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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가 되면서 '친구'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친구는 외로움의 보험이 아니다

  • 홀로
  • 입력 2019.08.26 22:13
ⓒIvan Ozerov via Getty Images

얼마 전에 친구와 긴 통화를 했다. 며칠이 지나 이번엔 긴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지난번 통화를 하며 내가 한 말들이 불쾌했다는 이야기였다. 친구의 메시지는 오래된 관계라고 해서 선을 넘지는 말라는 경고로 끝났다. 나는 즉시 사과를 써 보냈다. 이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표현들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조목조목 짚어봤다. 확실하게 사과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메시지창이 길쭉이 늘어지게 사과의 말을 쓰면서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만큼 이 친구와 가까웠던 시간은 이미 지나갔구나.

이 친구와 나는 10여년 이상을 알고 지냈다. 나는 긴 20대를 영 서툴고 어수선하게 보냈다. 진일보 퇴일보의 무한 반복. 그러나 그 부산했던 진퇴의 의미를 늘 가까이에서 읽어준 이들이 있었다. 이 친구는 그중 한사람이었다. 친구가 외국으로 공부를 하러 나간 후에도 우리는 종종 메시지로, 전화로 한시간씩 두시간씩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새로운 계절이 오면 잘 지낼까 생각이 났고, 그 김에 안부를 전하기도 했다. 친구가 방학을 맞아 서울에 오면, 우리 집에서 밤늦도록 차와 술을 마셨다.

그러나 담담하지만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 오랜 관계는 이미 끝났거나, 끝나고 있었다. 다만 나는 친구에게 ‘실수였다’는 핑계는 대지 않았다. 그날의 이야기들에서 실수로 한 말은 없었다. 찍거나 답안지 마킹을 잘못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틀리게 푼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었다. 그래도 내가 왜 틀렸는가는 생각했다. 내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 말고, 친구가 듣길 바라는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지 모른다. 따뜻한 말씨, 찰랑거리는 농담, 밝은 궁금증 같은 것들. 비록 예전엔 더 깊은 이야기도 나눴고 때론 논쟁을 벌였더라도, 우린 이제 예전의 우리가 아닌 것이다.

모든 인연엔 저마다의 수명이

20대 때의 절교는 양쪽의 잘잘못을 따지며 등 돌리는 것이었다면, 30대로 넘어오면서는 점점 다투는 일도 없고 그저 소원해질 뿐이다. 처지가 달라지는 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취업, 결혼, 육아 같은 변곡점들이 서로 다른 시기에 닥쳐오더라도, 함께 넘는 친구들이 있다. 어차피 될 놈은 된다는 말 ‘될놈될’처럼, 어떻게든 이어질 친구는 이어지고 멀어질 친구는 멀어진다는 무력한 관조는 우정에도 적용된다. 예전엔 절교를 하면, 딱 품었던 호감만큼의 미움을 마음에 들여놓았다. 그러나 이젠 가까이 지내기 위해 다투지 않는다. 상황이나 생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그냥 우리 사이는 여기까지구나’ 하고 담담하게 멀어지는 일이 더 많다.

친구가 뜨겁고 날 선 말들로 채워 보낸 그 메시지는 일종의 절교 선언이었던 셈이다. 사과에 대한 답장도 끝내 없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그 문장들을 읽고 또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과거의 나는 어떻게 친구 때문에 그렇게 순도 높은 분노와 상심에 잠길 수 있었을까.

그건 내가 아무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 깊숙한 구석까지 내보여준 순간, 내 삶의 한조각은 그 친구에게로 옮아간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렇게 잠시라도 마음이 진정으로 통했던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내 삶의 울타리 안에 있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친구와 멀어지면 내 삶 한 귀퉁이가 으스러진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는 오래 교류했던 사람이라도, 또 아무리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관계라도 생각보다 빨리 끝나는 일이 있다는 걸 안다. 모든 인연에는 저마다의 수명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게 됐다. 그저 그 수명이 얼마나 길고 짧은지 감히 내가 예측할 수 없을 뿐이다. “잘 지내?” “우리 볼 때 됐어. 본 지 오래됐어.” 그런 말들로 주기적으로, 기계적으로 만남을 약속하며 관계의 수명을 연장하려고 애쓰지도 않게 되었다. 만나고 있을 때보다 만나고 나서, 인사하고 돌아서고 나서 오히려 서로 멀어졌음이 선명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니까.

삶은 친구 진열장이 아니다

독신인 상태로 더 나이를 먹어가는 걸 상상할 때, 엄마 손을 잡은 꼬마처럼 졸래졸래 따라오는 두려움들이 있다. 내게 가장 지독한 두려움은 바로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것이었다. 혹여나 ‘저러니 친구도 없지’ 하는 말을 들으며 고독하게 늙어가는 일. 가난해지고 궁핍해지는 것보다 그런 게 더 싫었다. 내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라 그럴지 모른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겪은 나 자신을 돌이켜보며, 그렇게 두려워했던 마음에서 이제 나는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남자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그가 물었다. 그럼 이젠 두렵지 않냐고. 그건 아니다. 고립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니, 어떻게 해도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외로워지기 싫다는 이기심으로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건, 사람으로 보험을 들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 깨달은 기분이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역할로, 기능으로 보는 못된 욕심이 내 마음 바닥에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과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그 길고 짧은 과정들 사이에서 서성이는 동안에 말이다.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 가면, 거실에 있는 양주 진열장을 열심히 들여다보곤 했다. 술은 마실 줄 몰랐지만 화려한 술병을 구경하는 게 무척 재미있었다. 가끔 다 마신 빈 병도 당당하게 진열되어 있는 걸 보고 속으로 웃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몇년산’ ‘몇년산’ 친구들을 나의 삶에 수집하고 진열해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슬플 때 보살펴주고, 경사엔 달려와 축하해주고, 때때로 지나간 추억을 곱씹어줄 사람들…. 이 친구라면 선뜻 그렇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만 텅 빈 병처럼 남은 여러 인연들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둬왔다. 하지만 그게 정말 그 사람이 소중해서였을까? 아니면 빈 데가 많은 내 삶이 초라해 보이는 게 싫어서였을까?

이제까지 외로움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무기가 두려움이었다면, 지금부터라도 맨손의 힘을 좀 길러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삶이 정말로 외로울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한다. 사람이 살면서, 혼자인 순간이 한번은 올 터라고 나를 타이른다. 내 삶에선 아직이었지만, 앞으로도 인생이 많이 남았다.

글 · 유주얼

* 한겨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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