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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낳고 국가보안법이 키운 124년 역사의 검찰권력

'무소불위' 검찰은 어떻게 탄생했나?

프랑스혁명 이후인 1808년 나폴레옹은 형사소송법을 개혁하면서 기소권자인 검사에게 직접수사권을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프랑스 법률가들은 “기관의 성격상 검사는 소추권을 가진 당사자로서, 그가 수사를 시행하는 것은 정의에 어긋나고 도시를 위협하는 작은 폭군이 될 것”이라고 거부했다. 기소권과 수사권이 검찰에 집중되면 지배권력의 이익을 위해 악용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프랑스 형사소송법은 ‘소추(공소제기)-수사(예심)-재판의 분리 원칙’을 확립했고, 이 근대 검찰 제도는 독일 등 유럽 각국의 모델이 됐다.

200년 넘게 흘렀지만 한국에서는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 막강한 권력의 출발점은 일제강점기 형사 제도다. 갑오개혁 때 근대화의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견제·분리의 원칙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검찰의 권력 집중은 더해졌다. 사상범을 처벌하기 위해서든, 경찰의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서든 검찰은 권한을 키우는 기회로 삼았다. 혼란 속에서도 검찰 중심의 수사 체제가 만들어지고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중앙집권적인 검찰 제도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검사 역시 ‘사법관’이라는 인식 확산

한국 검찰 제도는 1895년 ‘재판소구성법’ 공포에서 시작됐다. 갑오개혁이 낳은 사법 근대화의 산물인 이 법은 재판과 행정을 나누고, 재판권을 재판소로 통일하는 내용을 담았다. 검사는 재판소의 직원으로 수사와 기소권을 행사하게 돼 있었다. 이 법 제정에도 일본인들이 관여했지만,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일본 검찰 제도가 더욱 노골적으로 이식됐다. 1945년 해방에 이를 때까지 조선 검찰 제도는 19세기 유럽대륙법계의 근대 검찰 제도 형식을 따왔지만 내용은 후진적이었다. 일본 검찰 제도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탓이었다.

일본은 1808년에 제정된 프랑스 형사소송법을 토대로 형사 제도가 마련됐다. 이에 검사는 직접 사건을 세밀하게 수사하지 않았다. 경찰 수사에 기초한 사건을 수사판사에게 보내고 공소를 제기·유지하는 중계자 몫만 맡았다. 수사 단계부터 경찰의 수사를 지휘하고, 구속영장 발부나 기소 여부까지 판단하는 것은 수사판사였다. 이들은 피의자 신문, 조서 작성 등도 맡는다.

하지만 일본 검찰이 힘을 키우면서 그 위상과 역할에 변화가 생겼다. 경미한 범죄자를 불기소(기소유예)하는 ‘검사의 기소편의주의’ 관행이 뿌리내리고 검사 역시 판사에 준하는 ‘사법관’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이에 형사소송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1901년부터 움텄다. 검찰의 압수수색 등 강제처분권을 확대하고, 기소편의주의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또 검사와 수사판사의 경계를 허물고 검사가 공판 전 절차의 지배자로 나서고자 했다.

이러한 검찰권 강화는 특이하게도, 일본보다 앞서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시행됐다. 조선총독부가 1912년 ‘조선형사령’을 공포하면서 검사와 사법경찰관(경찰)에 무제한 강제수사할 자유를 부여한 것이다. 조선형사령을 보면, 검사는 현행범이 아닌 사건이라도 “급속한 처분이 요하는 때”는 공소제기 전에 영장을 발부해 검증, 수색, 물건 압수를 하거나 피고인·증인을 신문할 수 있도록 했다. 검사에게는 20일 이내의 피고인 구류도 허용됐다. 경찰도 이러한 강제처분을 임시적으로 할 수 있도록 했고, 구류와 동일한 14일 유치권까지 줬다. 수사판사의 영장이나 신문 없이도 검사와 경찰은 피의자를 일정 기간 붙잡아놓고 강제수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급속한 처분이 필요한 때”라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았는데, 그 판단의 주체는 전적으로 검사와 경찰이었다. 수사기관이 거의 자유롭게 강제수사할 여지를 열어둔 셈이다. 이는 근대적 형사소송법의 일반적 원칙을 배제하는 대표적 독소조항이다.

이러한 ‘급속처분’ 조항이 일본 형사소송법에 등장한 것은 1922년(다이쇼 형사소송법)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이 일본보다 10년이나 빨랐던 셈이다. 조선인을 억압하기 위해 일본 검찰 제도보다 막강한 권한을 검사에게 미리 준 것이었다. 당시 검찰과 재판소, 경찰은 일본인이 장악한 상태였다.

