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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사주는 이가 없었던 화가의 작품이 132억에 팔렸다

그는 '내 그림에 미치지 않고는 살 사람이 없다'고 말했었다.

  • By HuffPost Korea Partner Studio
  • 입력 2020.01.13 11:18
미국 뉴욕 아틀리에 작업하는 김환기 화백, 1972
미국 뉴욕 아틀리에 작업하는 김환기 화백, 1972 ⓒⓒ(재)환기재단 ∙ 환기미술관

50년 뒤 자신의 작품이 100억 원대에 팔릴 것이라 그는 예상이나 했을까? 예술가, 그중에서도 화가는 생전에 빛을 보는 경우가 매우 적다. 고흐도 그랬고 모딜리아니도 그러했으며 오래전 페르메이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삶이 밤하늘 속 별 하나만 보며 달려가야 했던 아득한 시간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 미술 옥션 사상 최대 금액을 달성하고 그의 걸작들이 마치 누군가의 비자금으로 비하되는 현실 속에서 ‘김환기’에 대한 진짜 이야기 10가지를 정리해봤다. 앞으로는 그 아름다운 작품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1.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처음으로 100억 원대를 돌파한 작품은 김환기의 <우주>다

김환기_우주Universe 5-IV-71 #200, 코튼에 유채, 254 x 254cm, 1971
김환기_우주Universe 5-IV-71 #200, 코튼에 유채, 254 x 254cm, 1971 ⓒⓒ(재)환기재단 ∙ 환기미술관

지난 11월 23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초로 100억 원대를 돌파했다. 김환기(1913~1974)의 대작 <우주>(원제:05-IV-71 #200)가 그 주인공이다. 정확한 낙찰 액수는 8,800만 홍콩달러, 한화로 약 132억 원에 달한다. 사실 그의 기록은 이미 예견돼 있던 바였다. 국내 미술품 경매가 상위 10순위 중 9위의 이중섭 <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김환기 작가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시장에 나오기만 하면 새로운 기록을 경신하고 있으며, 김환기가 김환기를 뛰어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2. <우주>는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김마태 씨가 무려 47년간 간직했던 작품이었다

김마태 박사의 자택에서 김환기 화백의 모습, 그 뒤로 '우주'가 걸려 있다. 1972
김마태 박사의 자택에서 김환기 화백의 모습, 그 뒤로 '우주'가 걸려 있다. 1972 ⓒⓒ(재)환기재단 ∙ 환기미술관

1971년, 미국 뉴욕에서 그려졌다. 푸른색 전면 점화인 <우주>는 그의 작품 가운데 유일한 두폭화이자 가장 큰 추상화로 높이만 2m 54cm에 달한다. 마스터 피스라 평가받는 이 작품은 이른바 뉴욕시대로 일컬어지는 그의 최전성기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후원자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의사 김마태 씨 부부는 1972년 9월 뉴욕 <포인덱스터> 화랑에서 열렸던 제20회 개인전에서 <우주>를 구입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김마태 씨 부부가 소장했으니 경매 출품도 이번이 처음이다.

 

#3. 그의 작품은 1960년대까지 잘 팔리지 않았다

작품이 약 50년 만에 처음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김마태 씨는 1951년 부산 피난 시절에 환기를 만나 작가가 어려웠던 때부터 죽음 직전까지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은인이자 친구였고, 주치의였다. 사실, 1960년대까지 김환기의 작품은 잘 팔리지 않았다. 잡지의 표지나 삽화로 그렸던 그림도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편집자가 그림을 거꾸로 싣는 경우도 있었으며, 환기는 ‘하찮은 것이지만 그 화고를 간직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었다. 그렇기에 환기의 벗은 <우주>가 세상에 제대로 인정받을 순간을 2019년, 오늘날까지 기다려왔다. 이번 출품도 “미술 시장 내에서 김환기에게 걸맞은 자리를 찾아주기 위해서”라고 알려졌다. 40대 중반에 친구를 떠나보냈던 김마태 씨는 올해로 91세다. 

