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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03일 17시 09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12월 03일 19시 05분 KST

[현재 작가] "자본주의 아닌 게 어딨겠어요"라고 소설가 장류진은 말한다

'일의 기쁨과 슬픔'을 낸 장류진을 만났다

김준연
장류진 작가

‘판교 테크노밸리의 하이퍼 리얼리스트‘로 불리던 작가 장류진이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단편 소설과 같은 이름의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냈다. 1년 반 동안 9개의 단편을 쏟아냈지만, 함량이 떨어지는 이야기는 단 하나도 없다. 모든 작품이 표제작만큼 치밀하다. 그녀의 소설에는 크고 넓은 세계를 다 이해하고 문제적 지점을 포착해 심판하겠다는 만용이 없다. 그 소설들에는 작고 익숙한 세계가 있고, 그 세계 안에는 보통 사람이 살면서 딱 필요한 만큼의 사유를 충분히 공유할 기회가 있다. 현재 작가 장류진을 만났다.

탐페레 공항은 정말 명작입니다. 쑥스러우시겠지만, 반응이 어떤가요?

탐페레 공항이 소설집의 마지막에 있는데, 눈물을 흘리셨다는 분들도 있고, 많이들 좋아해 주셨어요. 그 소설이 ‘모티프’라는 텀블벅으로 후원받아 제작하는 문학지에 실렸던 거라서 다른 소설들에 비해서 적은 분들이 접했던 작품이에요.

소설집에 있는 단편들 말고 또 새로 나온 소설이 있나요?

창비 겨울호에 나온 단편 ‘연수’가 있어요.

그럼 단편집과 ‘연수’만 보면 지금까지 나온 장류진 소설은 다 본 건가요?

아뇨. 문학동네 겨울호에 또 실려요. 아직 나오진 않았어요.

저는 ‘탐페레 공항‘이 어째서 이렇게 강렬한지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봤어요. ‘구부리지 마시오’나 사진을 붙였다 뗀 자리에 남은 테이프 자국 같은 장치가 문학적인 정합성을 위해 억지로 만든 상징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연성이 가득 찬 장치랄까요?

그런 점을 염두에 둘 때도 있고, 아닌 것도 있어요. 물론 상징이나 알레고리라고 생각하긴 했어요. 테이프에 남은 종이 찌꺼기 같은 것들로 내가 한때 품었지만, 완전히 비워지지 않고 끈적끈적하게 남아 있는 그런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소설의 소재를 보면서 장류진이 소설로 쓰는 소재에는 막상 기사로 쓸 만한 사건이 없다는 공통점이 좀 있더군요. 예를 들면 어떤 남자가 전 직장 동료인 여성에게 연정을 품고 후쿠오카까지 갔다가 거절 당하는 얘기(‘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를 기사로 쓸 수는 없잖아요. 소재 선정의 과정이 궁금해요.

저는 어떤 메시지를 얘기하기 위해서 특정 소재를 가져오는 경우는 잘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상상이 엄청 많아요. 다만 그 상상은 멀리 가는 상상이 아니라 조금 가는 상상이에요. 여러 상상을 하다가 어느 순간 여러 개의 상상이 붙는 순간이 있어요. 자석처럼요. 그렇게 붙었을 때 ‘하나의 이야기가 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쓰기 시작해요. 그 이야기를 쓰면서 내가 하는 생각들이 소설에 담기는데 그게 메시지가 되는 것 같아요.

김준연
소설가 장류진.

새벽에 찾아온 낯선 남자가 성구매 남성이라는 상상과 온라인 서비스에 떠도는 음란성 문구를 블라인드 처리하는 여성이라는 상상이 붙어서 ‘새벽의 방문자들’이라는 소설이 탄생하는 식이군요. 생각해보니 그렇게 붙어야 이야기가 되겠네요.

그렇죠. 특히 그 새벽의 방문자들에서 문에 달린 방문자 확인용 렌즈를 통해서 낯선 남자를 보는 건 제가 실제 경험했던 일이에요.

남자들은 사실 그런 공포를 잘 모르죠. 저만 해도 누가 ‘딩동’ 하면 택배 왔는 줄 알고 신나서 ‘누구세요’ 하면서 문부터 열거든요.

맞아요. 정말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제 주변에도 너무 많아요.

