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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보다 먼저 김지영의 삶을 산 경력단절 여성 3명이 전한 이야기

떠난 일터에 다시 돌아갈 기회는 결국 오지 않았다.

왼쪽부터 이현숙(45), 이명옥(50), 최선주(가명·54)씨 
왼쪽부터 이현숙(45), 이명옥(50), 최선주(가명·54)씨  ⓒ한겨레

이명옥(50)씨는 1997년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았다. 남편, 두 아들과 함께 경기도 의정부에 산다. 결혼할 때 대기업 건설회사 평사원이던 남편은 그 회사 차장이 됐다. 명옥씨는 서울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탄탄한 독일계 무역회사에 입사했으나, 결혼과 동시에 퇴사했다.

다시 돌아갈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지방 발령을 받는 일이 잦아 결혼생활 중 8년간 주말부부로 살았다. 명옥씨가 도맡아 아이들을 키웠다. 아이들이 자란 뒤엔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 상담원 등 여러 비정규직 일자리를 맴돌다, 지금은 한 초등학교에서 월 90만원을 받으며 초등보육전담사로 일한다. 22년 전 떠난 일터에 다시 돌아갈 기회는 결국 오지 않았다.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의 현실을 비춘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폭넓은 공감을 얻으며 개봉 20일만인 13일 누적관객 320만명을 넘겼다. 영화 속에서 30대 여성 ‘김지영’은 복직 시도에 실패한 뒤 잡지에 글을 기고하며 적성을 살리지만 결국 회사로 돌아가진 못했다. 일터를 떠난 김지영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김지영보다 조금 먼저 결혼과 출산, 퇴사와 구직의 과정을 밟아온 경력단절여성들은 답을 알고 있을까. <한겨레>는 지난 6일 김지영보다 먼저 김지영의 삶을 산 경력단절여성 3명을 만나 이들의 삶의 궤적을 돌아봤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다 결혼으로 경력이 끊겨 비정규직 일자리들을 거쳐온 명옥씨,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며 학원강사로 일하다 결혼·출산 뒤 대형마트 수산물 코너에서 일하게 된 이현숙(45)씨, 학교 행정직으로 근무하다가 지금은 유치원돌봄전담사가 된 최선주(54·가명)씨다.

ⓒ82년생 김지영

영화 속에서 김지영은 국문학을 전공했고, 다른 아이들의 엄마들도 공대를 나오거나 연기를 전공했지만 출산 뒤엔 별 의미가 없다. 그저 ‘애 엄마’다. 세 사람이 겪어온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명옥씨가 말했다. “영화를 보고 우리 세대나 김지영 세대나 경력단절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알았죠. 출산하고 나면 학력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냥 애 안고 엎고 기저귀 가방 매고 다니면 다 똑같아져요.”

마트에서 일하는 현숙씨도 공감했다. “영화 속 김지영의 삶을 보면서 ‘폭풍공감’을 했어요. 얼마 전 마트에서 ‘까대기’(마트 매대에 상품을 채워넣는 작업)를 하는데 한 언니가 ‘나 사실 이대 나왔다’고 말해 주변 사람들이 다 웃었다어요. 그전까지 어떤 삶을 살았든 결혼·출산 이후엔 ‘바코드’가 똑같아진다니까요.”

우리 사회가 출산한 기혼여성을 그의 경력과 무관하게 그저 ‘애 낳은 아줌마’로만 호명한다는 뜻이다.

아이를 낳은 뒤, 복직은 물론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는 것조차 여성들에겐 아득한 일이었다. 경력단절여성에게 열린 직업은 대부분 단시간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이었다. 그나마 처우가 좋은 무기계약직 일자리는 자격증을 따고 경력을 쌓은 뒤에야 얻을 수 있었다.

“우린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택할 수밖에 없었어요. 생활비를 벌어야 해서 사람을 구한다는 집 근처 마트에 갔고 그곳이 내 직장이 됐네요.” 외교관이 꿈이었다는 현숙씨가 말했다. 

ⓒ82년생 김지영

교사가 꿈이었던 선주씨는 아이들이 자란 뒤 방송대 유아교육과를 진학해 유치원 정교사 2급, 보육교사 1급 자격증을 땄지만 정규직 일자리에 진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간신히 얻어낸 일자리를 정당한 노동보단 ‘용돈벌이’쯤으로 여기는 주변의 시선도 이들에겐 상처고 걸림돌이었다. “제가 일하는 마트에는 저를 포함해서 경제생활을 독립적으로 꾸려가는 여성 노동자가 많은데, 사회는 우리를 보조배터리 정도로 취급해요. 집에서 애 보다가 돈이 필요하면 나가서 벌어오는 수준으로 생각하거든요.”

현숙씨가 아쉬움을 토로하자 명옥씨도 “언젠가 아들이 부모님을 소개하면서 ‘아빠는 회사 다니시고 엄마는 집에 계신다’고 말하더라”고 털어놨다. 명옥씨는 초등학교 특기적성 프로그램을 도와주는 ‘학부모 방과후 코디네이터’로 일할 때 ‘월급’이 아니라 ‘봉사료’를 받았다고도 했다. “내 일이 노동이 아닌 봉사로 여겨진다니, 자존심이 상했어요.”

이들은 남편 등 가족의 배려로 ‘김지영’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해법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다소 낭만적이라는 취지다.

“가족들의 조력을 받아서 홀로서기 할 문제가 아니에요. 현실에선 좀 아쉬운, ‘미화’된 해법인 거죠. 사회 시스템을 바꾸고 개개인이 꾸준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명옥씨가 힘주어 말했다.

현숙씨도 의견을 보탰다. “82년생 김지영의 삶과 60∼70년대생 우리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우리 자식 세대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요. 지금의 일자리를 바꿔야 나중에 우리 아들, 딸이 육아휴직도 더 쓸 수 있고 단시간 근로를 하더라도 제대로 처우를 받으면서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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