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 이후, 용의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윤씨 이후’의 경찰 수사에 대해 샅샅이 찾아봤다.

  • 이진우
  • 입력 2019.10.17 16:22
  • 수정 2019.10.17 16:26
ⓒ뉴스1

화성 9차 사건의 현장검증 장소에서 울려퍼진 목소리

″죽어도 좋으니 양심대로 말하라!” 아버지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윤모군은 용기를 냈다. 1990년 12월 23일, 화성연쇄살인 9차 사건의 현장검증이 진행되고 있던 화성 병점육교 인근에서였다. 윤군은 ”형사분들이 무서워서 거짓으로 진술했다”며 ”여기 와본 일이 없고 경찰에 연행된 첫날 여인숙에 있을 때 한번 온 일 밖에는 없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화성연쇄살인 9차 사건의 현장검증은 57분 만에 중단됐다.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년간 감옥살이를 한 윤씨가 재심 청구를 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윤씨를 수사한 경찰은 ‘강압수사는 없었다’면서 맞서고 있다. 윤씨의 자백 말고도 당시 첨단수사기법인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에 따른 감정결과가 윤씨를 범인으로 지목했기 때문에 고문을 할 이유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찰은 8차 사건 이후의 수사는 어떻게 진행했을까. 8차 사건에서 ‘첨단수사기법‘을 동원해 ‘고문 없이’ 용의자를 검거한 만큼, 9차사건부터는 ‘강압수사’와는 거리가 먼 현대적인 수사방식을 유지하지 않았을까. 윤씨와 경찰의 공방을 보면서, 9차 사건 이후의 경찰은 어떻게 화성사건을 수사했을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의문은 금방 풀렸다. 현대적인 수사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강압수사는 더 극심해졌다. 화성연쇄살인사건 보도가 집중된 1987년부터 1992년까지의 과거 기사를 통해 드러난 사실이다. 단적으로 화성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뒤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이 어느 시기에 몰려 있는지를 봐도 알 수 있다.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4명 모두 9차 사건 이후의 수사과정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보도기사 캡처
화성연쇄살인사건 보도기사 캡처

경찰은 9차 사건의 용의자들을 막무가내로 잡아들였다

먼저 경찰의 9차 사건에 대한 수사가 어땠는지를 찾아봤다. 앞서 언급한 윤군은 9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용의자였다. 9차 사건은 1990년 11월 15일 발생했다. 14세 김모양이 태안읍 병점리 야산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양손과 양발이 묶여 있었으며,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다. ‘그놈’의 수법이었다. 8차 사건(1988년 9월 16일)의 용의자로 검거(1989년 7월 27일)된 윤씨에게 법원이 무기징역을 선고(1989년 10월)한지 1년 여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12월 20일 경찰은 범인을 붙잡았다고 밝혔다. 9차 사건 발생 34일 만이었다. 경찰이 지목한 용의자는 악기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19세 윤군이었다. 경찰은 윤군이 범행을 자백했으며, 윤군이 88년에도 길가에 숨어 있다가 여성의 가슴을 만지고 달아나는 버릇이 있다는 주민의 증언도 확보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또 사건발생일 오후에 범행현장 인근에서 윤군을 목격했다는 여성 노동자 윤씨 등 3명을 목격자로 내세웠다. 그러나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윤씨 등은 ”마치 우리가 사건 당일 윤군을 목격한 것처럼 보도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우리가 말하지 않은 내용으로 경찰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경찰은 지난 21일(1990년 12월 21일) 오후 윤군의 진술을 토대로 사건 당일인 지난달 15일(1989년 12월 15일) 오후 6시35분께 현장 근처에서 윤군을 목격했다는 여성 노동자 윤아무개씨 등 3명을 목격자로 내세웠으나 윤씨 등은 22일 오전 기자들과 만나 ”평소 출퇴근 길에 자주 마주쳐 윤군의 얼굴을 알고 있었지만 지난달 15일 현장 근처에서는 윤군뿐 아니라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경찰의 목격자 주장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윤씨 등은 ”사건 당일 윤군을 보았느냐는 형사들의 질문에는 ‘날이 어둡고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어 2m 앞도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행인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또 ‘윤군이 여성의 가슴을 만지는 등 추행했다’고 밝힌 경찰의 주장도 허위인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 정씨는 ”경찰이 고소장을 작성해 읽어보게 한 뒤 손도장을 찍을 것을 요구해 마지 못해 찍어주었을 뿐 범인을 보지 못해 윤군을 범인으로 지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후 수사과정에서 윤군이 변호사에게 ”김양을 살해한 적이 없다”며 범행을 부인한 부분을 삭제하고 변호사접견보고서를 허위로 작성하기도 했다. 윤군은 1991년 2월 검찰이 ‘범인이 아니다’라고 불기소결정을 내린 뒤에야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9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윤군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경찰은 화성일대의 주민·학생·교사·군인 등 3만여명을 대상으로 사건 당일의 행적과 혈액형 등을 무차별적으로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경찰이 혐의가 없는 용의자들을 조사하면서 마구 때리는 등 가혹행위를 해 1명이 정신이상 끝에 자살하고 다른 1명은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윤군이 현장검증을 하는 자리에서 ‘거짓자백을 했다’고 실토한 다음 날인 12월 24일 비극적인 소식이 보도된다. 주민들은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나온 38세 차모씨가 정신이상증세를 보이다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증언했다.