 

 

ⓒ한겨레

 

소추-수사-재판의 분리 원칙 무너져

검사와 경찰의 강제수사가 보편화하자 피의자를 일단 체포해 자백을 받아내는 방식으로 수사가 진행됐다. 언론인 박은식의 증언을 보자(<한국독립운동지혈사>, 1920년).

“경찰이 보고 죄를 범했다고 인정되는 자는 사법(재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체포했다. 그자뿐만 아니라 그의 친척, 친구까지 관련시켜 사실의 유무와 경중을 불문하고 신문에 앞서 잔인한 형벌을 가했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여러 날을 감금한 뒤에 비로소 신문하기 시작하는데, 또한 형벌을 가하여 자백을 강요하고 아무런 증거도 없이 자백만으로 죄를 성립시킨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검거된 인원의 절반이 경찰에서 풀려나고, 검찰에 송치된 인원의 절반 이상이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약식명령 사건을 제외하면 예심이나 공판에 회부되는 인원은 애초 검거 인원의 10~20%에 그쳤다. 불기소 사건 가운데에도 40% 안팎이 무혐의였다. 많은 무혐의와 불기소처분은 검찰과 경찰의 공권력 행사가 무능하고 가혹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경찰과 검찰이 “비과학적 검거”를 일삼아 “7인의 범죄자를 검거하기 위해 100명을 잡아들인다”는 언론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동아일보> 1929년 12월6일치)

공판정(법정) 모습도 일본과 조선은 확연히 달랐다. 일본에서는 검사와 변호인이 재판장의 허가를 받아 피고인·증인 등을 직접 신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판사가 일본인, 피고인·증인이 조선인인 탓에 통역이 불편하다며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검사와 변호사가 증인·피고인을 직접 신문하지 못하니까 재판은 서면 심리를 위주로 하는 ‘조서재판’이 됐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형사 절차는 검사와 경찰이 ‘급속처분’이 필요하다며 피의자를 강제로 붙잡아 자백을 강요하는 ‘신문’을 하고 조서를 작성해 이 조서를 법정에 제출해 증거로 삼아 유죄를 이끄는 게 일반적이었다. 결국 ‘강제수사-자백 강요-조서재판’이라는 관행이 굳어져갔다. 1934년 일본 재판을 방청한 조선인 변호사 강병순이 조선 재판과 비교한 글을 보자.

“이 (일본) 공판심리는 당사자대등주의가 가장 완전하게 발휘된 것이다. 노련달식한 변호인이 기소 사실이 미흡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수속상의 흠을 들어 재판장의 관용 아래 검사에게 비난의 화살은 쏘아붙였고 동경검사국의 정예(의 검사)가 나서 사실을 설명하고 필요한 요건을 보충하도록 만들었다. 완전히 공격과 방어의 지위가 뒤바뀐 것 같았다. 이렇게 3자(법원·검찰·변호사)가 서로 견제하고 제휴하며 형사사법의 사명을 완수하고 재판의 오류를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변호인의 변론을 번거롭고 자질구레한 것으로 여기는 재판관, 검사독선주의에 도취해 변호인을 깔보고 흘겨보는 검사, 하등 경청할 가치 없는 변론으로 어물어물 얼버무리는 변호인을 다분히 포함하는 조선의 사법기관이 관점을 바로잡고 거친 면을 다듬어 좀더 가깝고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일은 언제가 될 것인가.”(<법정신문> 1937년 7월5일치)

 

 

4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검찰청 4층에 있는 검찰역사관에서 대한민국 검찰 제도의 성립 과정을 소개하는 전시관을 직원이 설명하고 있다
4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검찰청 4층에 있는 검찰역사관에서 대한민국 검찰 제도의 성립 과정을 소개하는 전시관을 직원이 설명하고 있다 ⓒ한겨레

 

 

국가보안법으로 검사 위상 올라가

일제강점기에 검사의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과 직접수사권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조선형사령은 경찰이 검사의 지휘를 받아 범죄를 수사하고 검사의 직무상 명령이 복종해야 된다고 규정했지만, 실상에서 검사가 경찰에 대한 확고한 통제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경찰은 ‘급속처분’이 필요한 사건에서 그 취지를 검사에게 ‘통지’하고 강제수사를 독립적으로 할 수 있었다. 또 벌금·구류·과료 등 범죄 즉결처분과 무죄, 면소, 훈계방면 등도 경찰은 가능했다. 이는 검사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었다.

