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2019년 10월 01일 15시 27분 KST

리처드 닉슨에게는 '비밀 테이프'가 있었다. 트럼프에게는 '기밀 녹취록'이 있다.

비공개 처리된 트럼프와 외국 정상들과의 통화 내역은 닉슨 '비밀 테이프'와 유사하다.

JIM WATSON via Getty Images
A White House staff member calls for no more questions after US President Donald Trump (L) signed Section 201 actions to impose tariffs in the Oval Office of the White House in Washington, DC, on January 23, 2018. / AFP PHOTO / JIM WATSON (Photo credit should read JIM WATSON/AFP/Getty Images)

미국 정부 관계자들이 공개 범위를 제한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외국 관료들과의 대화 녹취록 및 메모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비밀 백악관 테이프’와도 같다. 대통령 탄핵을 시도하는 의원들이 손에 넣고 싶어하는,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정보가 담겨있을지도 모를 자료들이라는 점에서다.

이미 공개된 트럼프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통화 녹취록 요약본에 따르면, 트럼프가 직위와 미국의 국제적 지위를 활용해 자신의 재선을 돕기 위한 수사를 외국 정부에 요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8월12일자로 접수된 내부고발자의 고발장에 의하면, 백악관은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통화 요약본을 “비밀 첩보 활동 등 암호화되는 수준의 정보 보관을 위한 별도의 컴퓨터 시스템”으로 옮겼다.

내부고발자는 “이번 정부에서 대통령 녹취본이 안보상 민감해서가 아니라 단지 정치적으로 민감한 정보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암호화되는 수준의 시스템으로 옮겨진 게 ‘처음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부적절하게 옮겨진 대화가 또 있는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백악관 관계자들은 트럼프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러시아 외교관들과 나눈 대화 내용에 대한 접근권을 강력히 제한하거나 메모를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트럼프가 푸틴, 빈 살만과 나눈 통화 내용은 백악관 안에서도 강력히 그 접근이 제한되어 있다고 CNN은 보도했다. CNN에 의하면 저널리스트 자말 카쇼기가 이스탄불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의해 살해된 직후 트럼프가 빈 살만과 통화한 내용의 녹취록이나 요약본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가 빈 살만, 살만 사우디 국왕, 칼리드 빈 살만 왕자와 나눈 통화 내용도 우크라이나 통화처럼 접근이 제한된 시스템으로 옮겨져 있다고 전했다.

또 트럼프가 제임스 코미 전 FBI 국장을 해고한 다음 날 백악관 집무실에서 러시아 관료들을 만난 자리에서 러시아가 2016년 대선에 개입했더라도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워싱턴포스트 보도도 있었다. 이 회동의 기록 역시 “극소수의 사람들만 볼 수 있도록 제한되어 있다”고 한다.

Jonathan Ernst / Reuters
Ukraine's President Volodymyr Zelenskiy speaks as he and U.S. President Donald Trump hold a bilateral meeting on the sidelines of the 74th session of the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UNGA) in New York City, New York, U.S., September 25, 2019. REUTERS/Jonathan Ernst

 

우크라이나에 대한 트럼프의 행적으로 촉발된 탄핵조사를 이끄는 이들은 우크라이나 통화와 같은 서버에 들어있는 트럼프의 다른 대화들, 즉 정치적으로 민감한 대화들을 감추기 위해 접근이 제한된 다른 대화들을 살펴보고 있다.

“푸틴 등 해외 정상들과의 대화가 본래 목적이 아닌 첩보 활동 보호를 위한 전자 (시스템의)  파일로 따로 분류되어 있다면, 그것들을 숨기고 은폐하기 위한 시도가 있다면, 우리는 이를 알아낼 것이다.” 하원 정보위원회를 이끄는 애덤 시프 하원의원(민주당, 캘리포니아)이 9월29일 NBC ‘밋 더 프레스’에 출연해 밝혔다.

