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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명의 미국 의원들이 낙태 합법화 판결을 뒤집어 달라고 대법원에 요청했다

미국 전국에서 임신중절을 합법화했던 1973년의 기념비적인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번복하려는 시도다.

  • 허완
  • 입력 2020.01.03 15:16
  • 수정 2020.01.03 15:29
(자료사진) 임신중절권을 지지하는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미국 연방대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모습. 워싱턴DC. 2019년 5월21일.
(자료사진) 임신중절권을 지지하는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미국 연방대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모습. 워싱턴DC. 2019년 5월21일. ⓒKevin Lamarque / Reuters

200명 넘는 미국 상·하원의원들이 미국 전역에서 임신중절(낙태)을 합법화했던 1973년의 기념비적인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재검토해달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연방대법원에 제출했다. 향후 진행 상황에 따라 이 문제가 2020년 11월에 치러질 미국 대선의 주요 이슈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의원들의 의견서는 연방대법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루이지애나주 ‘임신중절 제한법’ 사건(June Medical Services LLC. v. Gee) 심리에 대해 제출됐다. 의견서에 서명한 의원(상원의원 39명, 하원의원 166명) 대부분은 공화당 소속이지만 민주당 의원들도 일부 포함됐다. 콜린 피터슨(미네소타) 하원의원, 댄 리핀스키(일리노이) 하원의원 등이다. 이번 의견서 제출은 루이지애나주에 지역구를 둔 스티브 스칼리스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가 주도했다.

(자료사진) 한 임신중절 반대 운동가의 홍보물로 뒤덮인 차량이 길거리에 세워져있다. 워싱턴DC. 2019년 5월16일.
(자료사진) 한 임신중절 반대 운동가의 홍보물로 뒤덮인 차량이 길거리에 세워져있다. 워싱턴DC. 2019년 5월16일. ⓒANDREW CABALLERO-REYNOLDS via Getty Images

 

의원들은 의견서에서 미국에서 최초로 낙태를 합법화 했던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46년 동안 있었던 ”사실상 모든 (임신중절 관련) 판결들이 거의 대등하게 엇갈렸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뿐만 아니라 로 사건의 판례는 애초부터 무계획적으로 내려진 것이었다”며 ”로 판결은 임신중절을 (여성의) 헌법상 ‘근본적’ 권리로 인정한 게 아니라 (그럴 수 있음을) 넌지시 내비쳤을 뿐”이라고 적었다.

이들은 또 임신중절을 원하는 ‘상당수(large fraction)’ 여성들에게 ‘과도한 부담(undue burden)’을 주지 않는 선에서 주정부가 임신중절 규제 조항을 마련할 수 있다는 내용의 1992년 연방대법원 판결(가족계획협회 대 케이시Planned Parenthood v. Casey)을 언급하면서 무엇이 ‘상당수‘이고 ‘지나친 부담‘에 해당하는지 하급 법원이 제대로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는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나오는 ‘임신중절권’이 실행 불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는 논리를 폈다.

따라서 ”대법원이 로 및 케이시 이슈를 재검토하고, 판결을 뒤엎는 게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자료사진)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을 다시 위대하게!'  - 임신중절 반대 단체들이 개최한 '2019 March for Life' 컨퍼런스에 등장한 판매용 피켓. 워싱턴DC. 2019년 1월17일. 
(자료사진)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을 다시 위대하게!"  - 임신중절 반대 단체들이 개최한 '2019 March for Life' 컨퍼런스에 등장한 판매용 피켓. 워싱턴DC. 2019년 1월17일.  ⓒSAUL LOEB via Getty Images

 

2014년 제정된 루이지애나주의 법은 임신중절을 할 수 있는 진료소와 의사의 수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슷한 내용의 법안이 통과됐던 텍사스주와 마찬가지로 주 전체에서 임신중절 시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한 명밖에 남지 않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임신중절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어 여성의 임신중절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제기된 대목이다.

이 법에 따르면 임신중절 시술을 하려는 의사는 시술 장소로부터 48km 내에 위치한, 주정부가 허가한 임신중절 진료소에 환자를 입원시킬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이 권한(admission privileges, 입원특권)이 없는 의사는 임신중절 시술을 할 수 없게 된 것.

그러자 문을 닫게 될 처지에 몰린 병원들과 의사 두 명이 소송을 냈다. 1심은 이와 비슷한 내용의 텍사스주 임신중절 제한법이 연방대법원에서 위헌 판결(Whole Woman’s Health v. Hellerstedt)을 받은 뒤인 2017년, 법 시행을 전면 금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항소법원은 ‘텍사스와 루이지애나의 상황은 다르다’며 원심을 뒤집었다. 2019년 2월4일부터 법이 그대로 시행될 상황에 놓이자 원고들은 연방대법원에 긴급 유예를 신청했고,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법의 시행을 일시 유예하도록 했다. 보수 성향인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진보 성향 대법관들과 의견을 같이하면서 ‘5대 4’로 내려진 결정이다.

