그의 주요 모델이었으며, 화폭 속에는 뚱뚱한 호색한, 창녀를 등진 채 이야기를 나누는 귀족들의 모습까지 가감 없이 들어갔다. 과장도 미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그려졌으며, 그 속에는 무대 뒤의 쓸쓸함과 외로움, 조롱 섞인 표정과 웃음기도 더해졌다. 그리고 물랑루즈의 민낯은 유희를 즐기면서도 여성들을 천대하던 상류사회를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위선으로 똘똘 뭉친 귀족들을 조롱하는 방식이 되기도 했다.

 

어떤 쇼가 벌어지든 상관없다. 나는 언제나 극장에만 있으면 행복하다!

 

8.  포스터계의 대스타가 되다

©Herakleidon Museum, Athens Greece
제인 아브릴 Jane Avril 1893 | Color Lithography | 129×93.5cm

로트렉은 1892년부터 1895년까지 3년 동안 몽마르트의 유곽에 살며 여인들의 모습을 지켜본다. 이때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석판화를 완성했으며 기술의 발전을 통해 그의 인기가 높아지기 시작한다.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누구나 쉽게 신문과 책, 잡지 등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글만 적힌 인쇄물의 지루함을 ‘이미지’가 없애주면서 삽화나 포스터 등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로트렉의 포스터는 사람들이 몰래 떼어가는 통에 품귀 사태가 일 만큼 인기가 좋았다.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 대각선 구도 등 창의적이고 현대적인 로트렉만의 감각적 포스터들은 고전적인 화가들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 덕분에 포스터 속 등장인물들이 스타로 떠오르기도 했다.

 

9. 매거진 저널리즘의 황금기를 거닐다

©Herakleidon Museum, Athens Greece
Polaire (Le Rire 잡지) 1895 | Color Lithography | 26.2 x 12.2 ㎝

프랑스인 특유의 조롱과 시니컬함은 이때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19세기 말 프랑스는 각종 잡지가 쏟아져 나온 매거진 저널리즘의 황금기였다. 로트렉 또한 세상의 민낯을 그대로 그려내는 특유의 화풍 덕분에 여러 잡지로부터 러브콜을 받는다. 풍자 잡지로 유명한 <르 리르(Le Rire, 비웃음)>의 단골 작가이기도 했다. <르 리르>는 스타들의 밤 문화를 비롯해 가십거리, 정치 풍자, 스캔들에 초점을 맞춘 기사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던 잡지였다. 로트렉은 유럽 전체에 흩어진 유대인 커뮤니티의 삶을 삽화로 그리거나 당시 프랑스 정치 상황을 날카롭고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도 했지만, 당국으로부터 게재 제재를 받기도 한다.

 

10. 툴루즈 로트렉이 서울에 왔다

©Herakleidon Museum, Athens Greece
툴루즈 로트렉 展

물랭 루즈의 작은 거인, 현대 포스터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툴르즈 로트렉이 전 세계를 돌고 돌아 서울에 도착했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에서 5월 3일부터 96일간 진행되는 ‘툴르즈 로트렉展‘이다. 포스터와 석판화, 드로잉, 스케치, 일러스트 등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작품 150점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회는 어린 시절 드로잉부터 물랭루즈 등을 무대로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던 시절까지 포함돼 있어 로트렉의 인생 전반을 살펴볼 기회다. 짧은 생애 동안 무려 5천여 점의 작품을 남기며 온 생애를 ‘그림’에 바쳤던 그의 열정을 고스란히 느껴보자.

기간 2020년 01월 14일(화)~2020년 05월 03일(일)

시간 [화~일] 10:00~19:00 (요일에 따라 연장 가능)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가격 일반 15,000원ㅣ중고생 12,000원ㅣ어린이 10,000원

예매 네이버 예약인터파크

* 참조 <툴루즈로트레크>, 버나드 덴버, 이윤희 옮김(시공사, 1989)

©Herakleidon Museum, Athens Greece
물랭 루즈, 라 굴뤼 Moulin Rouge, La Goulue 1891 | Color Lithography | 170×118.7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