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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 그와 함께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동년배 여성이 설리에게

▶10월14일, 배우이자 가수였던 설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세상의 시선에 갇히기를 거부한 그를 응원해온 이들은 비보에 슬퍼했다. 절친인 구하라는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그 세상에서 진리가 하고 싶은 대로”라고 추모했다. 천다민 한겨레 젠더미디어 ‘슬랩’ 피디도 ‘여자들과 함께 오래 늙어가고 싶은’ 마음을 담아 추모글을 썼다.

‘부고-1994년 3월29일~2019년 10월14일’

설리
설리 ⓒ뉴스1

 용감하고 당당했던 배우이자 가수 설리(본명 최진리·25)가 세상을 떠났다. 아이돌 그룹 에프엑스(f(x)) 출신인 그는 무대에 서 있기만 해도 빛나는 존재감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지난 6월에는 솔로 앨범 <고블린>을 발매하며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설리는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셀러브리티(유명인)였다. 지난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에 ‘영광스러운 날’이라고 지지 발언을 했고, “브래지어는 액세서리일 뿐”이라는 의견을 제이티비씨(JTBC) 예능 프로그램 <악플의 밤>에서 밝히기도 했다. 2018년 2월19일 잡지 <코스모폴리탄> 인터뷰에서는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는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어쩌다 보니 기승전‘당당’이 돼버렸는데, ‘당당한 여성’이요. 아, 전 그럼 행복할 것 같네요!”라고 답했다. 그런 나에게 설리는 ‘함께 늙어가고 싶은 스타’였다.

 

나는 괜찮아, 너는 어떠니?

 

“겉은 강한 척해 보지만 내 심장은 종이 같아” (f(x) 3집, <종이 심장(Paper Heart)>중)

 

2019년 10월14일 오후 5시4분 <연합뉴스>를 통해 설리의 사망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하던 일을 멈추고 휴대폰을 들어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괜찮아? 메신저 화면을 끄기도 전에 친구들로부터 문자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괜찮아?’ 한 시간쯤 후엔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묻는 목소리엔 물기가 있었다. 괜찮냐는 물음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된 설리의 소식을 앞에 두고 20대 동년배인 우리는 앞다투어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인스타 피드에서 안부를 엿보던 동년배 스타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맹렬하게 친구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괜찮니, 친구들아. 언니들아, 괜찮니. 어디니. 밥은 챙겨 먹었니.’ 산봉우리에서 봉화라도 켜듯, 친구들은 각자의 섬에서 불을 밝혔다. ‘나는 괜찮아, 너는 괜찮니’, 메아리가 쳤다.

 

불면의 밤

 

“누구도 못 오게 내 마음을 지켜” (f(x) 정규 1집, <아이(love)> 중)

 

설리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몇 년 전 친구를 잃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지킬 수 있었고 지켜야만 했던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감각이었다. 전화를 걸어온 친구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너무 미안해서 잠이 안 와, 어떡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죄책감이었고, 나보다는 더 씩씩하고 굳세리라 믿었던 그가 떠났다는 사실에서 오는 아득함이었다. 그의 명복을 비는 글들,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담은 트윗이 타임라인을 채웠다.

그날 여성들은 설리가 세상을 버린 마음을 약간은 상상할 수 있었으므로, 더 고통스러운 밤을 보냈다. 설리는 많은 순간 논란의 중심에 있었고, 악의적인 시선에 괴로워했다. 동료 배우를 ‘선배님’이라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자는 여자가 돕는다’(Girls supporting girls)라는 문구의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노브라 셀카’를 올렸다는 이유로 논란의 중심이 되었고, 악플을 감내해야 했다. 고루한 서열 문화,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 여성들의 몸에 잣대를 들이미는 문화 속에서 많은 여성은 설리처럼 죽음을 삶만큼이나 가깝게 여길 기회를 자주 가졌다. 

설리
설리 ⓒ뉴스1

 이상한 여자들의 죽음

 

“‘별난 사람’이라고 낙인찍히는 것보다 순종이라는 오명에 무릎 꿇는 것을 더 두려워하라”(설리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토마스 J. 왓슨의 글 중)

 

그는 ‘이상한’ 여자였다.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웃지 않아서, 옷을 마음대로 입어서, 나이 많은 남자와 연애를 해서, 가끔 멍한 눈으로 카메라를 봐서, ‘적당’하지 않아서,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서, 브래지어를 하고 싶지 않을 때 하지 않아서,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아서, 웃고 싶을 때 웃어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서, 사람들은 설리가 이상하다고 떠들어댔다.

