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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선정 '올해의 여성 100인' 이수정을 바꾼 단어는 '앙심'이었다

최근엔 ‘랜덤채팅 앱’의 문제점을 알리는 데 힘 쏟고 있다.

ⓒ한겨레

▶ 강력 범죄에 대한 뉴스나 시사프로그램을 접하다 보면, 냉철한 말투로 범행 동기를 분석하거나 단호한 눈빛으로 범죄 예방을 위한 구체적인 법적·제도적 방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여성 범죄심리학자를 종종 볼 수 있다. ‘1세대 프로파일러’라고 불리는 이수정 경기대 교수다. 그를 만나 “여성과 아이들이 안전한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들어봤다.

“부부 간 불화가 있던 중 앙심을 품고 남편을 살해한 사건.”

그는 ‘앙심’이라는 단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앙심이라고? 경찰 조서는 수십년 가정폭력을 당한 아내가 남편을 죽인 이유를 그렇게 적고 있었다. 뇌리에 박힌 두 글자 앞에서 그는 범죄심리학자로서 “평생을 쏟아부어야 할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피학대 여성의 배우자 살해 사건’을 ‘미풍양속을 해치는 반인륜적 범죄’로 가중처벌하면서도 가정 내 폭력은 범죄로 여기지 않던 시절의 일이다.

“범죄심리학 교수 이수정은 수많은 유명한 살인 사건을 연구했다. 그는 스토킹 방지법 도입을 도우며 법률 시스템에 도전하고 있다.” 영국 <비비시>(BBC)는 최근 이수정(55) 경기대학교 교수(교양학부 범죄심리학)를 ‘올해의 여성 100인’에 선정하며 이렇게 밝혔다. 올해 주제는 ‘여성이 이끌어가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였다고 한다. 이 교수는 “범죄심리학자로서 아이들에게 안전한 미래가 되길 원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가정폭력과 전자감시 제도(전자발찌), 스토킹, 데이트 폭력 등 여성이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범죄에 줄기차게 목소리를 내온 범죄심리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엔 여성 청소년 대상 성범죄의 온상이 된 ‘랜덤채팅 앱’의 문제점을 알리는 데 힘 쏟고 있다. 지난 30일 경기대 수원캠퍼스에서 이 교수를 만나 범죄심리학자의 길을 걷게 된 사연과 앞으로 갈 길을 물었다.

―왜 범죄심리학자가 됐나?

“심리측정을 공부했다. 조현병 환자의 정서장애를 측정하는 절차를 개발해 박사 논문을 썼다. 1999년 경기대에 심리학 교수 자리가 나서 지원했는데, 교정학과에서 재소자 분류심사 절차를 개발하는 법무부 프로젝트에 참여하라고 하더라.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와 재범 위험을 정확히 알아야 정책 방향을 설정할 수 있고,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외국 저널을 찾아 보니 가장 위험한 그룹이 성범죄자였다. 당시 한국에선 성범죄자 중 특이한 양상을 보이며 상습범이 될 수 있는 이들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교도소로부터 받은 재소자 자료에서 성범죄자가 얼마나 있는지 뒤졌다. 그러다 2001년 성범죄 전과 13범을 찾아내 만나겠다고 했는데, 거절당했다.”

―정부 연구인데 왜 못 만났나?

“민간인, 그것도 젊은 여자가 보안상 위험이 있는 범죄자를 만나게 할 수 없다는 거였다. 범죄자를 만나야 위험이 뭔지 짐작이라도 할 텐데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 2002~2003년 미국 텍사스주립대 교환교수로 가게 됐다. 여기는 미국에서 가장 성범죄가 많고 교도소도 많은 곳으로, 심리학자들이 교도소에 드나들면서 전문적인 심리치료와 연구를 한다. 그들과 교류하면서 어떤 일을 하는지 배웠다.”

―이후에도 재소자들 만나기가 어려웠나?

