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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의 죽음은 엄청난 아픔을 주었다. ‘그냥 개일 뿐 아니냐’라고 하지는 말아달라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12년을 준 존재였다

  • 이원열
  • 입력 2019.10.13 10:59
  • 수정 2019.10.13 11:01
2019년 3월
2019년 3월 ⓒLauren Twigg Krupica

2018년 11월, 그레이시의 발톱이 카펫을 쥐는 소리를 들었다. 부드럽게 살짝 긁는 소리였는데, 그때부터 나는 그레이시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최소한, 내 안의 비관주의자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구글 검색을 시작했는데, 가장 큰 충격은 퇴행성 척수 장애(DM)였다. 내 개 그레이시는 결국 DM으로 2019년 9월 8일에 죽었다.

DM은 척수에 영향을 주는 퇴행성 질환이다. 인간이 걸리는 근위축성 측생 경화증(루게릭 병, ALS)과 비슷하다. 몸 뒷부분 떨림과 뒷발의 주먹결절형성(너클링)이 초기 증상이다. 이어서 뒷다리가 약해지다가 마비된다. 다음은 신장이다. 그리고 앞다리. 호흡계. 이 병은 고통이 없으며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너클링’이 처음 생겼을 때 내 남편 트로이와 나는 즉시 그레이시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다. 의사의 예측은 낙관적이었다. DM의 가능성은 낮다고 했다. 너클링은 뒷발 한 개에 간헐적으로 생겼을 뿐이었다. 강화 및 운동에 집중하는 보수적 접근이 합리적인 첫 단계였다.

2018년 12월, 내 부모님 집의 반짝이는 나무 바닥 위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레이시의 뒷다리는 살짝 미끄러졌다. 2월에는 우리 거실에서 간식을 먹으러 뛰어왔다. 다리를 강화시키기 위한 훈련이었다. 3월에는 걸을 때 몸이 더 많이 흔들렸고 오른쪽 뒷다리를 땅에 단단히 대기 힘들어해서, 세라피를 시도하고 X-레이 촬영도 했다. 뼈는 멀쩡했다. 그레이시 정도 나이의 개들에게 있는 관절염조차 없었다.

잘 버티고 있던 2019년 2월
잘 버티고 있던 2019년 2월 ⓒLAUREN TWIGG KRUPICA

4월에는 개 신경학자를 찾아갔다. MRI를 해볼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MRI 촬영을 하기 전에도 그는 DM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DNA 샘플을 보내 유전자 검사를 받길 권했다. 그러는 동안 그레이시의 오른쪽 뒷다리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DNA 검사 결과가 5월 중순에 나왔다. “A/A 동형 접항성 위험, DM 돌연변이 2개”.

우리는 낙담에 빠졌지만 굳게 맞서기로 하고, 그레이시가 잘 지낼 수 있도록 헌신했다. 다리 보호기구와 발 견인 보조 기구를 다 시험해 보았다. 오른쪽 다리 기능을 할 수 있는 용구를 샀다. 그리고 휠체어를 샀다. 가장 영양분이 풍부한 음식과 보조제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구입했다. 5월에 실금이 시작되자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는 기저귀와 소변 패드를 샀다.

7월에 심한 요로감염증이 시작되었다. 8월에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동물병원에 갔다. 하지만 그레이시는 좋아졌다! 공을 갖고 놀았고, 훨씬 더 크고 어린 여동생 개에게 짖고 덤볐고, 앞발을 내밀어 우리와 악수를 했다. 노동절에 열린 야외 요리 파티에서는 관심과 간식을 듬뿍 받았다. 우리의 계획은 변하지 않았다. 그레이시가 그레이시답게 삶을 즐기는 한에는 우리는 계속해서 그레이시와 함께 싸울 것이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면 우리가 알아차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레이시를 배려하는 결정을 내릴 것이었다.

그레이시는 우리 손에서 결정권을 빼앗아갔다. 그레이시가 간식을 받으려고 트로이와 마지막으로 악수를 한지 이틀 뒤, 횡경막이 기능을 멈춘 것 같았다. 트로이는 예약해 두었던 동물병원에 가려고 그레이시를 안아들고 차에 태웠다. 그레이시는 트로이의 눈을 보더니 죽었다.

그레이시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준 충격은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정신적 불화를 낳았다. 일어날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일어났다. 그러니 충격적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레이시가 죽은지 몇 주가 지난 지금도 우리는 충격에 빠져 있다.

필자와 그레이시
필자와 그레이시 ⓒLAUREN TWIGG KRUPICA

그레이시는 아팠다. 지금 돌아보면 7, 8월에는 정말 많이 아팠다. 집에선 오줌 냄새가 났다. 내가 일하러 가기 전 아침에 하던 일들은 ‘그레이스 빨래’ 때문에 30분 길어졌다. 나는 지각도 많이 했다. 부엌 카운터에는 스테로이드 주사기, 여러 증상을 위한 알약 병들이 즐비했다. 냉장고에는 비상 사태의 수분 공급을 위한 염화나트륨 주머니가 들어있었다. 식료품 저장실에는 피하주사기들이 있었다. 트로이는 그레이시의 방광을 비우는 법을 익혔고, 4~5시간 마다 방광을 비워주어야 해서 일하다 말고 집에 돌아왔다.

