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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대법원 선고, 무엇을 바꿨나?

'위력의 존재감'과 '성인지 감수성'

 

 

″법원이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을 심리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피의자의 지위나 권세는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무형적 세력에 해당한다. 피고인은 업무상 위력으로써 피해자를 간음 또는 추행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법원이 9일,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상고를 기각하고 항소 법원이 선고한 징역 3년 6개월을 그대로 확정했다. 대법원은 이날 선고공판에서, 그간의 성범죄 판결과 취지를 달리하는 두가지 키워드를 언급했다. 바로 ‘성인지 감수성‘과 ‘무형적 위력’이다.

이는 그간 온정적으로 이어졌던 ‘성범죄 사건’ 판결에 경종을 울리는 결정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신고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가장 큰 장애물은 크게 두 가지다. 상당수의 성범죄가 ‘내밀한 장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범죄 피해사실을 진술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 명시적으로 폭력이 동원되는 피해가 아닌 경우 ‘남녀 사이의 일’이라는 이유로 처벌로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희정 사건은 뚜렷한 피고인의 ‘유형력 행사‘가 없었으며 주요 증거를 ‘피해자의 진술’에 의존해야 했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이 사건의 피고인을 최종 유죄로 결정하였다. 과연 어떤 부분이 달라지게 된 걸까?

 

진술의 신빙성

안희정 사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가장 치열하게 공방을 했던 부분은 바로 ‘진술의 신빙성‘이었다. 안희정 측이 ‘합의된 관계’였다는 말을 계속했던 것도 바로 이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하기 위해서다.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53)에게 징역형의 실형이 확정됐다.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53)에게 징역형의 실형이 확정됐다. ⓒ뉴스1

 

1심 재판부는 안희정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피해자가 신빙성이 떨어지는 진술이나 태도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물론 1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 등으로 충격을 받아 진술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피해자가 이러한 상태에 빠져있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판결에 대해 ‘성인지 감수성‘으로 대응했다. 성인지 감수성 판례(2017두74702)는 지난 2017년, 한 대학교수가 학생들에게 언어적 성희롱을 했던 사건에서 새로이 등장한 개념이다. 법원이 성희롱 관련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당시 대법원은 하급심 재판부를 향해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또는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되는 이른바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희정 사건에서도 이 ‘성인지 감수성’이 등장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가 내린 무죄판결이 ”성희롱 피해자가 처하여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했기 때문에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법원이 심리할 때 피해를 당하지 않은 보통인의 기준이 아니라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 여성의 눈높이에서 그 피해사실과 진술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미인 ‘성인지 감수성’은 안희정 사건 피해자 진술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형의 위력

현행법은 성폭력을 처벌하기 위해서 일종의 유형력이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강간의 경우 폭행, 협박을 사용해야 하고 미성년자 등에 대한 성폭력은 폭행, 협박에 이르지 않더라도 위력, 위계 등의 행사가 있으면 된다. 그리고 안희정사건과 같이 업무상 지위관계에 있는 경우 업무상 위력을 행사해 성적인 관계를 맺게 하면 처벌한다.

과거 재판부는 남성이 무고를 당했을 경우를 고려하기 위해 폭행, 협박, 위력 같은 유형력행사가 분명히 있길 원했다. 강간의 경우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협박이 있어야만 비로소 인정됐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바뀌고 있다. 지난 5일, 재판부는 ‘한샘 사내 성폭력 사건’ 가해자에게 징역을 선고하며 “피고인이 피해자와의 인간적인 신뢰 관계를 이용해 성폭력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죄가 성립한다고 이야기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와 호감을 가지고 합의 하에 성관계를 맺었다”는 피고인의 주장에 대해서도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사회초년생인 피해자가 사회생활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 호응한 것일 뿐, 이성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는 상태라 보기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희정은 강간죄가 아니라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로 기소되었다. 피해자는 폭행이나 협박이 아니라 ‘업무상 위력‘이 존재했고 또 행사했음을 증명해야 했다. 1심 재판부는 안희정이 ”유력 정치인이고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피해자의 임면 등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점을 본다면 위력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위력의 존재감’ 자체로 피해자나 기타 주변 직원 등의 자유의사를 억압 해왔다고 볼만한 증거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정리하자면 위력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와 대법원은 이와 판단을 달리한다. ‘위력’이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을 말하고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묻지 않는다고 전재한 뒤 ”피고인의 안희정의 지위 그 자체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무형적 세력에 해당” 한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가 피해자의 위력이 존재함에도 ‘행사‘하지 않았다고 한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그 지위 자체가 피해자의 자유의지를 제한할 수 있는 위력이라며 ‘위력의 존재감’을 인정했다.

