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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을 회상하며

"빌어먹을 울타리를.." 회사 박차고 나온 어느 작가의 이야기

ⓒ문학동네

서문

내가 가장 믿는 것은 내 글이고, 사람들은 내가 인디애나폴리스 출신 사람인 것처럼 쓸 때 내 글을 가장 믿는 듯하다. 나는 인디애 나폴리스 출신이다.

우리는 크림 파이를 던지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커트 보니것, 베트남전 중 반전 운동의 실제 효과를 평가하며

내 아버지에게 글 쓰는 일은 신앙과 다름없는 행위였고, 당신이 유일하게 진정으로 믿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세상을 바로잡고 싶어했지만 당신의 글이 세상일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 믿은 적은 결코 없었다. 아버지가 본보기로 삼은 사람들은 요나, 링컨, 멜빌, 트웨인이었다.

아버지는 고쳐 쓰고 고쳐 쓰고 또 고쳐 쓰셨다. 고개를 앞뒤로 까닥거리며 방금 쓴 것을 거듭 웅얼거리고, 손짓을 해가며 높낮이와 리듬을 바꾸었다. 그러다 잠시 동작을 멈추고, 몇 자 적지도 않은 종이를 타자기에서 조심스레 빼낸 뒤, 구겨서 던져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다 큰 어른이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다니 좀 이상해 보였지만, 나는 아는 것이 많지 않은 어린 아이였다.

 

아버지의 언어 감각은 대단했다. 여든을 넘기고서도 ‘뉴욕 타임스’ 십자말풀이를 연필이 아닌 펜으로 빠르게 풀었고, 한 번도 도와달라고 하지 않으셨다. 라틴어를 공부한 적이 없는데도, 동사가 제일 끝에 온다고 말씀드리자 이내 그 자리에서 내 라틴어 숙제를 번역하셨다. 아버지는 장편소설, 연설, 단편은 물론이고 심지어 책 표지의 코멘트까지도 굉장히 정성들여 쓰셨다. 아버지의 농담이나 에세이가 즉흥적으로 뚝딱 만들어졌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글을 써본 경험이 없을 것이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한 농담 중 하나는 손수레를 밀수하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세관 직원이 여러 해 동안 매일 그의 손수레를 꼼꼼히 살폈다.

마침내 은퇴할 때가 된 세관 직원이 그에게 물었다. “우린 친구가 되었네. 난 여러 해 동안 매일같이 자네 손수레를 뒤졌고. 자네가 밀수하는 건 대체 뭔가?”

“친구, 나는 손수레를 밀수한다네.”

아버지는 자기 농담에 엄청나게 웃으며, 머리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앞으로 잔뜩 숙인 채 올려다보곤 하셨다. 기침이라도 같이 터져나올 때면 좀 무섭기도 했다.

 

내가 일주일이나 걸려서 쓴 글의 원고료가 오십 달러라고 불평했을 때, 아버지는 내가 글을 쓸 수 있다고 알리는 두 페이지짜리 광고를 내려면 돈이 얼마나 들지 참작해봐야 한다고 하셨다.

 

글을 쓰는 사람, 글을 쓰려고 시도하는 사람이라면 아버지에겐 누구나 특별했다. 아버지는 도움을 주고 싶어하셨다. 운좋게 아버지와 통화하게 된 취객들에게 이야기나 농담, 말하자면 손수레 농담 같은 것을 어떻게 잘 먹히게 만들지, 찬찬히 공들여 설명하시는 걸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누구였어요?”

“나도 몰라.”

 

글을 쓰실 때 아버지는 탐구의 여정에 나섰다. 계속 발을 움직이면 뭔가 좋은 것이 걸릴 거라는 사실, 그 좋은 걸 계속 가다듬어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알고 계셨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일이 여러 번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은 높지 않았다.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 자신이 거둔 명백한 성공이 말라붙고 날아가버릴까 걱정하셨다.

아버지는 다리가 너무 가늘어서 테니스를 잘 못 칠까봐 걱정하셨다.

스스로에게 행복을 잘 허락하지 않았지만, 글이 잘 써질 때의 신나는 기분은 좀체 숨기지 못하셨다.

아버지의 평생에서 가장 불행했던 순간은 여러 달, 때로는 일 년 내내 글을 쓸 수 없었을 때, 즉 ‘벽에 부딪힌’ 때였다. 벽을 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셨는데, 정신의학에 대해선 몹시 불안해하고 의심하셨다. 내가 이십대 초중반일 때, 아버지는 심리치료를 받으면 자신이 평범해지고 적응력이 좋아져 더는 글을 못 쓰게 될까 두렵다는 속내를 실수로 드러내신 적이 있다. 나는 정신과 의사들이 그 정도로 솜씨가 좋지는 않다며 아버지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네가 글을 명확하게 쓰지 못한다면, 아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명확히 사고하는 게 아닐 거다.”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글을 읽고 엉성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면, 당신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한번 더 읽어주시라.

 

대공황 시기에, 인디애나에서 자란 아이가 작가, 그것도 유명한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된다.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버지는 굉장히 많은 것들을 시도해보고, 무엇이 제대로 먹힐지 파악하는 예리한 감각을 키웠다.

