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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7일 16시 30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10월 27일 16시 37분 KST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어떻게 원작과 다른 방식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는가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오늘 관객 100만명을 돌파했다

* 이 글에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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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2년생 김지영'

’82년생 김지영’은 원작소설부터 저마다의 반응과 입장이 차고 넘쳤던 작품이다. ‘82년생 김지영’이 여성이 겪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82년생 김지영’ 이전에도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이 현실을 다룬 소설이 없었던 건 아니다.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유독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싼 말들이 많았던 이유를 하나를 꼽자면, 그건 이 소설의 형식에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1982년에 출생한 평범한 한국 여성이 나고 자라면서 겪었을 법한 일들을 연속적으로 엮었다. 가족, 학교, 직장, 결혼 이후의 또 다른 가족 안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경험해야 했던 불합리한 일들이 실제 통계 자료와 함께 펼쳐진다. 책을 읽어보고 비난하는 쪽은 어떻게 한 명의 여자에게 이런 일들이 다 일어날 수 있냐며 이 소설이 과장됐다고 한다. (책을 읽어보지 않은 쪽은 1982년 출생의 여성에게 무슨 ‘성차별’이 있었냐고 한다.) 찬사를 보내는 쪽은 주인공 김지영과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자신뿐만 아니라, 친구, 언니, 선배, 엄마, 할머니 등등 자신 주변의 모든 여성을 떠올린다. 책을 비난하는 쪽의 입장에도 이 형식에 공감하는 의견이 있다. ‘82년생 김철수’를 써도 이만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이다. 가능하다. 그처럼 이 형식은 매우 편리하고 그래서 매우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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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그런데 만약 이 형식을 그대로 가져와 영화를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의 가늠자가 될 비슷한 형식의 영화가 있다. 다른 성별, 다른 세대의 이야기지만,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은 지금에 와서 볼 때 책 ’82년생 김지영’의 형식으로 쓰여진 ‘58년 개띠’ 덕수씨의 이야기다.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비난 댓글 가운데에는 ”우리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도 영화로 만들어 달라”는 내용이 종종 있는데 여기 있다.) ‘국제시장‘은 6.25 전쟁 이후 가족을 건사해야 덕수가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엮는다. ‘국제시장‘에서도 이 형식은 매우 효과적이다. 덕분에 1천 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지만, 동시에 ‘국제시장‘은 ‘선동 영화‘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국제시장’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족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러한 비판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는 영화였다. 그렇다면 ’82년생 김지영‘을 영화로 만들 때, 같은 형식을 가져왔다면 어땠을까? 이미 원작부터 ‘성 대결’을 조장하는 이야기로 오해받는 상황에서 기대보다는 우려가 더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작과는 다른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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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2년생 김지영'

다행히 ‘82년생 김지영’은 원작의 형식이 아니라 영화의 형식을 따라간다. 원작에서 김지영은 커피를 마시던 자신에게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라고 수군대는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은 후 그동안 쌓였던 고통을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병’으로 드러낸다. 원작의 이야기는 사실상 여기서 끝나는데, 영화는 여기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현재와 과거를 플래시백으로 오간다. 원작이 주로 과거의 김지영이 어떻게 살았나를 보여준다면, 영화는 그런 과거를 겪어온 김지영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면서, 이제 그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상상하는 것이다.

원작과 다른 형식과 이야기를 진행하지만, 영화가 원작과 애써 거리감을 두는 건 아니다. 어떤 장면은 원작의 문장을 영화적으로 인용하기도 한다. 명절 당일, 가족들이 식사를 끝내고, 김지영은 과일을 깎아 내주고 뒷정리를 시작한다. 이때 남편 대현은 마무리를 빨리 끝내고 집에 가자고 말한다. 김지영은 웃으며 알았다고 답한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영화의 카메라는 초인종 소리를 듣는 김지영의 표정을 포착한다. 영화상에서 볼 때, 이 장면의 초인종은 영화 ‘기생충’에서 술을 마시던 기택의 가족에게 갑자기 울린 초인종과 닮았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 예기치 않은 불청객.

원작에 나온 대로 이 초인종을 누른 사람은 남편의 여자 형제 가족이다. 시어머니는 딸의 가족을 반갑게 맞이하고, 아무렇지 않게 (일을 끝내고 집에 가려했던)김지영에게 전을 데워가지고 오라고 말한다. 원작에서도 이 장면은 김지영의 가족들이 무엇을 먹고, 누가 집에 찾아왔고, 그는 집에서 무엇을 했으며 그들을 위해 어떤 음식을 만들었는가만 설명되어 있다. 표면적으로는 어떤 불편함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이 장면에서 김지영의 표정을 포착하면서 이 상황이 가진 기이한 불편함을 드러낸다.

