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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9일 14시 18분 KST

한샘 성폭행 피해자가 직접 밝힌 '가해자와 합의한 이유' (자필 편지)

"저는 제 존재가 남아있는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2017년 벌어진 ‘한샘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인 박모씨(32·남)가 항소심 재판에서 집행 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판사 박형준)는 19일 박씨에게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면서 ”피고인이 범행을 인정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점, 피해자와 합의해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피해자와의 합의가 박씨의 집행유예 선고에 분명한 영향을 준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가 박씨와 합의한 것은 가해자를 정말로 용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첫 직장에 들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폭력 피해를 겪은 피해자 A씨는 19일 한겨레에 자필 편지를 보내 ”살기 위해서 합의를 했다”고 심경을 밝혔다. A씨는 ”(박씨에게) 사과는 못 받았지만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주장하던 가해자가 합의를 해주면 모두 인정하겠다고 했다”고 합의의 이유를 설명한 뒤 ”저는 제 존재가 남아있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 말을 믿어주시고 응원해주신 분들이 계셔서 이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는 A씨는 ”남은 사건들 또한 최선을 다해 조금이라도 빠르게 결과를 얻고 이제 그만 벗어나 제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전했다.

한겨레

판사님들께서 내려주신 1심 3년형의 결과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이 결과를 얻기 위해 3년이란 시간을 보냈고
결과만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버텼습니다.

 

활기 가득하고 싶던 20대 시절을 고통 속에서 버티고 버티다 보니
이제 더이상은 몸과 마음이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대학 졸업도 전에 꿈을 품고 들어온 첫 직장에서 저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어디서 누군가를 믿으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막막합니다.
앞으로 어떤 회사를 가도 두려움과 사람들의 시선이 공포로 다가옵니다.

 

계속해서 길어지는 이 재판과정에서 오는 무력감이 저를 너무 우울하게 만듭니다.
괜찮아 잘될거다 믿고 있지만 더 이상 스스로 다독여가며 버티기에는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재판들이 남아있습니다.
저를 앞에 앉혀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처음 들어보는 거짓말을 검사님 앞에서 당당하게 하는 한샘 인사팀장 사건은 이제서야 기소가 됐습니다. 인사팀장의 성추행은 불기소가 되서 다시 정신 차리고 싸워야 합니다.

 

이제 또 시작해야 하는 재판들이 많이 남아있기에
사과는 못 받았지만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주장하던 가해자가
합의를 해주면 모두 인정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라도 합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제 존재가 남아있는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날 위해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이 있어 그 손을 놓아버릴 수 없습니다.
이런 낭떠러지 같은 상황에 손을 잡아준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버텨보려고 합니다.
아직 남아있는 사건들이 해당 사건과 연관있는 사건들이기에
합의를 하고 가해자의 범죄를 인정받고 제가 조금이라도 살아있음을 느낄 때
좀 더 힘을 내서 남은 사건들 또한 최선을 다하여 조금이라도 빠르게 결과를 얻고
이제 그만 벗어나 제 삶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 말을 믿어주시고 응원해주신 분들이 계셔서 이때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A씨 변호를 맡은 김상균 변호사도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합의의 이유에 대해 아래와 같이 밝혔다.

″피해자는 여전히 심적으로 괴로워하며 지내고 있지만 인사팀장의 형사재판 결과 등 법적 싸움이 남아있다. 피해자 입장에선 재판부 판단이 뒤집히지 않을까 불안해했는데 피고인이 죄를 인정하면 항소심에서 재판 결과가 뒤집힐 확률이 낮고, 또 이 재판에만 매몰될 수 없다는 판단이 있었다. 성범죄 피해자가 합의하지 않고 끝까지 재판을 진행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한샘 성폭행 사건은 피해자 A씨가 2017년 11월 한 온라인 사이트에 글을 올리면서 알려졌다. A씨는 화장실에서 동료인 남성에게 불법촬영을 당하고, 교육담당자인 남성 상사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며, 인사팀장인 남성에게 허위 진술을 요구받다 성폭행을 당할 뻔했으나 회사 측은 사건을 덮으려 했으며 오히려 자신이 2차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A씨는 회사를 그만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