 

‘미투 운동’이 이끈 대전환, 그러나 한계는 남아

안희정 사건은 2018년 한국사회를 달군 ‘미투 운동’의 상징과도 같았다. 명망 있는 정치인이 그 비서에게 위력을 사용해 성폭력을 저질렀던 이 사건은 과거 같았으면 안희정의 주장대로 ‘서로 좋아했었다’는 말로 적당히 묻히고 수습되었을지도 모른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안희정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18일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성평등도서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상고심 유죄를 주장하고 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안희정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18일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성평등도서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상고심 유죄를 주장하고 있다. ⓒ뉴스1

그러나 재판부는 미투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호소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2019년, 대법원은 그 유력정치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권력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재판부는 그간 법률적 경계선상에 있던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의 신빙성‘과 가해자의 ‘위력의 행사 여부’에 관하여 각각 피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법조계 일각에서는 성인지 감수성의 개념이 구체적이지 않고 명확하지도 않다고 우려를 표한다. 법리를 구체적으로 정리해 제시해야 그 적용을 일관적이고 명확히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 1심 재판부도 이런 고민을 털어놨다. 1심 재판부는 ”사회적으로 ‘성폭력행위’를 저지른 자에게 가해져야 할 사회적․도덕적 비난과, 형사법에 규정된 ‘성폭력범죄’를 저지른 자가 부담해야 할 형사 법적 책임 사이에 괴리가 있을 수 있다”면서 ”국민적 합의에 의해 구성된 입법부의 입법행위를 통해 성폭력 관련 처벌규정에 관한 체계적 정비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이상 사법적 판단에 있어서는 엄격한 해석과 각종 증거법칙에 따른 사실인정,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에 기초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며 안희정의 행동이 부도덕하고 비난받아야 하지만 법률적으로는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음을 토로했다.

1심 재판부의 지적, 항소심과 대법원 판결의 ‘불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입법적 보완이 필요한 상황이다.

현재 국회에는 약 9건의 관련 법안이 제출돼 있다. 현행 강간법 등이 처벌하지 못하는, 이른바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들을 처벌하기 위해 강간죄에 ‘비동의 요건’을 추가하자는 내용이다.

비동의 간음죄는 폭행·협박의 정도가 상대방의 항거곤란의 정도는 아니었지만 피해자의 동의없이 간음·추행한 경우, 항거곤란을 입증하기는 어렵지만 동의가 없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경우, 저항의 표시를 남길 여지가 없이 공포심에 짓눌려 당한 경우처럼 현행 성폭력 관련 법으로는 처벌여부가 불분명한 사건에 대해 ”동의가 없었음”을 증명하면 처벌을 가능하게 하는 조항이다.

제303조의2(비동의 간음·추행) ① 동의없이 사람을 간음한 사람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 동의없이 사람을 추행한 사람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 천정배 의원 안

 

제297조(강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간음한 사람은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 백혜련 의원 안

 

제297조(강간) 폭행이나 협박 또는 상대방의 동의없이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송희경 의원 안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또한 ”민주주의적인 의사소통구조가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발적 동의에 기초하지 않은 성관계로 인한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가 현존하고 있으며 오히려 불평등한 권력관계와 뿌리 깊은 정조관념에 노출되어 있는 사회에서 비동의간음죄의 처벌은 성적 자기결정권의 의미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필요하다”며 비동의간음죄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지난 2017년, “성범죄는 ‘자유로운 동의의 부재’를 기준으로 정의돼야 한다”며 한국 정부에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과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판단하라”고 권고했다. 사법부의 최근 판결 경향은 이에 발맞추고 있다. 법률에는 여전히 ‘폭행과 협박‘이 적혀있지만 ‘사실상의 폭행’ 내지는 ‘사실상의 협박’이 있었다며 시대의 요구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이번 대법원 판결은 성폭력 판단 기준이 ‘동의 여부’로 바뀌어야 한다는 걸 확인해줬다”며 ”이제 국회가 응답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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