한국 사회는 이상한 여자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범한 여자’는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2019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자들은 죄다 이상하다면 이상하다. 그래서 여태껏 ‘이상한 여자’들이 ‘이상하다’고 떠들어온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평범하다는 협소한 정의 바깥의 수많은 이상한 여자들이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 정말 몰랐나요?

그를 더 열심히 응원하지 못한 게 미안하다. ‘야, 그까짓 가슴 가리개가 뭐라고. 나이 많은 남자 사귀는 게 뭐 어때서. 자기 계정에 자기 마음대로 예쁜 사진 올리는 게 뭐 어때서. 설리 하고 싶은 거 다 해.’ 더 말해줄걸. 그럴걸.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그곳에서는 행복하길’ 같은 애도의 말이, ‘여기 이곳에서는 당신이 행복할 수 없었던 게 맞지’라는 확인처럼 들린다. 불행히도 그건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가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나서야 그의 행복을 빌고 있다.

 

걔 하나도 안 이상해

 

“저도 여러분께 따뜻함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모두에게 감사하단 말을 하고 싶고 앞으로도 미우나 고우나 잘 부탁 드려요”(2019년 9월5일 데뷔 14주년을 맞아 설리가 팬들에게 쓴 편지 중)

 

설리에게 미안한 이유는 더 있다. 언젠가 ‘설리 걔 좀 이상하지 않냐’는 지인의 말에 ‘그렇구나’ 하고 가볍게 동조하고 넘어갔던 경험을 기억해내 버렸기 때문이다. 왜 더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았을까. 그가 그의 인생을 마음껏 사는 모양에 대해 함부로 말할 필요는 없지 않겠냐고, 나는 그가 즐겁게 인생을 사는 모습이 너무 좋다고, 설리를 지지한다고, 그는 우리에게 용기가 된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악플이 설리를 죽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를 둘러싼 가십의 부피는 단순한 댓글창 이상이었다. ‘설리’라는 두 글자를 포털 사이트에 치면, 그의 노출이나 사생활과 관련된 단어로 오염된 연관 검색어가 나열됐다. 악플러만이 가해자가 아니다. 그에 대한 가십을, 여성 혐오적이고 착취적인 소문을 스포츠처럼 퍼나르는 순간들을 방관한 이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여성 혐오 분위기에 더 적극적으로 몸을 부딪치며 싸우지 않은 나도 반성한다.

그가 떠나고, 일부 여성들은 고인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연관검색어 바꾸기 운동’을 시작했다. 여성 커뮤니티 중심으로 설리 연관 검색어를 ‘설리 사랑해, 설리 고블린, 설리 복숭아’로 바꾸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루머와 성희롱성 문구들이 올라 있었던 연관 검색어는 며칠 사이에 ‘설리 사랑해, 설리 복숭아’ 등으로 바뀌었다.

 

늙은 여자가 되고 싶다

 

“하늘을 나는 바람을 감는 구름을 걷는 그 비행은 끝이 났지만/ 오래된 인연 영원을 믿어 손을 잡은 오직 한 사람” (f(x) 정규 2집, 중)

 

“나는 정말로 설리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자유롭게 나이 드는 것, 정말로 보고 싶었다.” 한 누리꾼이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에 올린 글이다. 나 또한 설리와 함께 나이 들어 할머니가 되지 못해 아쉽고 슬프다. 여자들이 제 삶을 원하는 대로 살아가며 늙어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상한 여자들에게 가혹한 세상은 호시탐탐 우리의 영혼을 노릴 테니까.

죽지 않고 수많은 여자들과 함께 할머니가 되는 상상을 한다. 나이를 먹고, 떠들고, 자유롭게 사랑하며 살아남고 싶다. 기를 쓰고 버티지 않아도, 이를 악물지 않아도, 웃으며 잘 살 수 있는 그런 삶이 우리에게 허락되기를. 그런 삶을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그래서 노래한다.

‘여자들아 여자들을 더 사랑하자. 여자들아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남자. 다 같이 할머니가 되자. 멋대로 춤추고 노래하자.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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