“나는 그림을 팔지 않기로 했다. 팔리지가 않으니까 안 팔기로 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안 팔기로 작정했다. 두어 폭 팔아서 구라파 여행을 3년은 할 수 있다든지 한 폭 팔아서 그 흔해 빠진 고급 차와 바꿀 수 있다든지 하면야 나도 먹고사는 사람인지라 팔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내 그림에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인사가 있기를 바라겠는가.”_1955.3

 

#4. 환기를 프랑스로 이끈 건 그의 아내 향안이었다

김환기는 1913년 2월 27일 전라남도 신안군 가좌도(현 안좌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중고등학교는 서울, 대학과 대학원은 일본에서 수료했으며, 프랑스 유학 후 미국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국 생활은 자연스럽게 삶을 변화시켰으며, 일본과 프랑스, 미국 시기를 기점으로 작품을 구분할 정도가 된다. 지주의 아들이었던 작가가 일본 유학을 떠났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 모르나, 그의 프랑스 행은 선택이었고 그의 아내 김향안의 지지로 성사되었다.

파리 거리를 걷고 있는 김환기(왼쪽)와 김향안(오른쪽), 1957
파리 거리를 걷고 있는 김환기(왼쪽)와 김향안(오른쪽), 1957 ⓒⓒ(재)환기재단 ∙ 환기미술관

김향안 여사는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남다른 문학적 재능으로 수필가로 활약한다. 그러던 중 1955년 김환기와 가족을 서울에 두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파리 소르본과 에쿨 뒤 루브르에서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공부한다. 김환기는 평소 장거리 여행을 좋아하지 않아 고향에도 못 갔다고 스스로 밝혔는데, 그런 그를 1956년, 프랑스로 이끈 것이 바로 김향안이었다. 새로운 것을 보고 그리는 것이 환기에게 도움이 될 것임을 직감했던 것이다.

 

#5. 시인 정지용과 길진섭의 사회로 결혼식을 올렸다

두루마기를 입은 김환기(왼쪽)와 드레스를 입은 김향안(오른쪽). 결혼식, 1944
두루마기를 입은 김환기(왼쪽)와 드레스를 입은 김향안(오른쪽). 결혼식, 1944 ⓒⓒ(재)환기재단 ∙ 환기미술관

김환기와 김향안은 1944년 5월 1일 결혼식을 올린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선생이 주례를 보고, 시인 정지용과 화가 길진섭이 사회를 봤다고 한다. 신접살림은 성북동에 마련하고 김환기의 홀어머님과 아이들을 가좌도에서 데려왔다고 돼 있다. 결혼 후 홀로 유학이라는 과감한 결단까지 했던 그녀였으나 화가의 아내로서 집안을 건사했으며, 자신의 재능보다는 환기의 미술을 돕는 조력자로서의 삶을 택한다. 1978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공익재단인 ‘환기재단’을 설립했으며, ‘환기 미술관’을 지은 것도 김향안 여사였다.

 

#6. 그는 프랑스 유학 당시 전람회 구경을 가지 않았다

“나는 동양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한다 해도 내 이상의 것은 할 수가 없다.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이요, 한국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이기에는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김환기는 사상계에 유학생으로서의 속마음을 남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개인전을 열기 전까지는 영향을 받을 것 같아 전람회도 안 갔다는 그의 고백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 흔히들 외국에 나가보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프랑스, 그것도 세계 예술계의 한 가운데서 경험했던 문화적 충격은 반대로 한국의 미를 중시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생 루이섬의 아틀리에에서 김환기 화백의 모습, 그 뒤로 '새와 항아리, 1957' 작품이 보인다.
생 루이섬의 아틀리에에서 김환기 화백의 모습, 그 뒤로 '새와 항아리, 1957' 작품이 보인다. ⓒⓒ(재)환기재단 ∙ 환기미술관

“내 뜰에는 한 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다. (중략) 칠야삼경에도 뜰에 나서면 허연 항아리가 엄연하여 마음이 든든하고 더욱이 달밤일 때면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으로 인해 온통 내 뜰에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기도 하다.”_ 1955. 5

 

#7. 그를 사로잡았던 건 ‘우리의 정서’였다

김환기_영원한 노래, 캔버스에 유채, 162 x 130cm, 1957
김환기_영원한 노래, 캔버스에 유채, 162 x 130cm, 1957 ⓒⓒ(재)환기재단 ∙ 환기미술관

김환기는 유독 ‘백자’를 좋아했다. 일본 유학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백자를 구입했으며, 그의 집을 일컬어 ‘항아리 집’이라 불렀다. 스스로 자신의 청춘기는 항아리 열(熱)에 바쳤다고 말했을 만큼 백자에 빠졌었다. 이와 같은 취향은 그의 그림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항아리와 도자기들은 젊은 시절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던 소재였다. 식민지 청년의 삶은 우리 것에 대한 애착으로 발현되었으며, 가좌도 섬에 머물며 자연 소재로 자주 그림을 그리게 됐다.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그때 보았던 섬과 달, 산, 새 등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 많던 시기였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도 꾸준히 한국적인 소재로 그림을 그렸으며, 십장생을 김환기 풍으로 그려내 한국의 멋을 세계에 알리며 인정받기 시작한다.