“2004년 경찰 요청으로 경남 마산에서 남편을 살해한 아내와 엄마를 도운 딸을 만나게 됐다. 직업적인 프로파일러가 거의 없던 때다. 시신 일부가 사라졌는데, 가해자가 여자이고 나도 여자니까 만나서 얘기해 그걸 찾아달라는 거였다. 만나보니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30년 가까이 상습적인 폭력을 겪은 모녀였다. 미국에서라면 피학대 여성 증후군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적 취약 상태에서 방어 목적으로 죽인 사건으로 정당방위를 받을 만하다고 봤다. 그런데 경찰 조서를 보니 범행 동기에 ‘부부 간 불화가 있던 중 앙심을 품고 남편을 살해했다’고 적혀 있었다. 앙심이 맞는지 정말 의문이었다. 이건 앙심이 아니라 자기방어적 본능일 수도 있음을 설득하는 데 내 평생을 쏟아부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은 이런 피학대 여성 배우자 살해에 대한 형량도 줄고, 사회적 이해도도 높아졌다.”

이 교수는 성범죄에 대한 사회 분위기가 바뀌는 데 중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조두순 사건’을 꼽는다. 2008년 12월 8살 초등생 여아를 성폭행하고 장기 손상 등의 상해를 입힌 사건이다. “피해자가 살아남았잖아요. 그래서 피해자가 도대체 어디까지 피해를 당할 수 있는지를 온 국민에게 보여준 사건이고요. 이 사건 전에 아동 강간살인 사건이 많았지만, 언론에서 떠들다가 얼마 지나면 조용해졌어요. 피해자가 세상에 없으니 그들의 고통이 쉽게 잊히는 거죠.” 조씨는 내년 만기출소한 뒤 2026년까지 전자발찌를 착용하게 된다. 2008년 9월 전자발찌 제도가 도입되는 데 이 교수가 해온 성범죄자의 재범 위험에 대한 판단 기준 연구가 큰 구실을 했다. 인권침해 논란도 겪었지만, 제도가 시행된 뒤 성범죄 재범률이 크게 줄었다(2004~2008년 14.1%→2009~2018년 1.8%). 인터뷰는 그가 “남은 10년 동안 제대로 해야 할 두가지 일”이라고 생각하는 랜덤채팅 앱과 스토킹 문제로 이어졌다.

랜덤채팅 앱 문제, 반드시 막겠다

―신문·방송·라디오 인터뷰와 시사프로그램 등에 자주 출연하고 있는데.

“법이 쉽게 안 바뀐다. 법이 바뀌려면 국민의 관심과 공감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누군가 떠들어야 하고, 언론에 이슈를 만들어내야 한다. 더구나 나는 원래 못 참는 성격이다. 예컨대,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성행위를 할 경우 처벌 대상이 되는 의제 강간의 연령(만 12살 이하)이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랜덤채팅 앱을 통해 아이들이 성폭력을 당하고 있는데, 그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하지 않나? 모르거나, 불편한 이야기라고 피하거나, 일부 아이들의 동의된 성매매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적을 하려는 것이다.”

―랜덤채팅 앱을 통해 여성 청소년들이 오프라인 성폭력을 당하고, 영상과 사진 등을 통한 성착취와 유포 등의 피해를 입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정부가 너무 모르기 때문이고, 처벌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아이티(IT)로 ‘급전’을 모을 수 있는 방안이 정부 생각보다 그렇게 참신하지 못하다는 걸 랜덤채팅 앱이 보여주고 있다. 랜덤채팅 앱으로 ‘오늘 우리 집에 올래? 10만원 줄게’라고 아이들을 유인하는 과정이 범죄가 아닌 나라에 살고 있다. 다크웹(아동·청소년 성착취 영상 누리집) 사건에서 보듯, 한국은 ‘아동음란물 세계 1등’ 나라다. 첨단 아이티라며 지원하는 인공지능 사업을 한다던 양진호(불법 촬영물을 유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은 한국미래기술 회장)라는 사람이 성범죄 괴물로 탄생하는 나라다. 우리 사회에 독버섯 같은 시장이 존재하고, 특히 그 시장은 성매매와 연관돼 있다. 아이들을 현혹해 성폭력을 저지르고는 그걸 성매매로 둔갑시키고 영상을 팔아먹고 있는 걸 어떻게 내버려두고 있나. 내가 여성이고 딸 가진 엄마인데,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있겠나.”