대법원은 원고들이 낸 상고 신청도 허가해 재판을 다시 하기로 한 상태다. 뉴욕타임스(NYT)는 올해 봄에 본격적인 심리가 개시돼 6월쯤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정부 취임 이후 미국 연방대법원은 '보수 5 대 진보 4' 구도로 재편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2년도 채 되지 않아 대법관을 두 명이나 임명하는 '행운'을 누렸다.
트럼프 정부 취임 이후 미국 연방대법원은 '보수 5 대 진보 4' 구도로 재편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2년도 채 되지 않아 대법관을 두 명이나 임명하는 '행운'을 누렸다. ⓒASSOCIATED PRESS

 

대법원의 이 재판은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대법관 구성이 한층 보수화 된 이래 처음으로 올라온 임신중절 관련 사건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의 사임으로 취임 2년여 만에 두 명이나 대법관을 임명하는 ‘행운’을 누린 바 있다. 미국 대법관은 종신직이어서 본인이 스스로 물러나거나 사망하지 않는 한 대통령에게 임명 기회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닐 고서치 대법관과 브렛 캐버노 대법관은 전임자들보다 더욱 보수 성향이 짙은 인물로 평가된다. 이들은 부시 전 대통령 부자가 임명한 세 명의 대법관과 함께 ‘보수 5’를 구성하며,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 네 명이 ‘진보 4’를 이룬다.

미국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한 공화당과 보수 세력은 임신중절에 반대해왔다. 트럼프 대통령 본인도 임신중절에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취임 직후 최우선적으로 서명한 행정명령들에 ‘낙태 저지 행정명령’이 포함됐고, 임신중절에 반대하는 인물을 대법관에 임명하겠다던 약속을 지켰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진 사법부 진보화 흐름을 뒤집는 ‘사법 반혁명’을 노려왔던 미국 보수 세력의 숙원을 풀어준 것이다.

(자료사진) 루이지애나주 의회가 제정한 '임신중절 제한법' 집행정지 신청에 관한 연방대법원의 결정을 앞두고 임신중절에 반대하는 단체 회원들이 법원 앞에서 시위를 열고 있다. 대법원은 법 시행을 일시 유예하도록 했으며, 올해 3월부터 본격적인 심리를 벌일 예정이다. 워싱턴DC. 2019년 2월7일.
(자료사진) 루이지애나주 의회가 제정한 '임신중절 제한법' 집행정지 신청에 관한 연방대법원의 결정을 앞두고 임신중절에 반대하는 단체 회원들이 법원 앞에서 시위를 열고 있다. 대법원은 법 시행을 일시 유예하도록 했으며, 올해 3월부터 본격적인 심리를 벌일 예정이다. 워싱턴DC. 2019년 2월7일. ⓒASSOCIATED PRESS

 

임신중절 반대론자(소위 ‘Pro-Life)‘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보수 대법관들의 가세로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번복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보수 성향이 짙은 남부주들에서는 임신중절을 일부 제한하거나 보다 엄격하게 규제하는 제도가 속속 도입되어 왔다. 앨라배마주는 사실상 임신중절을 범죄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찬성표를 던진 주 상원의원 25명은 한 명도 빠짐없이 공화당 소속 백인 남성이었다.)

NYT는 루이지애나주의 낙태 제한법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2020년 대선에서 이슈로 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의견서에 서명한 공화당 의원들의 규모가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보면 ”임신중절권 제한을 공화당 의원들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또 자신들이 이를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의지가 있음을 핵심 지지층에게 보여주려 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 

의견서 초안을 작성한 임신중절 반대 단체 ‘Americans United for Life’의 변호사 케이티 글렌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기는 힘들 것이라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법원은 우리를 이런 상황에 처하게 만든 판례를 재검토할 기회를 갖게 됐다. 그게 바로 (의견서에 서명한) 모든 의원들이 지적하려 한 부분이다.”

(자료사진) 미시시피주의 임신중절 시술 병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임신중절 반대 단체 활동가의 모습. 미시시피주 전체에서 임신중절 병원은 이곳 단 하나 뿐이다. 잭슨, 미시시피. 2018년 4월5일.
(자료사진) 미시시피주의 임신중절 시술 병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임신중절 반대 단체 활동가의 모습. 미시시피주 전체에서 임신중절 병원은 이곳 단 하나 뿐이다. 잭슨, 미시시피. 2018년 4월5일. ⓒBRENDAN SMIALOWSKI via Getty Images

 

가족계획협회(Planned Parenthood Federation of America)의 회장대행 알렉시스 맥길 존슨은 ”반(反)임신중절 정치인들은 임신중절을 금지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트릭을 동원하고 있다”며 ”대법원에 로 판결 번복을 요청하는 것은 우리의 기본권에 대한 공격”이라고 트위터에 적었다.

임신중절권을 옹호하는 민주당 여성 정치인을 당선시키기 위한 운동을 벌여온 단체 ‘Emily’s List’의 회장 스테파니 쉬록은 임신중절권이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의 근본”이라며 이번 의견서를 비판했다.

그는 ”이는 그 권리들에 대한 실재하는 위협일뿐만 아니라 다수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세력이 우리들의 자유를 빼앗아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티핑 포인트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2019년 8월 발표된 퓨리서치센터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61%는 임신중절의 완전 또는 부분적 합법화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완전히 불법화하거나 대부분 불법화해야 한다는 의견은 38%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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