자세를 바꿔주고 흡수 패딩을 바꿔주느라 매일 밤 최소 세 번 자다 일어났다. 그레이시가 죽기 전까지 약 65일 동안의 대화는 오직 그레이시에 대한 것이었다. “밥 먹였어? 너 집에 왔을 때 기저귀가 젖어 있었어? 따뜻할까? 집에 오는 길에 닦개를 더 사와줄 수 있어? 오늘 왜 안 먹는 것 같아? 동물의원 응급실에 가야할까, 아침까지 기다려야 할까? 오늘은 참 괜찮지?”

공포와 걱정이 끊이지 않았지만 다른 길이란 없었다. 그레이시가 ‘안 좋은’ 날은 좋은 날 사이사이에 있었을 뿐이었다. 행복하고 의젓해 보이지만 기계적 움직임이 좀 힘들 뿐인데 어떻게 그레이시의 생명을 끊겠다는 선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그레이시의 다리와 방광이 되었다. 우리는 흠 잡을 데 없는 위생 상태를 유지해 주었다. 우리는 동물병원에 거의 늘 있다시피 했다.

우리 신경계는 이제 과하게 돌아간다. 우리는 10개월 동안 어깨를 귀까지 치켜올리고 살았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몇 시간 동안 깊은 안도와 압도적 패닉을 반복해서 느끼다 보니 우리의 뇌 구조가 바뀌었다. 나는 전화가 울리면 굉장히 무섭다. 그러다 ‘나쁜 전화’가 이미 일어났다는 걸 깨닫고, 섬뜩한 안도감이 잠시 치민다. 일을 마치고 언덕에 있는 우리 집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며 해야 할 일들을 할 태세를 갖추다가, 차고에 들어갈 때쯤 할 일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레이시가 죽고 나서 나는 다섯 시간 동안 안고 있었다. 털로 싼 큰 돼지저금통마냥 차갑고 딱딱하고 무거워졌다. 뜰에서 그레이시가 공을 쫓아 달리던 길로 걷는 동안 무거워서 힘들었다. 상실감에 빠진 남편이 32도의 더위에서 굉장히 돌이 많은 찰흙으로 된 우리 뒤뜰에 무덤을 파는 것을 지켜보았다. 남편은 그레이시를 땅 속에 넣고 덮었다. 나의 지난 12년이 마감되었다.

그레이시의 부재는 향수병 같은 느낌이다. 집에 가고 싶지만, 집이 사라졌고 찾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갈 수가 없다. 우리 셋은 12년 10개월 13일 동안 하나의 생태계였다. 그레이시는 트로이와 함께 스포츠 중계를 보며 트로이가 소리지를 때 TV를 향해 함께 소리질렀다. 내가 너무 오래 일하면 내 키보드에 머리를 기댔다. 저녁을 먹을 때마다 한 입 달라고 졸랐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선물 포장을 뜯어 열었다. (자기 것도 아니었다. 그레이시는 그냥 뜯는 걸 좋아했다.) 조카들이 자고 갈 때면 끌고 다니고 옆에 누워있곤 했다. 10월 25일마다 생일 호박 파이 한 조각을 먹었다. 호수에서 보트를 탈 때면 공동 선장이었다. 그레이시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가면 ‘할아버지’가 주는 아이스크림 조각을 먹었다. 매일 밤 우리 옆에서 잤다. 그런데 이제는?

그레이시가 죽고 며칠 동안 트로이와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나는 잠들자마자 심장이 마구 뛰어 깨곤 했다. 나는 지금도 퇴근하고 집에 오기가 싫다. 집에 비극이 배어있는 것 같아서이다. 죽음의 망령은 몇 달 전부터 떠돌았지만 친숙한 적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우리는 매일매일의 전략을 세우고 그에 따랐다. 우리가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죽음이 집에 찾아와 기습하고 승리자가 되었다.

영화에서는 누가 죽으면 사람들이 쓰러져서 운다. 2019년 9월 7일 이전에는 나는 다행히도 그걸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젠 안다. 누가 죽으면 사람들은 정말로 쓰러져서 울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이후 그렇게 오래 바닥에 있어본 적이 없었다. 테라스에서. 그레이시가 마지막으로 숨을 쉬었던 작은 침대에서. 무덤 옆 파티오에서, 거실에서. 침시에서. 이 슬픔이 물리적으로 나를 밀어내리는 게 보인다. 땅보다 더 낮은 곳이 있다면 슬픔은 찾아낼 것이다.

