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스타일
2019년 11월 21일 11시 27분 KST

심각한 신경 질환을 앓는 나의 연애사

내 증상은 빈도는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Jacqueline Alnes
필자

최근 길었던 연애가 끝나고 난 뒤의 첫 번째 데이트를 준비하다가 불안해졌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그러리라 생각한다. 완벽한 옷을 찾으며 침실 바닥에 옷들을 여기저기 내던졌다. 데이트 상대가 현실에서도 온라인에서처럼 이야기하기 편한 사람일까 궁금했다. 진 스커트와 검은 티셔츠를 입고 베리색 밤을 입술에 바른 나는 흥분을 느꼈지만, 더 깊은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새로운 사람과 있다가 신경 질환 증상이 도지면 어쩌지?

처음 겪었을 때 나는 18세였고 NCAA 디비전 I 크로스 컨트리 대학 선수였다. 내 몸을 움직이는 방식을 완벽하게 통제하는데 익숙했다. 키가 180센티미터인 나는 워크아웃 중에 스프리츠 기록도 빨랐고 매주 장거리를 뛸 때도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강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기숙사 방에서 기절했다. 불과 이틀 뒤 실내 트랙 훈련 중에 또 기절했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현기증이 몇 주 동안 이어졌다. 의사들은 전정 신경염이라는 일시적 증상이며 한 달 정도 지나면 없어질 거라고 했지만, 내 증상은 점점 더 이상해져갔다.

어느 날 밤 룸메이트가 내게 뭔가를 물었을 때 나는 내가 하려던 대답을 하지 못하고 내 이름만 반복하기 시작했다. “야, 재키, 야, 재키, 재키, 재키.” 그뒤 몇 주간 증상이 찾아오면 내가 말하는데 영향이 있어서 아주 무서웠다. 시야가 흐려지고 팔다리를 통제할 수 없고 실어증(단어 반복)을 경험한 데다가, 증상이 왔을 때의 일을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 증상은 아무데서나 찾아왔다. 도미토리 책상 앞에 안전하게 앉아 숙제를 하고 있을 때도, 교실 앞으로 나가 내 건강이 나빠지는 걸 모르는 또래들 앞에 서있을 때도, 코치가 시도해보라고 우겨서 달리던 도중에도 증상을 경험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여기가 어딘지, 증상이 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곧 다시 건강해질 거라는 의사들의 말을 믿고 먼 곳에 살고 있는 가족에게 난 괜찮다고 거짓말을 했다. 가족들의 도움을 구하는 대신 팀 동료들과 당시 남자친구의 친절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들은 내 다리에 힘이 빠지면 나를 기숙사 침대로 데려다 주었고, 병원에 갈 때 운전을 해주었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은 트랙이고 곧 돌아올 거라고 장담했다.

 

″내가 힘이 없을 때, 동어 반복으로 정상적 기능을 못할 때, 혼자 힘으로 걷지 못하고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할 때 팀 동료들과 당시 남자친구는 내게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돌봄이 언제부턴가 잔인해졌다. 내가 힘이 없을 때, 동어 반복으로 정상적 기능을 못할 때, 혼자 힘으로 걷지 못하고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할 때 팀 동료들과 당시 남자친구는 내게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가끔은 거미들이 내 등으로 기어오른다고 말해서 내가 셔츠를 벗게 만들기도 하고, 내 개가 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룸메이트가 나중에 말해준 바로는 그 말을 듣고 내가 울었다고 한다. 이전에는 심각하게 아파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들이 나를 그렇게 다뤄도 된다고 생각했다. 내 증상이 짐이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증상이 사라지지 않아 스포츠를 할 수 없어 그 해에 팀에서 나왔다. 그와 함께 팀 동료들과의 우정, 디비전 I 선수라는 정체성, 대학생 남자친구와의 관계, 몇 년 동안 힘겹게 얻은 근육들이 모두 사라져갔다. 달리기가 없으니 나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다시 구상해야 했다. 팀 동료들이 없으니 나는 만성질병이라는 새로운 지형을 헤쳐 나가야 했다. 내 증상을 누구에게 털어놓을까? 증상이 찾아오면 학교에서 집으로 어떻게 돌아오지? 감정적 고통을 주지 않고 나를 돌봐줄 거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있긴 할까?

