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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한 자루씩을 든 소년들과 마주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

한국국제협력단(KOICA) 주관 제14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 황혜원
  • 입력 2019.12.09 18:52
  • 수정 2019.12.12 17:22

비썩 마른 소년소녀들이 무리 지어 흙길을 다녔다. 소년들은 윗옷을 입지 않고 반바지에 맨발로 다녔다. 무엇 때문인지 허리춤엔 ‘칼 한 자루’가 있었다. 갈색 피부 위로 도드라지는 갈비뼈가 날카로운 인상을 보탰다. 아이들의 깡마른 모습은 멀리 한국에서 온 김기례 프란체스카 수녀에게 두려움을 안겼다.

어린 왕자가 염려했을 정도로 큰 바오밥나무가 사는 섬, 마다가스카르. 한국과 전혀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어린 왕자가 염려했을 정도로 큰 바오밥나무가 사는 섬, 마다가스카르. 한국과 전혀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Kieran Stone via Getty Images

김기례 수녀는 1989년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한 첫 한국인 선교사다. 평생 수녀의 길을 걷겠다는 종신 서원을 한 뒤 1987년, 이탈리아 로마로 떠나 선교학을 공부하게 된다. 해외여행이 어렵던 시절, 비행기 한 번 타기 위해 반공교육을 몇 시간을 받았는지 모른다. 어렵게 로마에 도착한 김 수녀는 가난한 땅 아프리카로 가겠다고 마음먹는다. 총장 수녀 님은 “마다가스카르로 가라”고 했다. 그날 김 수녀는 ‘마다가스카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인도양 한가운데 우뚝 솟은 바오밥나무의 섬.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섬. 우아하게 흔들리는 코코 나무 잎 사이로 별들이 쏟아지는 섬. 아프리카 대륙 동쪽에 위치한 마다가스카르는 인구 대부분이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족과 가까운 말라가시인이다. 말라가시어를 주로 쓰지만, 프랑스 식민지의 영향으로 프랑스어가 준공용어다. 쌀밥을 주식으로 삼는데, 밥심으로 산다는 점이 김 수녀에게 ‘필연’처럼 느껴졌다.

마다가스카르는 아름다운 섬이었으나 가난했다. 마다가스카르의 수도 안타나나리보에 도착해 처음 마주한 광경은 쓰레기가 널브러진 거리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부모가 없거나 버려진 아이들은 쓰레기통에서 입고 먹을 걸 골라냈고 잠도 쓰레기통 주위에서 잤다. 맨발로 다녀 두꺼워진 발뒤꿈치는 쩍쩍 갈라져 있었다. 쌀이 주식이지만 쌀이 없어 쓴맛이 나는 뿌리식물 마뇨카를 삶아 먹는 게 다였다. 칼슘이 부족해 어린 소녀들도 이가 다 썩어 있거나 빠져있는 경우가 많아 속상했다.

제14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대통령 표창 김기례 프란체스카 수녀
제14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대통령 표창 김기례 프란체스카 수녀

도시의 모습을 본 뒤 김 수녀가 속한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한국명 살레시오 수녀회)’는 거리의 아이들이 지낼 수 있는 기숙학교를 열기로 했다. 키니네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고 황톳빛 언덕을 깎고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 2년이 걸렸다. 1991년, 55명의 아이를 돌보고 먹이고 공부시키는 기숙학교의 문이 그렇게 열렸다.

주말에는 도시 주변부로 나갔다. 공항이 있는 이바뚜에서 5km를 더 가면 초라한 시골 공소가 있었다.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규모가 작은 성당이다. 그곳에서 김 수녀는 멀어서 도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유럽에서 온 천 조각으로 바느질을 하며 함께 옷을 짓고, 소풍도 가고 음식을 나눠 먹었다.

처음에는 서른 명 정도의 아이들이 모였는데, 2년쯤 지나니 400명으로 늘어났다. 해발 1,300~1,400m의 고원 지역인 안타나나리보의 겨울은 기온이 영상 4℃까지 내려간다. 영하로 떨어지진 않지만 바람이 매섭다. 겨울에도 아이들은 얇은 셔츠 하나로 추위를 견디며 맨발로 거친 자갈밭과 흙길을 걸어 공소로 몰려들었다. 작은 공소에 다닥다닥 붙어 기도를 나누고, 배움을 나누는 순간순간이 김 수녀에게는 기쁨이었다. 