젤렌스키와의 통화가 저장된 서버에 얼마나 많은 녹취록이 저장되어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 녹취록에 담긴 것들이 국가안보 관련 민감한 내용인지, 아니면 젤렌스키와의 통화처럼 그저 정치적으로 민감한 정보에 불과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백악관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다른 통화 내용들도 해당 서버로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트럼프가 오스트레일리아, 멕시코 정상과 각각 나눈 통화 내용이 언론에 유출되자 백악관은 트럼프가 해외 정상들과 통화한 녹취록에 대한 내부 접근 제한을 강화했다.

푸틴 측 대변인은 9월30일 러시아 측의 허가 없이 백악관이 푸틴과의 대화 녹취록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ASSOCIATED PRESS
Richard Nixon performs the last acts of his devastated presidency in the White House East Room, August 9, 1974, as he bids farewell to his Cabinet, aides, and staff. Nixon said only a man in the deepest valley can know how magnificent it is to be on the highest mountain. (AP Photo)

 

닉슨의 녹음 테이프는 워터게이트 호텔에 마련됐던 민주당 전국위원회 선거대책본부 침입 사건에 대한 FBI 수사를 중단시킬 것을 닉슨이 측근들을 통해 CIA에 지시하도록 했다는 결정적 증거(스모킹건)였다. 이 테이프들의 존재는 1971년 백악관 집무실에 도청 시스템을 설치했던 백악관 보좌관에 의해 의회에서 폭로됐다. 이 테이프들은 결국 닉슨이 워터게이트 침입을 덮으려 했다는 백악관 전 법률고문 존 딘의 증언을 입증하는 증거가 됐다.

이와 비슷하게, 비밀 등급이 높은 서버에 숨겨진 트럼프-젤렌스키 녹취록 요약본이 공개됨으로써 내부고발자가 고발장에 적은 상세한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줬다.

이 통화 요약본에는 트럼프가 막 취임해 기꺼이 자신을 도울 준비가 되어있었던 젤렌스키 대통령을 압박해 민주당 유력 대선주자 조 바이든 전 부통령에 대한 수사를 요청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또 트럼프가 2016년 민주당 전국위원회 서버 해킹이 러시아가 아닌 우크라이나 소행이라는 근거없는 음모론에 대한 수사도 우크라이나에 요구한 사실이 드러났다.

애덤 시프 하원 정보위원장은 9월25일에 이 통화 요약본이 공개되자 민주당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꼼짝 못할” 증거라고 말했다. “이 기록이 보여주는 것은 해외 정상에 대한 전형적 마피아 같은 위협”이라고 덧붙였다.

닉슨 테이프가 대통령이 마치 폭력배 보스처럼 측근들에게 국가의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을 동원해 민주당 본부 침입 사건을 덮으라고 지시하고, 범인들의 입을 막으려 했던 사실을 드러낸 것과도 흡사하다.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에 대한 은폐 시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부정행위 역시 테이프로 인해 밝혀졌다. 일례로 워싱턴의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에 린든 존슨 전 대통령을 협박하는데 쓸 수 있는 문서가 존재한다고 생각한 닉슨 대통령이 측근들에게 ‘침입해서 찾아보라’고 지시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닉슨의 비열한 계락을 도운 측근들 중 하나인 척 콜슨은 자신의 여러 비도덕적 행동들을 자랑하듯 말하며 닉슨에게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그 약속은 지켰다).

1974년에 연방대법원이 기념비적인 미국 v. 닉슨 판결에서 공개를 판결하기 전까지 닉슨 테이프는 완전히 공개되지 않았다. 당시 이 판결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졌다. 반면 트럼프의 부적절한 행동을 파헤치려는 의회의 노력은 닉슨 당시에 비해 훨씬 더 당파적이고 분열된 법원의 판결을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 허프포스트US의 Richard Nixon Had ‘Secret Tapes.’ Donald Trump Has Classified Transcripts.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