검사의 통제력이 약했던 이유는 검사 수가 부족한 탓도 컸다. 1910년대에 식민지 조선에는 총 60여명의 검사가 있었는데, 법원에 속한 검사를 빼고 나면 실제 일선에서 수사와 송무를 담당할 인력이 절반 수준이었다. 이 상황에서 검사가 적극적으로 수사권과 수사지휘권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일제강점기 초기 검사는 경찰의 수사 결과에 전적으로 의존해 사건을 법원에 넘겨주는 데 충실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검찰 관료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검사가 ‘수사의 수뇌’로서 직접수사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일본 검찰은 이미 직접수사를 검찰사무의 중추로 내세우고, 정치권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1920년부터 조선에서도 검찰이 능동적·적극적으로 직접수사하도록 검찰 당국이 일선 검사들을 독려했다. 실제로 검찰이 직접수사한 사건 비율로 보면, 1910년대에는 10% 안팎에 그쳤지만, 1920년대 들어 늘어나 1931~33년에는 30%를 웃돌았다. 검찰이 범죄의 수사와 소추에 적극 임한 것이다.

큰 변화는 일제강점기 후기에 찾아왔다. 1941년 3월에 공포된 ‘국가보안법’과 ‘치안유지법’ 개정안으로 검사의 위상이 획기적으로 바뀐 것이다. 두 법을 위반한 사건을 수사할 때 검사에게 피고인의 소환, 구인·구류, 피고인과 증인신문, 압수, 수색, 검증, 감정, 통역과 번역 등의 강제처분권이 부여됐다. 하지만 경찰은 검사의 명령에 의해서만 이들 처분을 할 수 있어, 이전과 달리 모든 강제수사권이 검사에게 집중됐다. 검사 중심의 일원적 수사 체제가 수립된 것이다. 두 법은 고스란히 조선에 적용됐고, 검사의 수사주도권이 한층 강화됐다. 이처럼 일본의 추세에 앞서가며, 혹은 그에 보조를 맞추며 조선의 검찰은 권력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경찰에 대한 비난 여론을 등에 업고

1945년 해방 직후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식민지 사법체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방식은 권력을 분립하고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선 강제수사가 무한정 보장됐던 검사 권한의 축소가 필수였다. 하지만 검찰은 기존의 지위와 권한을 지키고 조직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노력은 결실을 보았다.

예컨대 미군정은 검찰과 경찰의 상명하복 관계에 변화를 꾀하려 했다. 1945년 12월29일 하달된 ‘법무국장의 검사에 대한 훈령 제3호’를 보면, “검사의 선결직무는 관할재판소에 사건을 공소함에 있고 세밀한 조사는 검사의 책무가 아니”며 “검사는 경무국(경찰)이 행할 조사사항을 경무국에 의뢰”하되 “실제로 법적 검토를 요하는 조사에 관하여 필요하다면 관여한다”고 규정했다. 미국식으로 경찰에 1차 수사권을 주고 검찰과 경찰의 관계도 상호 협력적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으로 읽혔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비슷한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경찰은 이 훈령을 주관적으로 해석해 검찰에 비협조적 모습을 보였다. 경찰은 군정포고 위반 범죄를 한국 검찰에 송치하지 않고 미군정 재판소에 넘겨버리고 검찰의 수사지원 요청도 외면하기 일쑤였다. 미군정 또한 경찰을 두둔했다. 이에 맞서기 위해 검찰은 갖은 트집을 잡아 경찰보고서를 반려하거나 경찰의 피의자 고문 사건을 가차 없이 구속 기소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웠다.

검찰과 경찰이 격하게 대립하자 여론은 검찰 편에 섰다. 해방 이후 중앙집권적 조직으로 개편된 경찰이 고문 등 심각한 인권 유린을 자행하고 권력을 남용한 탓이었다. 검찰은 경찰의 행태에 대한 비난 여론을 등에 업고 수사지휘권을 확보하는 데 나섰다. 경찰이 검사를 보좌해 검사의 지휘명령을 받아 범죄를 수사한다는 점을 법률로 못박자고 건의한 것이다.

1947년 대검찰청이 법원과 검찰청의 분리를 위해 마련한 ‘검찰청조직법안’을 보면 당시 검찰이 꿈꾼 ‘검사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형사사건에 관하여 어떤 범죄라도 직접 또는 사법경찰관리를 지휘하여 수사하고, 그 결과에 의해 공소 제기 또는 불기소처분의 결정을 하며, 공판 진행에 필요한 사무를 수행한다.” 검찰청법이 1949년 12월20일 제정되면서, 이 꿈은 실현됐다.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도 여전히 재판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았다. 원래 조서 작성은 판사의 권한에 속하는데도 대법원은 이를 문제제기하지 않았다. 1950년 나항윤 판사의 글(‘법창수상’·<법정>)에서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준전시체제에 돌입한 현 단계에 있어 물적 증거의 수집이 극도로 곤란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에 관하여 법정에서 물적 증거가 없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부인하는 것으로써 표어를 삼고 있는 그자들을 유죄의 심증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단순히 형식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서 무죄판결을 선고함으로써 그자들로 하여금 법망을 뚫고 나가게 할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다.”

