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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년전 일본에서 납치되어 평양으로 향하던 비행기를 한국에 착륙시킨 관제사

”여기는 평양”

  • 박세회
  • 입력 2019.11.20 16:42
  • 수정 2020.01.02 10:01
1970년 4월3일 요도호 납치사건 범인들이 평양으로 향하기 전 서울 김포공항에서 승객들을 풀어주고 있는 모습.
1970년 4월3일 요도호 납치사건 범인들이 평양으로 향하기 전 서울 김포공항에서 승객들을 풀어주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약 49년전, 1970년 3월 31일 일본의 하네다 공항(도쿄)에서 이타즈케 공항(현재의 후쿠오카)으로 향하던 일본항공(JAL)의 351편 여객기가 일본의 적군파 요원 9명에게 납치됐다. 승객은 129명. 당시 351편의 기종은 보잉 B727 편으로 일본항공은 일본의 강 이름을 따 이 비행기를 ‘요도호‘라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후 이 사건에 붙여진 이름이 ‘요도호 납치 사건’이다.

당시 이 비행기를 납치한 일본 적군파는 1970년대에 활동한 일본의 공산주의 테러 단체로, 이 비행기를 몰고 북한으로 망명할 예정이었다. 일본도 등의 무기를 들고 남성 승객들을 로프로 묶고 조종실을 점령하고 기장과 부기장을 협박했다. 이들이 지시한 목적지는 북한의 수도 평양이다. 그런데 이 비행기는 결국 김포공항에 내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일 니시니혼신문이 인터뷰한 전 공군 관제사 채희석(현 78세, 사건 당시 28세) 씨는 그 내막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다. 그가 이 비행기의 납치범들을 속여 김포공항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채씨는 사건 당일 오후 12시 30분께 ”각하의 지시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요도호를 김포에 착륙시켜라”라는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계원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의 ‘각하’라 하면 오로지 단 한 명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말한다.

같은 시간 급유차 이타즈케 공항에 내린 351편 항공기는 이륙을 조건으로 오후 1시가 넘어 여성과 어린이, 고령자를 포함한 23명을 풀어주고 평양으로 향했다. 납치된 비행기를 관제로 다시 납치하는 것. 이것이 각하가 28세의 채 씨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당시 요도호는 강원도 상공을 지나던 중 북한의 영토에 들어왔다고 판단해 국제 조난용 주파수인 121.5 메가사이클(지금의 메가헤르츠)에 맞추고 ”여기는 JAL 351편”이라는 교신을 보냈다. 월간조선의 2003년 채씨 인터뷰에는 더 자세한 상황이 적혀 있다. 채씨는 당시 요도호 기장이 “Any station, any staion, this is JAL 8315”(어디든, 어디든 응답하라. 여기는 일본항공 8315편)라고 말하는 것을 감청했다고 밝혔다.

해당 주파수는 북한과 한국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조난용 주파수. 이 교신을 들은 채 씨는 ”통신주파수를 134.1㎒로 맞추어 바꾸라”고 답했다. 이 한 수가 주요했다. 134.1㎒는 김포 공항의 전용 주파수. 이 주파수 변환으로 북한은 이후의 교신을 감청하지 못했다.

니시니혼신문에 따르면 채씨는 여기서 일생일대의 연기를 한다. ”여기는 평양”. 김포 공항의 관제탑에서 평양의 관제사를 연기했다. 문제는 항로가 변경되는 걸 조종사는 알아도 납치범은 모르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니시니혼과의 인터뷰에서 채 씨는 이 판단이 자신의 판단이었다며 중앙정보부의 부장이 ”요도호를 착륙시킬 수 있다면 서울을 북한이라고 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한편 당시 이 비행기를 조종하던 일본인 부기장 에자키 데이이치(현재 82세, 당시 32세)는 의아함을 느꼈다. 주파수를 평양으로 바꿨다고 생각했는데, 같은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니시니혼의 취재에 따르면 에자키 씨는 ”평양으로 무선이 바뀌었을 텐데 목소리가 비슷한 점 등 부자연스러운 점이 많았다”라며 ”서울로 유도되고 있다고 느꼈지만, 옆에 무장한 사람들이 서 있는 상황이라 관제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라고 밝혔다. 당시 기장과 부기장도 관제의 상대방이 김포에 있는 한국 공군 관제사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 흥미롭다. 

채 씨는 요도호의 항로를 조금씩 조금씩 김포가 있는 곳, 즉 남쪽으로 돌렸다. 급선회하면 납치범들이 항로의 변경을 눈치채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패하면 죽는다”. 채씨가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당시의 심정이다. 결국 오후 3시께 요도호는 납치 약 8시간 만에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채씨가 니시니혼신문에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엄청난 작전을 수행한 이후 그의 인생은 순탄하지 못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공군에 들어간 채씨는 영어가 유창해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이였다. 그는 미국 연방항공청의 항공교통관제사 면허를 가진 당시의 몇 안 되는 한국인이었다. 그러나 요도호 사건에서 자신의 역할은 비밀에 부쳐졌고, 2년 후에는 반강제적으로 군복을 벗어야 했다. 10년을 술에 빠져 아내의 벌이로 생활했으며 사건 20년 후에야 사정을 들은 유엔군 사령부 고위 관리의 도움으로 이 사령부가 관리하는 비무장지대에서 기념품 가게를 하며 안정을 찾았다.

한편 당시 요도호는 김포에 착륙 후 약 79시간을 한국 정부와 대치했다. 그들이 착륙한 곳이 평양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려는 한국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납치범들은 그곳이 김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을 속이기 위해 국외 항공사와 국적기를 활주로에서 치우고 브랜드가 붙은 자동차를 페인트로 도색하고 인공기를 제작해 부착하는 등의 노력을 들였다. 결국 납치범들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인질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평양행을 약속받는다. 납치범들은 4월 3일 인질 99명을 석방하고 야마무라 신지로 운수성 정무 차관 등을 마지막 인질로 잡아 북한을 향했다. 이후 항공기와 승무원 그리고 인질은 모두 일본으로 반환됐다.

박세회 sehoi.park@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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