―의제 강간 연령을 높이고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영미권에서는 보통 만 15~16살이다. ‘아동 유인 방지법’(그루밍 방지법)을 만들어야 한다. 온라인으로 성매매를 제안하는 유인 행위 자체를 처벌해야 한다. 경찰이 미성년자를 가장해 유도수사(함정수사)를 하도록 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현행법으로는 만남이 이뤄진 뒤 범행 순간의 증거를 확보해야만 처벌할 수 있다. 아이들의 피해를 예방하기도 어렵고, 검거하기도 어렵다.”

―스토킹 방지법도 아직 입법이 되지 않았는데.

“‘사소한 범죄인데 이런 것까지 전부 범죄화하면 누가 멀쩡하겠냐’는 주장이 여전히 있다. 문제의식이 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여성이 피해자인 살인 사건 중 30%가 스토킹을 당하다 살해된다. 스토킹을 방지하면 이 30%를 살릴 수 있다는 얘기다. 아동 유인 방지법처럼 예방 법률이다. 성폭력을 위한 사냥 행위를 중지시켜야 한다. 그나마 서울 신림동 사건이 터진 뒤 양상이 약간 바뀌는 것 같다. 이런 대도시에서 얼마나 ‘사냥’을 일삼는지 시시티브이에 다 찍히지 않았나.”

그의 표현 가운데 “자기 집 방에 혼자 앉아서도 성범죄를 당할 수 있는 사회”라는 말이 와닿았다. 4대 강력 범죄 가운데 살인·강도·방화는 줄고 있는 반면 성폭력 범죄는 크게 늘고 있는데, 이는 불법촬영과 유포, 사이버 성범죄 등 신종 성범죄가 늘어난 탓이라고 꼬집은 것이다. 통계청·대검찰청 등의 자료를 보면, 4대 강력 범죄 피해자의 89%가 여성이고, 성폭력 범죄에서 여성 피해자가 94%에 이른다. 불법촬영 범죄의 비중은 2010년 성폭력 범죄의 5.6%에서 2015년 24.9%로 급증했다.

여자라서 여기까지 왔다

―유영철·정남규 등 강력 범죄자들을 만나는 일이 힘들지는 않았나?

“전례가 없는 일을 하다 보니 감당해야 할 게 많았다. 경찰들은 ‘경찰도 아니면서’라고 하고, 전자발찌 주장할 때는 인권단체가 비판하기도 했다.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때 (가해자의) 조현병과 정신보건시스템을 이야기했는데,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심리학자는 개인의 차이에 주목한다. 여성혐오로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서로 초점을 맞추는 부분이 다를 수 있는데, 함께 얘기해서 합당한 지점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힘들다기보다는 변화를 가까운 곳에서 직접 목격하면서 내가 진짜 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도 여느 직장맘들처럼 한때 경력단절 위기를 겪기도 했다. 연세대에서 심리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89년 남편과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났는데 박사 과정을 밟을 때 육아 문제로 귀국해야 했다.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딸에게는 ‘극단적 성차별주의자’라는 비판도 받았다고 한다. 여성이 안전하게 살기 어려운 사회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엄마는 클럽에 갔다는 딸을 찾아 밤거리를 무작정 헤매고 다닌 적도 있다고 한다.

“여자의 일생은 쉽지가 않다는 게 결론이죠.(웃음) 집이 가부장적이고, 제사도 지내요. 스트레스를 안 받는 성격이라 집안일은 그것대로 했죠. 왜냐면 내 일을 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요즘 여성들한테는 그렇게 살라고 말할 수 없어요. 그리고 여자였기 때문에 이만큼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남자였다면 ‘앙심’이라는 글자를 보고도 문제의식이 없었을 것 같아요. 형법학자가 아니라 심리학자였고, 그리고 여성이어서 그 글자에 동의할 수 없었고, 거기서 모든 문제의식이 출발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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