 

 

ⓒ한겨레

 

“검경 수사권 분리는 100년 후에나”

1954년 1월9일 서울 태평로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형사소송법 초안에 대한 공청회’가 열렸다. 이날 첫 안건은 ‘검사와 사법경찰관리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범죄 수사에 있어서 사법경찰관에게 주도권을 줄 것인가 또는 현행 형사소송법과 마찬가지로 사법경찰관리를 검사의 지휘하에 둘 것인가, 말하자면 사법경찰관리와 검사와의 관계가 상호 협력 관계이냐, 상명하복의 관계에 둘 것이냐,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해달라.”(전문위원 서대교)

미군정 초기에 떠올랐던 ‘상호 협력’과 ‘상명하복’이 다시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검사 출신인 엄상섭 의원이 말했다. “검찰기관이 범죄 수사의 주체가 된다면 기소권만 가지고도 강력한 기관인데 수사의 권한까지 더하게 되니 이것은 결국 ‘검찰 파쇼’를 가지고 온다. 우리나라는 경찰이 중앙집권제로 되어 있는데, 경찰에다가 수사권을 전적으로 맡기면 ‘경찰 파쇼’라는 것이 나오지 않나 (우려된다). 검찰 파쇼보다 경찰 파쇼의 경향이 더 세지 않을까? 이런 점을 봐 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오직 우리나라에 있어서 범죄 수사의 주도권은 검찰이 갖는 게 좋다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장래에는 우리나라도 조만간 수사권하고 기소권하고는 분리하는 이러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엄 의원의 말에 한격만 검찰총장은 ‘시기상조론’을 들고 나섰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수사는 경찰에 맡기고 검사에게는 기소권만 주자는 것은 법리상으로는 타당하다. 하지만 앞으로 100년 후면 모르지만 검사에게 수사권을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일제 ‘순사’가 남아 있는 경찰에 수사권까지 주는 것은 어렵다는 주장이었다.

1954년 9월23일 국회를 통과한 형사소송법에서는 △검찰의 수사권과 사법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 △검찰 내 사법경찰 인력 도입 △검찰 작성 피의자 신문조서 증거능력 인정 △사법경찰관의 강제수사에 대한 검사의 영장 통제 등을 규정했다. 이 골격은 6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유지된다.

 

검찰의 ‘칼바람’에 요동

수사권과 기소권 등 검찰에 집중된 권한이 분산되지 않는 이유는 검찰이 이를 거부하는 대신 그 권한을 토대로 정권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방식은 이렇다. 정권 전반기에는 과거 정권 비리를 수사해 현 정부의 신임을 얻어 개혁의 시간을 피한다. 정권 후반기에 들어서면 현 정권 비리에 칼날을 들이대 야당이 검찰개혁의 방패막이가 되도록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초기에는 적폐 수사에 힘을 쏟더니 이제는 조국 법무부 장관에 칼을 겨누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검찰의 ‘칼바람’에 한국 사회는 어김없이 요동친다. 태어난 지 124년이 지났지만 권력분립이 여전히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무엇보다 검찰의 힘은 갈수록 커져간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에는 보안사나 국가정보원 등이 권력을 독점했지만, 문민정부 들어와서는 그 자리를 검찰이 차지한 것이다. 헌정 사상 첫 정권교체를 이룬 1998년 4월, 김대중 대통령은 법무부를 찾아가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검찰은 스스로 권력으로 자리매김하며 선출된 권력인 문재인 정부와 맞서는 지경이 됐다. 일제강점기에 탄생한 비정상적 검찰 권력의 어두운 그림자가 여전히 짙다.

참고문헌: 문준용 <법원과 검찰의 탄생>(2010·역사비평사), 대법원 ‘바람직한 형사사법시스템의 모색’(2004), 손영조 ‘검사의 신문조서 작성권한에 관한 연혁적 비교연구’(2018), 신동운 ‘제정 형사소송법의 성립경위’(2004), 심희기 ‘일제강점기 조서재판의 실태’(2006), 유주성 ‘수사와 기소 분리를 위한 쟁점과 과제’(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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