그레이시는 배를 참 좋아했다. 2019년 7월
그레이시는 배를 참 좋아했다. 2019년 7월 ⓒLAUREN TWIGG KRUPICA

뜰에 새로 만든 무덤을 차마 볼 수가 없어 주위에 장미를 심고 정원을 만들었다. 작은 하얀 말뚝 울타리를 만들고 디딤돌을 좀 놓았다. 그레이시 위에 심은 작은 장미 덤불 두 개 옆에 벤치를 놓았다. 더위 속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해가 지는 동안 작업 장소를 기를 쓰고 살핀 것이 우리가 그날 밤 잠들 수 있게 해주었다. 근사한 것을 만들며 우리의 비통함이 생산성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었다.

개의 죽음을 슬퍼하는 건 잘못된 일이란 생각도 든다. 내 청년기 전체를 함께 하며 힘을 존재를 잃었다는 사실이 나를 무너뜨렸지만, 거기에다 나는 죄책감과 수치도 느꼈다. 질병, 폭력, 사고로 자녀를 잃은 사람들이 있다. 수의사 비용은 고사하고 생필품을 살 돈도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 개가 살았던 것보다 못한 삶을 살아온 12살짜리 어린아이들이 있다. 우리가 그레이시에게 주었던 만큼의 관심과 훌륭한 돌봄을 받지 못하는 병든 노인들이 있다. 언제 어느 때나 사람들과 이 지구에 영향을 주는 다른 끔찍한 일들이 잔뜩 있다. 그건 문제다. 나도 안다. 미안하고, 그런 일들에 대한 나의 슬픔이 내가 죽은 나의 개에 대해 느끼는 뼈아픈 슬픔을 바꾸어 주길 바란다. 이 개를 애도하는 사실의 불편한 특권을 어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한편, 내겐 이 개를 애도할 필요가 있다.

비통함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럽다. 미국인들은 매년 반려동물에 수십억 달러를 쓰지만, 때로는 만찬 테이블에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하고 소셜 미디어 계정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 동물들의 죽음에는 묵언의 한 마디가 따라붙는다. ‘그냥’. 그냥 반려동물. 그냥 개.

반려동물이 죽으면 슬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지만, 슬픈 일들의 계층에서 경조휴가가 주어질 정도의 높은 위치는 아니다. 실용적인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내 아버지가 13세 때 돌아셨다. 그때 아버지가 받은 큰 감정적 충격은 새로운 경제적 상황과 아버지가 이제 ‘가장’이라는 새로운 현실과 결합되었다.

반려동물이 죽었을 때의 부수적 영향은 없다. 나는 내 개의 죽음으로 인해 소득 감소를 겪지는 않았다. 저녁을 차리거나 잔디를 깎을 때 그레이시의 도움을 받은 적도 없다. 이제부터 내가 관리해야 할 유산도 없다. 공개적으로 경의를 표하기 위한 상영회나 장례식도 없다. 상실만이 있을 뿐이다. 개 없는 개 목걸이, 내 침대 머리맡의 푹 들어간 부분, 지금의 나 자신과 그레이시가 있었을 때의 나 자신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혼란.

그레이시가 앓았던 병이 그레이시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걸 알아보지 못한다면 풍요롭고 큰 영향을 주었던 12년을 괘씸할 정도로 축소해 버리는 것이다. 그레이시는 강력했고, 병을 안고 그렇게 오래 잘 지냈다는 건 그레이시의 정신적, 육체적 투지를 보여준다. 평생 몸무게 약 14kg, 섰을 때 키 약 30cm였던 그레이시는 조그만 동물은 아니었지만 아담하고 아름다웠다. 밝은 오랜지색과 흰색이 섞여 있었고 귀청이 떨어질 듯 크게 짖던 그레이시는 주목을 끌었다.

우리에게 있어 부모이자 아이였다.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에게 보호받았다. 내가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하던 동물인형이 현실로 온 존재였다. 순수한 촉각적 편안함과 따뜻함에다, 악의라곤 품을 수 없는 진정하고 독특한 성격까지 지녔다. 음식, 물, 전반적인 돌봄을 주고 무조건적인 사랑, 수용, 연대감, 끝없는 기쁨을 받는 것은 이게 사실인가 싶을 정도로 좋았다. 안개 같은 비통에 빠진 채 나는 정말로 사실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2006년 12월에 눈을 맞추자마자 그레이시(Gracie)라고 이름지었다. 우아해(graceful)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뒤로 ‘그레이스’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본 적이 없었다. Merriam-Webster.com의 첫 번째 정의는 “인간이 갱생이나 청정화되었다는 이유로 받은 분수에 지나친 신의 도움”이었다[주: grace의 이 의미는 한글 단어 ‘은총’에 가깝다]. 그레이스는 늘 그런 존재였다. 나의 코기가 DM에 걸렸다는 건 순수한 불운이지만, 억울해하는 것은 그레이스의 정신에 대한 모욕이다. 이런 소중한 생명체와 우리 삶의 일부를 함께 할 수 있다니 얼마나 큰 행운인가. 은총이 가득한 여러 해를 가졌다는 게 나로선 얼마나 큰 행운인가.

 

* HuffPost US의 My Dog Gracie’s Death Absolutely Devastated Me. Please Don’t Say She Was ‘Just A Pet.’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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