첫 발발 이후 몇 년 동안 신경학자들이 면밀히 모니터한 결과, 내 증상은 빈도는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신경학자들은 내 증상을 발작장애, 편두통 변종, 일시적 의식변화로 분류했다. 증상이 일어날 때 다른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다면 또다시 이용당할 거라는 두려움이 아직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데이트를 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나는 수업을 들으러 가거나 신뢰하는 친구들을 만날 때가 아니면 주로 집안에만 있었다. 나는 연인이 없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내 자신에게 어찌나 여러 번 말했는지, 나 스스로 그렇게 믿게 되었다. 현실적으로는 나는 누군가가 육체적 또는 감정적으로 내게 상처를 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는 게 무서웠다.

4년 전에 박사 과정에 들어가느라 오클라호마로 옮기고 난 뒤 달라지기 시작했다. 수업 후에 다른 대학원생과 함께 차고까지 걸어가는 일이 많았다. 우리는 아웃도어를 좋아하고, 자라면서 이사를 많이 다녔고, 책에 빠져 있다는 우리의 공통점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와 있을 때면 다른 남성들과 있을 때처럼 가슴이 답답해지지 않았다.

어느 주말에 우리는 같이 하이킹을 가게 되었다. 이것이 편안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오후 내내 그의 아파트에서 보드 게임을 하고, 저녁 식사를 요리하고, 그의 고양이가 장난감을 쫓아 무턱대고 몸을 날리는 걸 보며 웃는 사랑이었다. 그와 있으니 평생 처음으로 내 증상을 밝히고 싶어졌다. 나는 어느 날 오클라호마의 햇볕을 받으며 차고로 가는 길에 그에게 내 증상에 대해 말했다.

 

″나는 연인이 없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내 자신에게 어찌나 여러 번 말했는지, 나 스스로 그렇게 믿게 되었다. 현실적으로는 나는 누군가가 육체적 또는 감정적으로 내게 상처를 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는 게 무서웠다.”

 

내가 언제라도 말을 잘하고 명랑한 상태에서 갑자기 공허한 눈을 한 채 한 문장도 말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고 털어놓은 다음 “너 무섭니?”라고 물었다. 여러 해 전에 상처를 받았던 내 마음의 한 부분은 그가 그 순간 나를 떠나길 원했다. 그러나 너무나 오랫동안 억누르려 했던 내 마음속 보다 부드러운 부분은 그가 무얼 두려워하든간에 나를 사랑하길 바랐다.

“전혀.” 그 순간 나는 그의 녹색 눈에 떠오른 나를 아끼는 마음을 믿고 싶었지만 믿지 않았다. 내 옛 팀 동료들은 돌봄이 순식간에 해침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주었다.