반바지에 칼 한 자루를 차고 다니는 ‘마장가’ 지역의 사카라바족 남자 아이들의 모습. 
반바지에 칼 한 자루를 차고 다니는 ‘마장가’ 지역의 사카라바족 남자 아이들의 모습. 

그로부터 6년 뒤, 김 수녀는 ‘마장가’ 지역으로 장소를 옮긴다. 바닷가에 위치한 어촌마을로 아이들, 특히 사카라바족 남자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어릴 때부터 생계를 위한 경제활동에 나섰다.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아 먹거리를 구하고 가계에 보탬이 돼야 했다. 맨몸에 칼 한 자루를 찬 모습으로 김 수녀에게 두려움을 안겼던 그 소년들이었다.

칼을 찬 소년들은 칼로 뭐 하는 걸까. 소년들은 망고나무 위에 올랐고 칼을 꺼내 망고를 쓱쓱 베어 물었다. 먹을 게 없어 덜 익은 나무 열매를 먹기 위해선 칼이 필요했다. 아이들이 씨를 툭툭 나무 아래로 던지며 흰 이를 드러내고 씩 웃으면, 처음 가졌던 두려움이 무색해졌다. 바람 빠진 공에 질긴 풀잎과 버려진 비닐 조각으로 얽어 축구공을 만들어 함께 차니 아이들 마음의 빗장이 열렸다. 

수녀회는 ‘마장가’ 중심 지역에 성녀 데레사 유치원·초등학교와 도움이신 마리아 중학교·기술고등학교를 운영했다. 학령기를 놓친 아이들을 위한 3년 과정의 학급도 마련했다. 1,500명의 아이가 이곳에서 공부했지만, 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김 수녀를 포함한 공동체 구성원들은 주말마다 비포장 흙길을 달리는 버스에 올라탔다. 안타나나리보에서 공소 한 곳을 중심으로 주말 학교가 열렸다면, 마장가에서는 매 주말 시골 구석구석에서 이동식 주말 학교가 열렸다. ‘돈 보스코’ 성인이 오갈 데 없는 청소년들에게 마련해줬던 교육 공간, ‘오라토리오’가 김 수녀와 그가 속한 공동체의 손을 거쳐 마다가스카르 곳곳에 이런 방식으로 열렸다.

김 수녀는 오라토리오를 통해 아이들이 많이 웃길 바랐다. 고기잡이배를 타고, 숯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고, 농사 짓고, 물 긷느라, 여가를 즐길 시간도 장소도 부족한 아이들이 오라토리오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연극하고 만들기를 하고 뜨개질을 하고 그림을 그렸다. 때로는 요리도 하고 컴퓨터 교육, 언어 교육 등 배움의 시간도 만들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함께 하려 했다. 무엇보다 아이들 스스로가 ‘활성자’가 될 수 있도록 지도자를 뽑고 그들이 스스로 그룹을 이끌 수 있도록 도왔다.

아이들과 사진을 찍는 (왼쪽) 김기례 수녀의 얼굴이 밝다
아이들과 사진을 찍는 (왼쪽) 김기례 수녀의 얼굴이 밝다

김 수녀가 1989년 10월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한 이래 2019년 현재까지 부모님의 건강 악화로 한국에 들어온 4년여를 제외하고 25년을 한결같이 아이들을 교육했다. 초창기 15년 동안 안타나나리보를 시작으로 베타푸, 마장가, 피아나란추아 등 마다가스카르 곳곳으로 들어가 오라토리오를 열고 아이들을 가르쳤다면 2005년부터는 안타나나리보 치다나 지역에서 ‘성 프란체스코 학교장’을 맡았다.

이곳에서 그는 학교장으로서 아이들이 조금 더 안정적이고 깨끗한 곳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인프라를 갖추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기술 교육 등을 확충하는 데 힘썼다.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마다가스카르 정부에서 인정받는 자격을 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중등교육과정을 개설하고 정부로부터 중등교육 기관으로 인가를 받아냈다. 더 많은 아이가 배울 수 있도록 교실 14개를 증축했다. 1개 동이 2개 동이 되고, 반지하 교실을 없앴다. “제가 이 아이들의 엄마잖아요. 엄마가 되니까 뭐든 어떻게든 하게 되더라고요.”

