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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성과 결혼해 아기를 낳은 나에게 벌어진 일

한국식 '산후 몸조리'에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어머니는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2008년 시어머니, 시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2008년 시어머니, 시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COURTESY OF KENDRA STANTON LEE

남편 존이 어머니에게 공항에서 우리 집까지 택시로 오는 법을 설명하는 게 들렸다. Mother를 한국어로는 ‘어머니’(Ummoni)라고 한다고 했다. 나는 시어머니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시어머니를 만나는 건 좋았지만, 나는 태어난 지 2주밖에 안 되는 아기를 가진 엄마였다. 갓 태어난 딸을 껴안고 독차지하고 싶었다. 다행히 나는 모유 수유를 했고 딸은 젖을 자주 먹었기 때문에, 나는 작은 아기 방에서 몇 시간이고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존은 어머니가 내 젖이 잘 나오는지 확인하고 싶고, 내 가슴에 마사지를 해주려 한다고 했다.

몇 년 뒤에야 나는 시어머니의 나라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아이 출생 후 21일을 삼칠일이라고 부르며 챙기는 ‘산후 몸조리’의 전통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선을 지킬 줄 모르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마사지는 산모를 돌보는 적절한 의식이었다.

퓨 리서치 센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존과 나는 다른 인종이나 민족끼리 결혼한 1100만명의 미국인들에 속한다. 1980년에 내가 태어난 후, 다른 인종으로 이루어진 커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수는 세 배로 늘었다. 이중 14%는 내 딸처럼 백인과 아시아인 사이의 아이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병원에서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만 해도 문화적 차이가 크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비교적 드물다.

나는 시부모의 첫 손주를 임신하기 몇 년 전부터 그들을 알고 지냈다. 하지만 임신에 대한, 특히 산후 몸조리에 대한 그들의 생소한 문화적 태도와 의견을 받아들일 준비는 잘 되어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나는 딸을 낳기 위해 응급 제왕절개를 했다. 혈액 응고를 막기 위해 의사는 매일 밖에서 산책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시부모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국 엄마들은 아이가 100일이 될 때까지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내가 감기가 들어 아기에게 옮기면 어쩌냐고 걱정했다. 

 

미역국, 미역국, 그리고 또 미역국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밥과 미역국을 주었다. 모유 생산에 좋다고 하는 미역국과 출산 후 21일간의 꼼꼼한 산모 돌봄은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한국 전통인 삼칠일의 일부였다. 하지만 미역국은 몸속을 쏴악 씻어내리는 듯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몸 안에 수분이 가득했으니 정말 불편한 기분이었다. 나는 고분고분히 녹색 국물을 마시고 아기와 방안으로 숨어들었다. 

난 처음으로 엄마가 되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 우리는 모두 육아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고 있었고, 거기엔 모국어나 문화와는 무관하게 엄청난 감정이 따라오는 법이다. 

미국 카운슬링 협회가 낸 다문화 가정이 겪는 스트레스 요인에 대한 기사에 따르면, 자신이 아웃사이더라는 걸 느낄 수 있는 컬쳐 쇼크와 같은 문화적 불협화음이 있으면 좋을 수도 있다고 한다. 여행자가 충격을 경험하듯, 다문화 커플도 이를 경험하지만 “이 경험들은 가까운 파트너의 문화에 대한 반응이다”. 나는 내 집에 있으면서도 컬쳐 쇼크를 겪고 있었다. 대부분의 충격이 그렇듯, 혼란스러웠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상황을 좀 더 침착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반감이 두려워서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내 몸에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는 게 힘든 산후 회복기를 넘기는 데 도움이 됐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순발력 있는 상황 대처가 필요했다.  

오른쪽은 시아버지다. 
오른쪽은 시아버지다.  ⓒCOURTESY OF KENDRA STANTON LEE

남편은 낮에 직장에 있으니 시부모와 나 사이에서 통역을 해주거나 둘 사이를 중재할 수 없었다. 내가 TV를 켤 때마다 어머니는 아기를 데리고 화면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피했다. 비난받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는 TV가 아기의 뇌를 해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내가 매일 산책해야 한다는 건 의사의 명령이라고 마침내 시부모를 설득했던 걸 기억했다.

처음으로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 때, 나는 곧장 빵집에 가서 가장 큰 컵케이크를 샀다. 내 일상의 선택에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시부모 역시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익숙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우리 모두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었다. 우리는 부모의 영역, 조부모의 영역에 들어가는 길을 참을성 있게 걸어갔다. (그리고 나는 가능할 때면 언제나 컵케이크를 먹고 ‘엘렌쇼’를 보았다.)

 

어머니는 떠났지만, 미역국은 남았다 

어머니는 떠나는 날 아침에 거실에서 내 딸을 안고 얼렀다. 어머니는 내게 ‘갓 태어난 존(남편)을 돌보던 때에 했던 기도를 기억한다’고 말했다. 먼 곳을 보며 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신에게 내 아들을 돌봐달라고 기도했다. 삶은 정말 힘들었다. 우린 정말 힘든 시절을 겪었다. 하지만 내 아들은 한번도 다치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고 병원도 가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말하는 동안 그가 얼마나 가족을 위해 자기 자신을 쏟아붓고 있는지 깨달았다. 내 남편이 지금 내 딸 나이였을 때부터, 어머니는 아주 오랫동안 몸과 마음을 희생해 왔다. 그리고 지금은 나와 새로 생긴 손녀를 위해 스스로를 쏟아내고 있었다.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렸지만 나는 막으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가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산부인과 병동 전체가 먹어도 될 만큼의 미역국을 남겨두고 갔다.

* 허프포스트 US의 을 번역,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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