장류진의 소설을 두고 ‘한국 사회를 설명해 줄 타임캡슐을 만든다면 넣지 않을 수 없는 책’이라는 정이현 작가의 표현을 봤어요. 그런데 저는 또 한편으로는 당대성을 가지고 있지만, 보편성을 획득해서 더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좋은 말이네요. 정이현 작가님의 말도 좋은 칭찬이지만, ‘당대적이지만은 않다’는 말도 좋은 말 같아요. (웃음)

사회적인 소설은 개인의 이야기를 시스템과 구조의 문제를 드러내는 희생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어요. 사회학을 전공하셨다고 들었는데, 소설을 보면 그런 문제의식을 막 드러내지 않아서 좋았어요.

사회학을 전공한 게 소설에 영향을 준 것 같긴 해요. 다만 제가 사회학을 전공해서 그런 사람이 되었다기보다는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 사회학을 전공한 것 같아요. 가고 싶어서 갔던 과거든요. ‘잘 살겠습니다’ 같은 경우에는 그런 생각을 하긴 했어요. 화자와 빛나 언니가 청첩장을 가지고 대립하는 이야기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조직사회에서 여성 노동자의 위치 혹은 자리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새벽의 방문자들’도 그렇게 읽힐 수 있죠.

그렇죠. 시작은 제가 경험한 에피소드에서 시작했지만, 소설을 쓰면서 남자들이 여자를 대하는 방식, 여자를 같은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남자에 대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소설에 보면 ‘정’과 ‘김’이 나오잖아요. 소름 끼치게 실제로 있는 인물들 같아요.

맞아요. 제가 작가의 말에도 썼지만, 제가 보고 듣고 겪은 인물들을 그대로 썼어요. ‘새벽의 방문자들‘에는 성매매를 하러 온다고 추정되는 남성들의 옷차림이며 표정을 하나하나 묘사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 장면을 어떻게 묘사를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실제로 자신이 자신의 입으로 성매매를 했다고 말했던 사람의 외모를 그대로 가져다 썼어요. 써 놓고 보니 ‘이렇게 하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소름 끼쳤던 건 경솔하게 필요치도 않은 성매매 정보를 여자친구에게 알려주는 ‘정’ 같은 인물보다 깔끔하고 젠틀하게 행동하는 ‘김’ 같은 인물이 성매매하는 경우를 더 많이 봤기 때문이기도 해요.

그런데 저는 정이든 김이든 다 했다고 생각하고 쓰긴 했어요. 정은 해놓고 안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김도 몰래 하는 사람이고요.

그 소설의 결말이 저는 좀 이해가 안 됐어요. 마지막에 성매매 여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옆 동 같은 호수에 찾아가잖아요? 그런데 그 호수에 사는 여성이 성매매 여성인지 아닌지가 정확하게 안 그려져요.

맞아요. 제가 그 소설의 결말을 정말 많이 바꿨거든요. 그 이유는 제가 내적 결론에 도달하지 못해서인데, 더 깊은 이유는 어떻게 써도 현실에서 답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딱 맺는 결말을 낼 수가 없었어요. 사실 저도 열린 결말이나 모호한 결말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 소설은 모호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 상태로는 ‘옆 동 같은 호수에 가봤더니 성매매 여성이 아니더라‘라고 읽을 수 있겠고, ‘성매매를 하는 사람의 집에 갔는데 자신이 상상했던 성매매 공간과 너무 달랐다’라고 읽을 수도 있어요.

저는 후자로 생각했어요. 성매매 여성과 그 거래가 일어나는 공간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옆 동 여자의 집을 찾아 갔는데, 너무 평범한 여성이 정말 평범한 공간에 있어서 당황하는 내용으로요.

그런 열린 결말을 내린 이유는 실제 겪은 일 때문이에요. 예전에 살던 집이 성매매 업소 근방에 있었어요. 브이자 갈림길이 있고,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제가 살던 집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유흥업소가 있었죠. 하루는 그 갈림길에 서 있는데 멀끔하게 생각 한 중년 남자가 저를 알은 척하면서 모르는 이름으로 불렀어요.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무슨무슨 업소에서 일하는 누구누구가 아니냐고 묻더라고요. 그 남자는 취하지도 않았었어요. 아니라고 했더니 정중하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자기 갈 길을 갔어요. 그때 ‘아니라고 하면 다인가’라고 생각했어요.

