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내가 엄마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궁극적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사랑 자체를 측정하려는 걸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필자와 개 케이옌
필자와 개 케이옌

얼마 전 어느 오후, 부끄럽지만 학생들의 에세이에 성적을 매기며 토크 쇼를 틀어놓고 있었다. 출연자들은 최근 오프라 윈프리가 인터뷰에서 아기를 낳지 않은 것, 오랫동안 사귄 스테드먼 그레이엄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 데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출산을 하지 않기로 한 내 힘들었던 결정에 대한 책을 최근에 낸 나는 오프라와 이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꿔왔다. 우리 모두 오프라의 응원과 반응을 원하지 않나? 이건 농담이지만, 정말 솔직히 나는 오프라와 엘렌 드제너러스를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아무 후회도 없는 듯하며 충만한 인생을 살고 있는 걸로 보이는 보기드문 여성 셀러브리티로 생각해왔다.

그래서 TV의 사람들이 오프라가 후회하지 않는다는데 대한 이야기가 들리자 학생의 에세이에 코멘트를 달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게 되었다. 나는 일어나서 거실 소파로 갔다. ‘GMA 3’의 마이클 스트라한, 새라 헤인스, 케케 파머는 예의를 갖추어 ‘모두 자기 방식이 있다’고 인정했지만, 아이가 없어도 괜찮다는 것을 헤아리기 힘들다고 말했다.

스트라한은 특정 종류의 ‘궁극적 사랑’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수사적 질문을 던졌다. 아이를 가지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고 덧붙였다.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려 나는 크게 웃었다.

세상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기 위해 자기 자녀가 필요한 사람들도 있나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이걸 이해하기 때문에 자신이 아이를 낳는 것이 필요한지, 무책임한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자신의 사랑, 이타심, 돌보고 싶은 본능을 자신의 생물적 자녀에게 직접적으로 한껏 쏟아붓기보다는, 아이가 없는 사람은 주위의 모든 생명에게 헌신할 내적, 외적 자원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내 남편 네이선과 나는 ‘궁극적 사랑’이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라는 형태로만 존재한다는 가설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시험대이다. (나는 아무도 부모에 대한 자녀의 사랑이 ‘궁극적’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게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네이선은 예전 결혼에서 낳은 23세 딸이 있다. 40세 여성인 나는 자녀가 없다. 딸에 대한 네이선의 사랑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깊고 특별하다. 네이선이 딸을 생각하지 않는 순간이란 거의 없다. 딸이 안전하다는 걸 알고 나서야 마음 편히 쉴 수 있다. 자신이 딸을 지켜주지 못한 순간들은 그의 마음을 다리미로 지지는 것과도 같았고, 그가 아마 영원히 지녀야 할 흉터를 남겼다. 그러나 네이선은 다른 몇 명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한없는 사랑을 느낀다고 말하며, 그만큼 뚜렷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전지구를 향해서도 느낀다고 말한다.

그는 아마 내가 충직하게 열렬히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보았다고도 말할 것이다. 내 파트너, 평생지기들, 가족, 그리고 물론 우리가 키우는 동물들을 사랑한다. 네이선은 내가 어머니가 되지 않아서 이른바 유일한 진짜 사랑이라는 걸 느끼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지 않는다. 우리 둘 다 내가 정말 좋은 엄마가 되었을 거라고 조금은 아쉬워하지만… 그런 특정 종류의 무조건적 사랑을 경험해야 내 삶, 우리 둘이 함께 하는 삶이 풍부하고 의미있으며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동물에 대한 감정을 부모의 감정에 비교한다면 조롱할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비교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내 개와 두 고양이에 대한 고마움, 관심, 공감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육체적, 화학적 반응, 그리고 돌보겠다는 자발적 결정, 그를 위해 희생할 의지가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사랑이 충만하지 않은 날은 하루도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고양이 스토니를 입양했을 때 우리는 스토니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었다. 우리가 아니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심하고 작은, 회색과 흰색이 섞인 털을 가진 스토니는 만성 눈 바이러스를 앓았다. 애정과 안전에 굶주려 있었다. 보통 나는 멀티태스킹을 하는 사람이고, 대화에 빠져있는 게 아니라면 10분 이상 앉아있으면 안달이 난다. 하지만 스토니의 적응을 돕기 위해 나는 차고에서 불편한 접는 의자에 한번에 몇 시간이나 앉아있었다. 그저 스토니와 함께 있기 위해서고 잠시도 불편하지 않았다. 햇빛을 받으며 즐겁게 스트레칭하는 스토니를 보면 내 마음엔 평화가 가득하다. 이 기분은 우리 개 케이옌이 내 옆에서 조용히 숨쉬고 있을 때 느끼는 평화에만 비교가 가능하다. 차가 너무 빨리 달려가면 나는 겁에 질리고, 고양이들이 있으니 속도를 줄여달라는 표지판을 세우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내 개와 고양이들을 보호할 수 없게 되는 악몽을 꾸고, 악몽의 속상한 이미지는 며칠 동안이나 남는다.