그렇지만 그뒤로 며칠 지나지 않아 소파에서 남자친구 옆에 웅크리고 있다가 TV가 흐려지며 초점이 맞지 않았고, “몸이 안 좋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입은 소리없이 열렸다 닫혔다만 반복했다. 언어 능력을 잃은 것이다.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잠시 후 소파에서 깼을 때 그는 내 옆의 바닥에 앉아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동의를 받고 손가락으로 이마를 만져준 다음 물을 한 잔 가져다 주었다. 내가 괜찮을 거라고 확신이 들자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함께 지낸 첫 한 해 동안 증상이 찾아오면 나는 그에게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건강 문제가 없는 여자친구를 구하라고 쏘아붙이곤 했다. 정신이 없는 상태의 나를 보고서도 그가 나를 진정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의 돌봄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내 몸의 결함에 대한 분노, 나는 같이 있기에 즐겁기보다는 짐이 되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나는 시간, 상담, 내 남자친구의 꾸준하고 참을성있는 애정을 거쳐 부드러워질 수 있었다. 그와 사귀면서 사랑을 주는 법, 그에게서 사랑을 받는 법, 그리고 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의 돌봄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내 몸의 결함에 대한 분노, 나는 같이 있기에 즐겁기보다는 짐이 되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그와 사귀는 동안 내가 원하는 것을 잘 요구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밤 저녁 식사를 준비했고, 작은 수채화 사랑의 쪽지를 그리고, 국립공원 여행 계획을 짜고, 남자친구의 고양이를 내 고양이처럼 돌보는 등 우리 관계에 여러 가지로 기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증상 때문에 난 그 사실을 직시하길 거부했다. 내 남자친구가 감당하기에 내가 ‘지나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만 했다. 꽃을 주거나 데이트 계획을 짜면 내가 정말 행복할 거라고 말했는데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을 때, 나는 나랑 사귀는 게 다른 여성을 만나는 것보다 에너지 소모가 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가 이미 주고 있는 것 이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했던 마지막 해에 남자친구는 첫 직장을 얻어 160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사했고 나는 학위를 마치느라 오클라호마에 남았다. 그때 나의 자아 존중감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진정 욕구하는 것을 표현하기보다는 그에게 무엇이 제일 편할까, 를 위주로 생각한 것이 내가 느낀 아쉬움의 주원인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고 그가 나를 돌봐준 것이 고마웠고 지금도 고맙지만, 또한 나는 더 많은 것을 얻을 자격도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관계를 정리했다. 나는 우리가 함께 살려고 했던, 1600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집으로 옮겼다. 증상이 찾아온 후에 내 이마를 눌러주면 통증이 완화된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자면서 회복할 수 있도록 침대에 데려다줄 사람이 없는 곳에 왔더니 오래된 공포가 다시 찾아왔다. 밖에서 걸어가다가 내가 쓰러졌는데 누가 나를 이용하면 어쩌지? 데이트 중에 터무니없는 말을 계속 반복하면 어쩌지?

 

″나는 지금도 데이트를 하고 있다. 약점을 안고 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내가 가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믿으며.”

 

몇 년 전처럼 공포에 굴복하지 않았다. 혼자서 결별 후 첫 데이트에 갔다. 주차장은 아주 더웠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몇 년에 걸쳐 배운 자기애로 자신감을 느꼈다. 데이트 장소에 나갔다는 것, 내 자신을 믿고 새로운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이제는 내 신경 질환이 나를 규정하게 하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기쁨을 느끼려 했다. 그 날의 데이트 상대와 그뒤로 오래 만나지는 않았지만, 테이블에 앉았을 때 상대는 따뜻하고 친절했다.

그 첫 데이트 이후, 나는 언제 어떻게 내 병을 밝힐지에 대한 힘을 얻었다고 느꼈다. 안전을 지키기 위해 내가 누구를 만나는지, 어디에 있을지를 친구들에게 말하는 등의 예방 조치를 하지만, 타인과의 만남에 있어 개방적이다. 여러 남성들이 저녁 예약을 했고, 근처 개울에서 먹을 시원한 수박을 가져왔고, 내 부엌에서 있는 재료를 이용해 저녁을 만들어주었다. 해변에 여행을 갔다 돌아오며 쿠키를 가져다 준 사람도 있었는데, 쿠키를 보니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최근에는 증상이 찾아오면 나를 어떻게 돌봐주는 것이 제일 좋겠냐고 물은 사람이 있었다. 그에 대한 신뢰가 충분했기에 그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나는 그와 있을 때는 안전한 기분이 든다. 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이후 다시는 그런 사람을 찾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이번 계절 동안 내가 만난 남성들은 가벼운 사이였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기꺼이 먼저 계획을 짜고 사려깊게 행동했다. 내가 믿고 싶었던 진실을 확인받은 경험이었다. 병이 있든 없든 나는 돌봄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 나는 지금도 데이트를 하고 있다. 약점을 안고 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내가 가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믿으며.

 

* HuffPost US의 This Is What Dating With Serious Neurological Symptoms Is Like For Me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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