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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참어려워] 이웃이 사라진 시대에 새로운 '이웃'을 찾아야 하는 이유

과거의 이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동백꽃 필 무렵
동백꽃 필 무렵 ⓒKBS

몇 년 전에 〈티브이엔〉(tvN)의 〈응답하라 1988〉이 한창 인기를 얻을 때 선후배들과 수다를 떨다가 옆집에서 밥 얻어먹은 얘기가 나왔다. 한 선배가 “우리 어릴 적엔 집에 엄마 없으면 옆집 가서 벨 누르고 밥 얻어먹고 그랬다”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집 문이 잠겨 있으면 옆 건물 상가 아래층에 있는 정육점 하는 친구네 온돌에 앉아서 티브이도 보고 밥도 얻어먹었다.

이 얘기를 들은 1990년대 후반 출생인 후배 중 한명이 놀라며 “시골 사셨어요?”라고 물었다. “나 서울이야”라고 대답하면서도 “그렇다고 이웃이 꼭 좋은 것만은 절대 아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웃 때문에 우리 집에 큰 가정불화가 날 뻔한 적이 있다. 한동네 사는 이웃 아주머니가 “바깥양반이 낯모르는 여자와 유모차에 애까지 끌고 다닌다”고 말해서 엄마가 대노한 날이었다. 그날 “그런 적 없다”는 아빠와 “그럼 누구야”라고 쏴붙이던 엄마는 한바탕 싸우고 나서야 깨달았다. 우리 아빠는 쌍둥이다.

그 이웃 아주머니가 목격한 장면은 옆 동네 사는 쌍둥이 삼촌이 숙모와 함께 유모차를 끌고 가는 정겨운 오후의 일상일 뿐이었다. 문제는 이미 그 소문이 한 바퀴 돈 이후였다는 것. 정육점 하던 내 친구까지 알고 있었으니 말 다 했다. 지금으로 치면 이미 악플이 수백개나 달리고 나서야 진실이 밝혀진 격이다.

이웃이 얼마나 정겹고 따스하면서도 무섭고 다채롭게 성가신 존재인지는 최근 <한국방송>(KBS)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잘 나온다. 이웃이 많으면 〈동백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가상의 도시 옹산처럼 온 동네 사람들이 ‘스파이’라서 어디서 모르는 사람과 말만 섞어도 소문이 쫙 퍼지기 마련이다. 중학교 2학년 때 교회 누나와 몰래 연애하다 주공아파트 사는 엄마 친구 집사님에게 걸렸던 슬픈 이야기가 다 이웃 때문에 생기는 비극이다.

지금의 세계, 내가 사는 2019년의 서울은 너무도 광활해 이웃이랄 게 없다. 특히 2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의 이웃은 그저 엘리베이터를 공유하는 사이, 분리수거를 할 때나 잠시 만나 서로의 쓰레기를 보며 각자의 생필품 브랜드를 확인하는 사이다. 다세대 건물에 함께 사는 이웃은 주차 자리를 두고 싸우고, 층간 소음 때문에 눈을 흘기는 사이가 많다.

지리적 거리로 묶인 정겨운 이웃은 도시에선 거의 멸종됐다. 그럼에도 이웃은 필요해서 우리는 어떻게든 새로운 이웃을 만든다. 국가와 친구와 가족에게 해결을 부탁할 수 없는 나의 작은 고민을 나눌 사람, 얕은 관계라서 좋은 얘기만 서로 해주기로 암묵적으로 약속한 사이, 친구가 되기 전에 잠시 타는 무성애적 ‘썸’이 바로 새로운 이웃이고 그런 관계가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새로운 이웃은 취미 혹은 취향에서 찾기 쉽다. 참고로 내 아내의 이웃은 집 근처 요가원의 동료 수행자들이다. 함께 아쉬탕가 요가 수업을 받은 후 차를 마시다 보니 어느새 이웃이 됐다. “친구는 꼭 잔소리하는데 여기서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거리를 지켜준다”는 게 아내의 설명이다.

동네에 새로 생긴 음식점의 메뉴와 가격 정보를 교환하고, 싫어하는 가게 주인의 흉을 보며 정을 나눈다. 무거운 얘기를 대화의 주제로 꺼내지도 않고, 자기의 삶을 다 보여주는 일도 없다. 내 경우엔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동네 농구 친구들이 새로운 이웃이다. 서로 뭐 하고 사는지 시시콜콜 자세하게 털어놓지는 않지만, 작은 기쁨을 나눈다. 각자가 다니는 회사에서 진행하는 할인 행사를 챙겨주고, 웃기는 동영상을 공유하는 식이다.

<문화방송>(MBC)의 예능 프로그램 〈같이 펀딩〉에는 좀 더 ‘미래적인 이웃’이 등장하기도 한다. 얼마 전 방송에서는 노홍철이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자기 집에 놀러 올 사람을 모집하는 공지를 띄우고 신청자를 추려 10명 내외를 초청해 함께 음식을 먹으며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는 장면이 나왔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연기로 방향을 바꾼 예비배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우울증에 걸려 친구들과 연락도 끊었던 인테리어 전문가가 꺼내기 힘든 얘기를 털어놓는다.

처음 만난 사람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공감한다. 가족처럼 오지랖을 부리며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서지도 않고 너무 잘 아는 친구처럼 상황을 팩트 위주로 나열해가며 따지고 들지도 않는다. 최근 유행하는 독서 토론 모임, 남의 집 거실에서 취향을 공유하는 모임도 이와 마찬가지의 ‘미래적인 이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이웃의 근본에는 한 가지 약속이 깔려 있다. ‘우리는 여차하면 오늘만 만날 수 있는 사이’라는 약속이다.

*이 글은 한겨레에 실린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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