이 장면은 영화 ‘82년생 김지영’과 원작 소설이 공유하는 문제의식에 대한 태도가 드러난 부분으로 보인다. 현실에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거나, 보고도 모른척 한 표정들을 드러내기. 명절날 시댁에서 하루 종일 일하던 며느리는 갑자기 찾아온 시댁 식구를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들의 눈에는 그녀 또한 식구를 반갑게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원작소설이 한 여성의 삶에 모든 불합리한 차별과 고통을 모아놓는 방식으로 그런 감정들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면, 영화는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김지영이 느끼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표현한다.

 

원작과는 다른 주변 인물들의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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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2년생 김지영'

영화에서 원작보다 더 두드러지는 건, 김지영을 둘러싼 가족의 모습이다. 원작에서는 김지영의 엄마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말’과 ‘행동‘으로만 묘사됐다. 하지만 영화는 남편 대현의 시각에서 아내를 바라보는 입장을 드러내고, 김지영의 가족들이 김지영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가장 큰 벽처럼 보이는 김지영의 시어머니도 그녀를 위해 약을 지어 보낸다. 영화에서는 김지영이 ‘벽’처럼 느끼는 자신의 현실, 그 현실에 함께 하는 사람들 누구도 ‘악의’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모를 뿐이다.

남편 대현은 명절날 고생하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직접 설거지를 하려한다. 만약 다른 이야기였다면, 이 장면의 대현은 (안 그래도 잘생긴데다) 자상한 남편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더 눈에 띄는 건,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는 김지영의 난처한 표정이다. 영화가 남편의 캐릭터를 대하는 태도가 드러나는 또 다른 부분은 과거 이 부부가 출산 문제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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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2년생 김지영'

지영은 아이를 가진 후 자신에게 찾아올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남편은 자신이 잘하겠다고만 말한다. 이 장면의 두 사람은 (안 그대로 뽀사시한 조명과 두 배우의 얼굴 때문에) 많은 TV 드라마에서 봤던 행복한 신혼부부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현은 김지영의 입장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볼 줄 모르는 상황이다. 또 아내의 입장에서 출산을 생각할 수 없다. 사실 이 장면의 김지영 또한 출산이 자신에게 가져올 일들을 상상하지 못한다. 극 중에서 남편이 말하는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란 대사는 이 영화에서 남편뿐만 아니라 김지영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영화는 원작과 달리 극 중 김지영의 아버지, 김지영의 남동생이 겪는 변화를 묘사하면서 후회와 화해까지 이끌어 내고 있다.

 

원작의 주제를 영화적으로, 더 문학적으로 전달하는 영화

그처럼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감정적으로도 원작과 다른 결의 이야기다. 원작이 연대기적인 형식의 고발 르포와 같았다면, ‘82년생 김지영’은 한 여성의 아픔과 극복, 위로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이 영화가 원작과 다른 주제를 전하는 건 아니다. 영화는 원작에는 없었던 부분들을 상상해 여성이 겪는 아픔을 더 강렬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영화는 김지영이 다시 일하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를 중심 사건으로 가져간다.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구하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 남편 대현이 자기가 육아휴직을 쓰겠다고 해서 방법을 찾은 듯했으나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반대한다. 이때 김지영의 병을 알게 된 엄마가 찾아온다. 엄마는 김지영의 복직을 위해 자신이 일을 포기하고 아이를 봐주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는 엄마를 향해 김지영은 외할머니의 목소리로 엄마의 이름을 부른다. 김지영이 외할머니의 목소리를 낸다는 설정은 원작에 없었던 것이다. 이 장면에서 김지영은 엄마가 과거 남자 형제들을 위해 공장에서 돈을 벌어야 해서 꿈을 포기했던 시절을 이야기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당부하듯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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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이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사실 더 복잡한 감정들이 충돌한다. 이 장면은 딸이 엄마에게 보내는 위로처럼 보인다. 엄마가 이제 과거처럼 가족을 위해 자신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그리고 그런 엄마의 인생에 대한 위로.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이 장면은 과거의 엄마나 현재의 자신이나 가족 때문에 원하는 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여성의 일생 자체를 드러내기도 한다. 극 중에서 김지영이 말하는 자신을 둘러싼 ‘벽’은 여성이고, 엄마이기 때문에 겪는 한계다. 그 벽은 자신의 엄마가 엄마가 되기 전부터 겪었던 것이며 딸이 엄마가 된 후에도 여전히 겪을 수 있다.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싼 비난 댓글 중 하나는 “82년생이 아니라 어머니 세대나 할머니 세대의 이야기라면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인데, ‘82년생 김지영’을 봐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원작과는 다른 형식과 다른 감정으로 여성 관객뿐만 아니라 더 많은 관객을 포괄하려 애썼다. 물론 대중성을 위한 선택이지만, 그 선택 덕분에 ’82년생 김지영’은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됐다. 이 영화는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육아에 대한 이야기이고,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딸을 바라보는 엄마와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은 원작과는 또 다른 성격으로 저마다의 입장과 반응이 차고 넘칠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