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내가 아이비 리그 대학교에 들어간지 3주만에 뛰쳐나온 이유

'엄친딸'이었던 나는 속으로는 많이 힘들었다

필자
필자 ⓒJenny Lu

8월말에 나는 짐을 싸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작별을 고했다. 1학년으로 입학하고 새 기숙사로 이사한지 3주만이었다. 나는 매사추세츠주 메드포드의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과 친구들은 모두 충격받았다. 다들, 그리고 나 자신도 내가 어쩌다 잘못된 걸까 생각했다.

나는 6살 때 10살 이상 손위인 오빠와 함께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민했다. 내가 미국에서 교육 받고 취직할 수 있게 하자는 게 주목적이었다. 유치원부터 12학년까지 나는 교과서와 숙제에 머리를 파묻고 지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학생이 되려고 늘 노력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들은 내가 ‘유달리 똑똑하다’고 했다. 고등학교 교사들은 어머니에게 내 미래가 유망하다고 했다. 나는 학교에서 가장 큰 사회 봉사 활동에서 회장을 맡았고 SAT 점수도 아주 높았다.

나는 ‘모범적 소수자’였다. 여기서든 중국에서든, 나는 언제나 어머니의 친구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들려주는 성공담의 주인공이었다. “너도 제니처럼 돼야 해. 성적이 좋고 좋은 대학에 갈 거야.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돈을 많이 벌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이것이 중국에서의 성공의 정의다. 그래서 작년 12월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모두 내게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본 것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환상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많았고, 잠잘 시간이 생길 때는 불면증 때문에 약을 먹어야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성적과 대학에 대한 압박이 다른 아이들, 특히 우리 학년에서 성적이 가장 좋은 아이들 위에 구름처럼 떠있는 것을 보았다. 그중엔 내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 압박 때문에 나 같이 의욕이 있는 학생들의 학업 성과가 좋았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우리를 압도하는 압박이기도 했다. 이 압박은 부모, 체제, 우리 자신에게서 왔다.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들이 나로 인해 느낀 흥분과 떠들어대는 말들에 맞추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가올 가을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기대에 의해 내게 지정된 길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님이 규정한 부와 성공의 약속을 따르고 있었다. 나만의 길과 꿈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지만, 남의 길만 계속 따라가면 절대 알지 못하게 될 거라는 건 알았다.

우리 사회가 너무나 둔감해져서 학생들이 겪는 우울과 탈진이 완전히 정상적인 것처럼 취급받는 듯하다. 대학 지원이 점점 더 치열해져서, 부모들은 엘리트 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목표를 위해 자녀들에게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압력을 더욱 많이 준다.

중국 및 아시아계 가정에서 유독 심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첫 SAT에서 기대보다 낮은 점수를 받자, 우리 가족은 점수를 올리도록 집중과정을 받게 했다. 우리 가족의 친구들과 일반 중국 가정에서 과외 교사를 구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SAT 뿐 아니라 숙제, 에세이 쓰기, 대학교 인터뷰 준비 등, 자녀들이 앞서나가는데 필요한 거의 모든 일에 과외 교사가 붙는다. 내 주위 사람들 밖을 내다보면 아시아계가 아닌 가족과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관대한 것을 보고 질투가 느껴졌다. 학교와 대학에 대한 압력은 모든 문화에 존재하지만, 여러 아시아계 가족들이 특히 극단적인 것 같다.

내가 느낀 압력과 스트레스를 말한 적은 없었다. 우리 집안에서 정신건강은 인식되지도, 논의되지도 않았다. 사실 나는 ‘정신건강’이 중국어로 뭔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종류의 감정은 내면화하고 혼자 처리해야했다. 문제는 이런 힘든 일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갇혀만 있었다. 내 아시아계 미국인 친구들 중에는 이와 똑같은 말을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기숙사, 교실, 캠퍼스에서 지내보고서야 이건 나를 위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진정 알 수 있었다. 학기 첫 날 동안 다녀보고, 식당, 휴게 공간, 필라델피아 시내를 다녀보니 내가 여기서 앞으로 4년은 커녕 단 하루도 더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사상 최저의 기분 상태로, 나는 지도 교수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떠나기로 했다. 지도 교수는 나를 응원해주었고, 어머니에게 진실을 말할 용기를 주었다. 지도 교수, 나, 어머니 셋이 만났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와 나는 감정을 소통했다.

나는 펜실베이니아에서 행복하거나 충만할 수 없을 것이며, 학업의 압력에서 잠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이민자로서 내게 걷도록 밀어붙인 길은 당신이 아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내가 잘되기만을 바랐다고 말했다. 지도 교수의 도움으로 어머니는 아이비 리그 바깥의 가능성에도 눈을 떴다. 다른 학교에 가든, 갭 이어(gap year)를 갖든, 다른 길들은 있었다. 힘들고 감정적인 대화였지만, 어머니의 기대 아래에는 사랑과 좋은 의도가 있었음을 다시 확인했다. 어머니가 실망했어도 나를 응원한다는 걸 알게 되자, 한 걸음 물러섰어도 다시 나아갈 힘이 났다.

집에 돌아와서 몇 주 동안 나는 일을 하고 자원봉사를 하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내가 어떻게 되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명백한 답은 아직 없지만, 이제 내가 무엇이 싫은지, 하고 싶지 않은 게 무언지는 알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다 계획해둬야’ 한다는 극도의 긴박함은 이젠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게 야망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내년 봄이나 가을에 다시 대학에 지원하겠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우리 가족이 선호할 대학은 아닐 수도 있지만, 내가 즐기는 분야에서 졸업하고 가족들을 자랑스럽게 만들 것이다. 나는 학생들이 학교에 지원할 때, 혹은 지금 다니는 학교에서 불만을 느낄 때 한 가지 선택지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대학이 자신에게 맞는지, 어떤 커리어를 갖고 싶은지 모르겠다면 쉬어라.

내게 있어 옳은 결정을 내렸음을 알고 있다. 난 이제 겨우 18세다. 시간은 많다.

 

* HuffPost US의 Why I Dropped Out Of An Ivy League College Just 3 Weeks Into Freshman Year를 번역한 것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이민자 #아이비리그 #아시아계미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