필자와 남편
필자와 남편

남편은 인간이 지구에게 하는 일을 생각하면 걱정이 들어 숨쉬기도 힘들어질 때가 있다(나 역시 그렇고 전적으로 존중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모든 동물들에 대한 본능적 사랑과 걱정을 늘 느껴왔다.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듯, 나는 동물이 고통받는 걸 생각하면 숨쉬기 힘들 정도로 힘들다.

남녀, 기혼 또는 싱글인 내 친구들 중에는 아이가 없는 4~50대가 많다. 대부분은 의식적으로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정했고, 가질 수 없어서 가지지 않은 경우도 있다. 우리의 공통점은 분석하려는 성향, 각자의 상황에서 우리가 받은 축복과 장점을 빨아들이고 모든 걸 철저히 의논하려는 욕구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많이 한다. 그 질문 과정에서 아이가 없어서 공허하거나 부족하다는 답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끔 일종의 슬픔이나 의구심을 갖는 일은 물론... 있다.

그러나 TV에서 언제나 전하는 메시지가 나를 건드릴 수는 있다. 오프라의 인터뷰와 비혼 또는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 괜찮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후 나는 새라에게 전화했다. 새라는 35년 전부터 나와 가장 친한 친구고, 지금은 돌이 된 아들을 두고 있다. 그래서 24시간 동안 서로 엇갈려서 겨우 통화가 가능했다. 새라는 아들이 깊이 잠들었을 때만 통화할 수 있다. 아들이 깨어있을 때면 한시도 빼놓지 않고 새라의 손, 눈, 귀, 집중력을 모두 동원해 아이를 돌보고 감시해야 한다. 내가 아는 가장 진정한 사람 중 하나인 새라는 사려깊고 솔직한 답을 줄 것이 분명했다. 나는 “1년이 된 지금, 데이비드에 대한 사랑이 네가 이제까지 느꼈던 그 어떤 사랑보다도 크다고 느끼니? 어머니가 되기 전까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궁극적 사랑이야?”라고 물었다.

새라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데이비드 만큼 다른 사람과 동물들도 사랑했었어. 세바스찬[새라의 개]과 데이비드를 똑같이 사랑해.” 아들에 대해 느끼는 유일한 다른 감정은 엄마곰 본능 뿐이라고 설명했다. 데이비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거라고 했다. 우리는 아이를 가져야만 느낄 수 있다는 순수하고 마법같은 사랑과 목적 의식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부모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모르겠어… 내가 뭔가 잘못된 건진 몰라도, 내 경험은 그렇지는 않아.” 새라는 웃으며 말했다.

새라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잘 아는 우리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새라의 목적의식은 세라피스트로 일하며 클라이언트들과 소통하고 도와주는 것으로 채워졌다. 새라의 결론은 이랬다. “나는 살면서 온갖 종류의 동등하지만 다른 사랑을 느껴왔다. 영적, 봉사, 가족, 로맨틱, 모정 등이고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 안의 성스러움과 소통한다는 느낌보다 더 궁극적인 사랑은 없었다.”

새라에게 감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새라가 15분 동안 누린 자유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새라의 진심을 듣자 두 가지가 확실해졌기 때문에 고마웠다. 첫째, 나는 일할 때 배경 소음이 필요하면 빌어먹을 텔레비전을 끄고 노래가 나오지 않는 음악을 틀어야겠다. 둘째, 사랑을 경험하는 보편적인 거창하고 궁극적인 단 하나의 방식이란 없다. 아이를 갖는 것이 새로운 종류의 사랑, 아름답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랑을 일깨운 경험을 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직접 인간 아이를 낳거나 입양하든 아니든 그런 사랑을 지닌 사람도 있다.

마더 테레사, 즉 테레사 수녀가 실제 ‘마더’가 아니라서 사랑을 놓쳤다고 감히 말할 사람이 있을까. 테레사 수녀의 삶과 마음 자체가 더 중요하다. 나는 테레사 수녀의 어록을 살펴보았다.

테레사 수녀의 명언은 무척 많다.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강한 사랑은 측정하지 않는다. 그저 줄 뿐이다.” 어쩌면 사랑 자체를 측정하려는 걸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교하고 대조하고, 양을 재려하고 평가하기보다는 그저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사랑을 나누는 측정이 불가능할 만큼 다양한 방법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