김모군은 9차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에 연행됐다. 김군의 작은어머니가 김군의 등에 남아 있는 고문흔적을 가리키며 김군이 경찰에게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모군은 9차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에 연행됐다. 김군의 작은어머니가 김군의 등에 남아 있는 고문흔적을 가리키며 김군이 경찰에게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겨레

또 다른 용의자로 몰렸던 18세 김군은 현대여인숙에서 경찰에게 온몸을 몽둥이로 맞아 허리통증과 두통을 호소하며 극도의 정신불안증세를 보여 치료를 받았다. 그나마 김군은 어머니가 경찰에 항의를 하러 찾아가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구타를 당해야 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형사들은 김군의 머리를 벽에 찍으며 구타를 했고, 김군의 눈을 가린 채 팔을 뒤로 묶어 수갑을 채우고 1시간 동안 몽둥이로 김군의 머리와 허리 등 온몸을 마구 때리며 범행 사실을 자백하라고 요구했다. 김군이 그래도 거부하자 형사들은 20cm 빗으로 온몸을 구타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형사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수사를 이어나가는 사이, 1991년 4월 4일 목도리로 목이 졸린 채 숨져 있는 69세 권씨가 발견됐다. 10번째 화성연쇄살인사건이었다. 9차 사건이 벌어진지 140일 만이었다. 같은 달 17일 살인사건과 관련돼 경찰의 조사를 받던 33세 장모씨가 감시소홀을 틈타 달아난 뒤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했다. 경찰은 ”장씨는 파출소에 연행돼 화성사건 수사본부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별다른 혐의점이 없어 이날 밤 잠을 잔 뒤 아침에 화장실에 가는 척 하다 달아났다”면서 장씨에 대한 강압수사 의혹을 부인했다. 

 

‘자칭 심령술사’의 제보를 받고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경향신문, 1993년 7월13일자
경향신문, 1993년 7월13일자

10번째 사건에 대한 수사도 진척 없이 시간만 흘렀다. 그렇게 2년이 지난 1993년 7월, 경찰이 화성사건 4, 5차 범행을 자백한 41세 김모씨를 붙잡았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서대문경찰서였다. 김씨를 붙잡게 된 경위는 더 엉뚱했다. 심령술사를 자처하는 47세 재미교포로부터 ”꿈속에서 김씨의 이름이 적힌 편지를 받았다”는 제보를 받고 시작한 수사였다. 검찰은 ”용의자 김씨의 진술과 경찰의 조사내용을 검토한 결과 일관성이 없고 당시 상황과 진술이 일치하지 않는 등 문제점이 발견됐다”며 경찰에 보강수사를 지시했다.

경찰이 더 이상 혐의점을 찾지 못하고 김씨를 석방한 뒤 김씨는 ‘경찰의 강압수사에 못 이겨 거짓자백을 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게다가 김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던 ‘자칭 심령술사‘는 심령술사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심령술사가 아니라 용인정신병원에서 ‘장기요양이 필요한 편집증 환자’로 진단 받은 사람이었다. 

용의자로 몰렸던 김씨는 자신의 어머니 앞으로 ”경찰의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을 했다. 진실을 밝혀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기도했다. 김씨는 중태에 빠졌으나 회복한 뒤 이듬해인 1994년 1월 국가를 상대로 1억25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김씨와 김씨의 부인은 소장에서 ”지난해 7월9일부터 5일 동안 서대문서 형사과 경찰관들한테 물고문·폭행 등 고문수사를 당했으며 살인피의자로 누명을 쓰는 바람에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1995년 7월 서울지법 서부지원 민사2부는 ”국가는 김씨와 김씨 가족에게 위자료 3800만원을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김씨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1997년 2월 10일 김씨의 아내는 김씨가 수원 자택에서 숨져 있는 것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자살을 기도한 뒤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이후에도 거의 매일 술에 의지해 살아가다 건강이 악화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윤씨에겐 없고 윤군과 김군에겐 있던 것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수사대상자는 2만1280명. 지문 대조는 4만116명이었고, 용의자로 몰려 조사받은 사람은 3000여명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4명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경찰은 8차 사건의 범인은 윤씨라며 그 근거로 ‘윤씨가 자백했다‘는 점과 ‘과학수사였다‘는 점을 꼽는다. 경찰은 윤씨를 붙잡은 직후에 진행된 수사(윤군, 김군)에서 구타를 동반해 강압적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윤씨가 ‘고문에 못 이겨 자백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윤군과 김군도 구타에 못 이겨 자백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윤씨와 윤군·김군에겐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윤씨에겐 가족이 없었고, 윤군과 김군에겐 가족이 있었다. 윤씨가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당시 윤씨를 담당했던 교도관 A은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윤씨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것이라면, 왜 하필 그에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라는 질문에 ”가혹 행위를 당해도 경찰에 달려가 ‘왜 우리 애 고문시키냐’며 난리쳐줄 부모가 없는 거다”라고 답했다. 

만약 윤군과 김군에게 ‘왜 우리 애 고문시키냐‘며 난리치는 부모가 없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졸지에 용의자로 몰려 ‘현장검증’까지 하게 된 윤군에게 ”죽어도 좋으니 양심대로 말하라”며 외쳤던 아버지가 없었다면, 낯선 여관에서 몇시간째 구타를 당하면서도 자백을 거부하던 윤군을 위해 경찰에 항의하러 온 어머니가 없었다면, 그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이춘재의 등장이 이 시대에 묻고 있는 또 다른 질문인지도 모른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이춘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