 

#8. 우리나라 최고 미술대학 교수직을 50세에 내놓는다

그는 우리나라 최고 미술대학 두 곳의 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우리나라 대학에 미술과가 개설된 것은 1945년 광복 이후였다. 1940년 초부터 광복 전까지 이어진 한국 미술의 침체기를 벗어나 1946년 서울대학교를 시작으로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1949년 홍익대학교에 미술학과가 설립된다. 김환기는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과 교수로 1948년까지 재직했으며, 한국 전쟁 중에는 부산에서 홍익대학교 교수로 일한다. 이후 잠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던 김환기는 1959년 귀국해 1962년까지 다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의 학장으로 일하며, 한국미술협회의 이사장까지 역임한다. 하지만 그의 나이 50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국 ‘뉴욕’으로 떠나기를 희망한다. 안온한 삶을 살 수도 있었으며, 적어도 생활비를 걱정할 필요 없는 삶에서 또 다른 도전을 선택한 것이다.

 

#9. 뉴욕 시대에 완성되다

1963년 뉴욕에 도착한 이후 그의 회화 양식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1960년대 초반에는 이전처럼 산과 달 등을 직접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다가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산과 달이 기호화되는 모양새를 띈다. 이후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에는 점을 반복적으로 찍어가는 ‘점묘’가 중심이 된다. 이때를 김환기 화백의 ‘뉴욕 시대’라 부르며, 그림의 절정기로 평가한다.

김환기_1-Ⅷ-1967,캔버스에 유채, 177 x 127cm, 1967
김환기_1-Ⅷ-1967,캔버스에 유채, 177 x 127cm, 1967 ⓒⓒ(재)환기재단 ∙ 환기미술관

환기 블루라 일컬어지는 파랑을 중심으로 노랑, 빨강, 검정까지 강렬한 색채의 점들이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점들은 선이 되고 선은 굽이굽이 물결치기도 하고 직선이 되기도 하며 동그랗게 표현되기도 했다. 마치 푸른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섬, 산의 언덕, 별과 구름 등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은 그가 가진 ‘우리 정서에 대한 관심이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테두리 안에 무수한 점들을 반복해서 찍는 특유의 ‘점화’는 뉴욕 시대 수많은 추상화 실험의 궁극적 귀결이었으며, 당시 50~60세의 화백이 예술과 꿈을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열정 속에 탄생했다. 30대의 김환기 화백이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데 수개월에서 1년까지 걸렸다는 일화로 미뤄보았을 때 그림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0.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_16-IV-70 #166, 코튼에 유채, 236x172cm,1970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연작)
김환기_16-IV-70 #166, 코튼에 유채, 236x172cm,1970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연작) ⓒⓒ(재)환기재단 ∙ 환기미술관

서울을 떠난 지 7년째 되던 1970년, 김환기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으로 ‘한국일보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한다. 그는 같은 해 2월, 한국일보사로부터 출품 의뢰를 받자마자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떠올렸다. 오래전부터 늘 맘속으로 노래했던 시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시화(詩畵) 대작을 제작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한 작품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냐라>였다. 작품의 제목도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화면을 가득 채운 점들이 무명천에 스며들 듯 엷게 번지며 신비감을 더하는 이 작품은 시와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느낌을 자아낸다. 시 내용처럼 하늘에 흩뿌려진 별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며, 어둠 속에서 밝음이 보이고, 동시에 깊이감이 느껴진다. ‘내가 그리는 선(善),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點),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江山)’. 그의 그림이 이토록 사랑받고 있는 것은 어쩌면 김환기 화백의 고백처럼, 우리 모두가 보고픈 이상적인 하늘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환기미술관

김환기 화백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미술관으로 아내인 김향안 여사가 1993년 설립하였으며, 개인이 사비로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관이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40길 63 

개관 오전 10시~ 오후 6시 

홈페이지  환기미술관(클릭)

* 참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환기미술관, 2005) 

          <월하의 마음>, 김향안, (환기미술관, 2005)

          <김환기_자연을 노래한 조형시인>, 윤난지, (재원, 2009)

          <김환기>, 임창섭, (나무숲,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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