성 프란체스코 학교가 있는 치다나 지역은 안타나나리보에서도 가난한 빈민촌이다. 살인·강간 등 강력 사건이 자주 발생했고, 2005년 당시에는 하수도가 없어 골목은 어지럽고 깨끗한 물은 귀했다. 마다가스카르 경제가 조금씩 발전하면서 나아진 위생 상태가 이곳에서는 예외였다.

안전하게 놀 곳이 없는 동네에서 안전한 놀이터를 마련해주기 위해 김 수녀는 학교 옆에 운동장 두 개를 만들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는 영양결핍 상태의 아이들과 가난한 교사들에게는 쌀밥에 콩, 채소 등을 무료로 제공했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의 부모도 학교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했다. 성 프란체스코 학교의 교장을 맡은 7년 동안 김 수녀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살며 몸으로 느낀 필요들을 채우기 위해 지혜를 짜내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도움이신 마리아 기숙학교 아이들과 함께, 가운데 김기례 프란체스카 수녀
도움이신 마리아 기숙학교 아이들과 함께, 가운데 김기례 프란체스카 수녀

김기례 수녀는 이런 활동으로 외교부가 주최하고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가 주관하는 ‘2019 대한민국해외봉사상’ 최고상인 대통령상에 선정됐다. 해외봉사상은 국제개발협력위원회가 세계 각지에서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하는 봉사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2006년 제정한 정부 포상이다.

김기례 수녀는 25년의 세월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을 아이들의 변화와 성장을 마주할 때라고 꼽았다. 이바투 지역에 처음 세운 도움이신 마리아 기숙학교에서 생활한 소녀는 교사가 되었다. 그녀는 김 수녀가 교장으로 있는 성 프란체스코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행정 일을 돌본다. 의젓한 초등학교 4학년생이 된 앙드레는 볼 때마다 기적이라고 느낀다. 14개월 아기일 때 양부모로부터 버려져 외할머니에게 맡겨진 앙드레는 돌이 지났는데도 걷지도 기지도 못했다. 김 수녀는 김대건 신부의 세례명을 따서 아이에게 앙드레라는 세례명을 지어주고, 열심히 우유를 먹이고 열심히 안아줬다. 아이는 석 달 만에 기고 걷고 뛰었다.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7살 때부터 도움이신 마리아 기숙학교에서 함께 생활한 한 소녀는 중학교 2학년 성탄 방학 때 기숙학교를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만난 소녀는 임신 상태였고, 수녀원에 오게 해 밥을 먹이고 함께 아기 옷을 만들고 출산을 도왔다. 일자리도 주선했지만 아이는 일을 그만두고 연락을 끊었다. 고온다습한 기후로 인해 피부병이 많은 암반자 지역에서 만난 한 청년은 피부병 치료를 돕고 식사를 제공하고 수녀원 정원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했지만 수녀원의 물건을 훔쳤다. 길에서 강도행위를 하다가 붙잡히기도 했다. 고아원 기숙학교에서 자란 아이들이 다시 딸을 데려와 고아원에 맡기고 가는 일도 많다.

김 수녀는 마다가스카르의 아이들이 배움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더 많은 현지인 교사들을 길러내는 것이 그 답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마다가스카르의 황톳빛 대지 곳곳에,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 너머너머에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고,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가 필요하다. 그녀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과업이다.

“프란체스카”, “마쎄라 김(김 수녀님)”. 김기례 수녀가 안타나나리보 거리를 걸으면 여기저기에서 정겨운 인사 소리가 들린다. 시골 소도시에 가도 ‘마쎄라 김’ 소리에 뒤돌아보면 졸업생들이 달려와 그녀를 안아준다. 아이였던 소녀들이 엄마가 돼 딸을 인사시킨다. “제가 어느새 할머니가 됐어요. 아이들과 늘 함께 지내다 보니 마음은 늘 젊은데, 같이 찍은 사진 속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떤 할머니가 있어 바라보면 그게 저네요.” 서른 살 김기례 수녀가 할머니가 된 김기례 수녀에게 환한 웃음을 건넨다. 그리고 그녀는 또 다음 30년을 부지런히 살아낼 것이다.

* 해당 기사는 박수진 작가의 원고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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