저 사람은 돈을 주고 여자를 사는 사람인데, 저 사람의 그런 태도는 직장이나 사회에서는 어떻게 표출될까? 돈을 주고 살 수 있다고 여기지 않을까? 그런 식의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성 혐오의 핵심은 남자가 여자를 동등한 존재로 보는 게 아니라 하등한 존재, 게임으로 치면 같은 플레이어가 아니라 내가 가질 수 있는 아이템이나 퀘스트로 내려 보는 거거든요. 그 사람(작가가 우연히 만난 중년의 남성)은 어디서든 여자를 돈으로 살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할 것 같았어요. 이건 성매매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여자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에 대한 문제인 거죠. 이런 의식을 담다 보니 열린 결말을 냈어요.

김준연
소설가 장류진.

도우미 아주머니가 등장하는 ‘도움의 손길’에선 직장 생활에서 을의 위치인 사람이 도우미 아주머니를 고용하면서 갑의 위치가 되면서 겪게 되는 어색함이 재밌었어요. 가장 재밌는 건 결국 다시 아주머니를 갑으로 모시는 을의 감각으로 돌아간다는 점이었어요.

현실에서 특정 인물이 선악으로 구분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소설에서도 선악이 구분되지 않게 그리는 게 재밌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화자인 ‘나’가 맞는 것 같고, 다르게 보면 또 도우미 아주머니가 맞는 것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소설을 쓰고 주변에 보여줬더니 의견이 갈렸어요. 일부는 ‘새댁이 이상하잖아‘라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이상하잖아‘라고 말했어요. ‘새댁도 아주머니도 이상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만족스러웠죠. 아주머니가 을이면서 갑질을 한다고 볼 수 있는 반면에 새댁도 아주머니에게 손해인 줄 알면서도 격주로 와달라고 부탁을 하고, 창틀 청소비를 자기 마음대로 1만원으로 책정한다든지, 자기는 나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아주머니께는 차 한잔 안 내준다든지 하는 행동을 하거든요. 이 아주머니도 일을 그만두면서 새댁을 한번 꽉 밟고 나가죠. 그러면서도 새댁은 남편이 아주머니 욕을 할 때 아주머니 편을 들죠.

‘도움의 손길‘도 그렇고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도 그렇고 화자를 의심하게 만드는 소설이죠. 이런 기법을 쓰는 소설가는 간혹 있지만, 잘 쓰는 소설가는 드문 것 같아요. 잘 쓰기 힘든 이유는 독자가 화자를 싫어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소설 자체의 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인데, 어떻게 이렇게 간을 잘 맞췄나요?

저는 1인칭을 많이 써요. ‘나’라는 인물이 등장해서 서술을 하죠. 물론 작가인 장류진은 화자인 나로써 다른 등장인물을 보게 되죠. 그리고 아까 말한대로 그 인물들을 완벽하게 선하거나 완벽하게 악하게 그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지훈이 화자로 나오는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는 참 힘든 도전이었다고 생각해요. 소설 후반까지 지훈이라는 화자가 싫어지지 않아야 이 소설이 성공하는 시스템이니까요. 그런데 지훈은 참 후진 남자란 말이죠.

그전에도 (소설을 읽으면서) ‘신뢰할 수 없는 화자‘라는 개념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개념을 ‘신뢰할 수 없는 화자‘라는 정해진 이름으로 부른다는 건 대학원에 들어가서 처음 알았어요. 재밌다고 생각했고 ”나도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 써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쓴 소설이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에요. 쓰는 입장에서는 결론을 알고 있으니 재밌게 썼죠. 

저는 지훈이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좋아해서 찔렸어요. 저도 좋아하거든요. 그런 걸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남자를 특정한 코드를 넣으신 건가요?

저는 그냥 유명한 감독을 넣은 거예요. 사실 그렇게 마이너한 감독도 아니고, 조금만 일본 영화에 관심이 있으면 다 아는 감독들인데, 그걸 마치 자기만 아는 것처럼 말하는 남자로 그리고 싶었어요.

작가가 가차 없이 다루는 인물이 있는 반면 비판적으로 보지만 결국은 따듯하게 대해 주는 인물들이 나뉘는 것 같아요. ‘우동마켓의 사장’(‘일의 기쁨과 슬픔’)이나 지훈(‘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에겐 가차 없지만, 자신과 업무에서 계속 부딪히는 개발자인 케빈에겐 나름 따듯하죠. 싱글 내기를 거부하고 앨범을 고집하는 장우(‘다소 낮음’)를 어리석다고 보면서도 그의 우직함을 비웃지는 않아요. 선악은 아니지만 호오를 드러낸다고 할까요?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등장하는 안나와 거북이알(카드사 포인트로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등장인물)은 일과 나를 분리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에요. 케빈은 일과 자신이 딱 붙어있는 캐릭터에요. 자아와 일이 붙어 있는 사람이 소설에 필요했어요. 일이 잘못되면 내가 잘못되는 것 같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비난을 받으면 자아가 비난을 받은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죠. 저는 꼭 일과 자신을 분리하는 게 맞는다고 보지는 않아요. 다만 케빈에게 그리고 비슷한 독자들에게 ”일과 자아가 붙어 있다 보면 생기는 문제들이 있으니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 한 번쯤은 일과 떨어져서 지켜 봐봐”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김준연
소설가 장류진.

소비 하나에도 장우와 유미가 바뀌고 나뉘죠. 예를 들면, 저는 옷에는 유미처럼 돈을 쓰지만 식도락과 여행에는 장우처럼 써요. 작가님은 어떤가요?

소설에서 장우가 앨범을 내려고 하잖아요? 제가 좀 오랫동안 CD를 모으고 앨범 단위로 음악을 감상한 편이에요. 지금은 저도 CD를 모으지는 않지만, 아직 앱으로 음악을 들을 때도 앨범 단위로 다운받아 듣는 성향이 있어요. 특히 정규 앨범일 경우에는 한 곡만 듣기 미안해요. 

어떤 음악을 주로 들어요?

국내 인디 밴드들을 주로 들었어요. 이스턴사이드킥도 좋아했었고, 요새는 새소년, 아도이 좋아하고, 어제는 솔루션스 공연도 다녀왔어요. 예전에 소설 쓰기 전에는 바이바이배드맨, 글렌체크, 전기뱀장어, 얄개들 한창 좋아해서 공연도 다니고 그랬어요.

요새 말로 ‘찐’이네요.

그런가요?

장류진 소설의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감정의 실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굳이 빛나 언니에게 1만2000원짜리 선물을 골라주는 건 오로지 감정의 실익만 있는 선택이죠. 밀레니얼 끝물들의 시대정신에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입니다. 그럴싸한가요?

그럴싸하네요. 다만 평소의 저는 ‘감정’ 보다는 실익 내지는 실리를 따지는 편이에요. 저는 글 쓰는 사람이기 전에 생활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먹고 사는 것, 천원 이천원이 제겐 큰 것 같아요.

그러니까요. 사실 지구 온난화 같은 거대한 문제보다는 점심 한 끼 먹고 연장자라는 이유로 쏴야만 했던 점심 카드값에 더 화가 나거든요.

그렇죠. 정말 눈물 나잖아요. 생활은 사실 돈으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해요. 돈이 아주 많은 사람도 돈을 생각하는데, 돈이 아주 많지 않은 사람은 더 그렇겠죠.

소설집 뒤에 있는 평론에 ‘자본주의 소설’이라는 표현도 나오죠.

자본주의 아닌 게 어딨겠어요.

아 참, 작가님 인터뷰를 정리한 기사 중에 ‘문학이 위대하다는 생각 따윈 없어서다’라고 써 놓은 기사가 있더라고요. 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은데 설명을 좀 해주세요.

그때 제가 얘기한 말을 듣고 정리하신 것 같아요. 부연하자면 저는 당시에 소설이 고귀하고 고결하고 숭배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얘기했던 것 같아요. 소설은 영화나 드라마나 연극 등 다른 많은 이야기의 장르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글로만 이뤄졌다는 특징이 있지만, 더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누가 우열을 가릴 수 있겠어요.

영화인 중에는 영화를, 소설가 중에는 소설을, 시인 중에는 시를 가장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걸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저는 다른 장르를 깎아 내리고 싶지 않아요.

박세회 sehoi.park@huffpost.kr

창비
장류진 신작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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