내가 열여섯 살 때, 아버지는 케이프코드 지역 전문대학에서 영어 강사직을 구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여러 서점을 다니며 가명으로 아버지 책을 주문해 적어도 가게에 진열은 되도록,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팔릴 수 있도록 했다고 주장하신다. 오 년 후 아버지는 『제5도살장』을 발표했고, 여러 권의 책을 내기로 하고 백만 달러짜리 계약을 하셨다. 그 변화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지금, 과거를 회상해보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커트가 성공한 작가, 심지어 유명한 작가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던 일로 보인다.

아버지는 다른 일을 아무것도 못했기 때문에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피고용인 노릇을 잘하지 못했다. 1950년대 중반, 잠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서 일하신 적이 있다. 출근한 아버지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도망가려 한 경주마에 대해 짧은 기사를 쓰라는 지시를 받았다. 아버지는 오전 내내 빈 종이를 노려보다 “말이 빌어먹을 울타리를 뛰어넘었다”라고 타자를 친 뒤 걸어나와 다시 자영업자가 되었다.

나는 아버지보다 음식에 무관심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줄담배를 피우신 것과 분명 연관이 있을 테다. 아버지가 너무 오래 살고 있다고 불평하셨을 때, 나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 담배를 피울 수 있는지 신이 알고 싶은 모양이라고. 그리고 다음에 커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해 견디지 못하는 모양이라고도 했다. 자신은 이제 끝이다, 할말이 더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실 때 내가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신이 사십대 중반일 때부터 끝났다고 하기 시작한데다, 팔십대 중반에도 계속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좋은 글을 쓰셨기 때문이다.

가장 급진적이고 대담한 생각이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생각하고, 열심히 읽고,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생각일 게다.

아버지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자기 자신과 독자들에게—일어나는 마법을 믿는 작가였다. 독자들의 시간과 관심은 성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내용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있었기에 본능적 수준에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중독에 이르게 하는 초기 약물 혹은 구둣주걱 같은 존재였고, 지금도 그렇다. 일단 보니것이라는 문턱을 넘고 나면 다른 작가들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고등학교 졸업하고도 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아직 있니?”

 

아버지는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는지 가르치셨고,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으면 되는지를 가르치셨다. 아버지의 글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런 역할을 할 것이다.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체제 전복적이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식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과격하지 않은 분이었다. 마약을 하지 않았다. 빠른 차도 몰지 않았다.

아버지는 항상 정의의 편에 서려고 노력했다. 이라크전이 터지기 직전까지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라크전은 아버지를 비통하게 만들었다. 이라크에 무슨 대단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미국을 사랑했고, 링컨과 트웨인의 나라와 그 국민들이 옳은 길을 찾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민자였던 당신의 조상들처럼, 미국이 미래를 이끄는 불빛이 되고 낙원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머나먼 곳에서 폭탄을 터뜨리고 사람들을 죽이며, 전 세계가 우리를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만드느라 허비하는 돈을 공교육과 도서관을 개선하는 데 쓰는 게 나았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옳았다는 걸 역사가 증명할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미 증명되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글을 읽고 쓴다는 것 자체가 체제 전복적 행동이다. 읽고 씀으로써 전복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이다. 세상이 지금 이대로여야 한다는, 당신이 혼자라는, 당신과 같은 것을 느껴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커트 보니것의 작품을 읽으면 세상의 많은 것들을 생각보다 쉽게 가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고작 책 한 권 읽었을 뿐인데 세상이 조금 다른 곳이 된다. 그런 일을 상상해보라.

 

아버지에게 우울증이 있었다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많은 사실들이 그렇듯, 의심할 이유는 충분하다. 아버지는 행복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우울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지만, 솔직히 나는 아버지가 우울증에 시달린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내향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외향적인 사람 같았고, 외톨이가 되고 싶어하는 굉장히 사교적인 사람, 운이 없었기를 바라는 운좋은 사람 같았다. 사람들이 조심하기를 바라며 비관적인 척하는 낙관주의자였다. 이라크전이 터지고 인생 말년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진정으로 우울해지셨다.

약을 과다 복용해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기이하고 초현실적인 사건이 있긴 했지만, 아버지가 정말 위험한 상태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하루 만에 아버지는 휴게실을 돌아다니고 탁구를 치며 새 친구를 만드셨다. 정신병에 걸린 사람 흉내는 잘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정신병원 의사가 내게 말했다. “아버님이 우울증을 앓고 계세요. 항우울제를 처방하려고 합니다.”

“그러세요. 하지만 제가 봐온 우울 증상이 아버지에게선 전혀 보이지 않는데요. 기력이 쇠하지도 않으셨고, 슬퍼 보이지도 않고 이해도 빠르세요.”

“자살을 시도하셨잖아요.”

“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아버지가 드셨던 모든 약을 통틀어 유독할 정도의 양을 복용한 적은 없었다. 간신히 긴장이 풀릴 만큼의 타이레놀 정도였다.

“항우울제 처방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뭔가 손을 써야 할 것 아닙니까.”

“전 그저 아버지가 우울증이 아닌 듯하다는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어떤 상태인지 단정짓기 어려운 분이거든요. 괜찮으시다는 말은 아닙니다.”

ⓒ문학동네

내 팬과 아버지 팬의 차이점은, 내 팬들은 자신에게 정신병이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공 받기보다 던지기를 더 잘하셨다. 가족 중 누군가에 대해 도발적으로, 늘 친절하지만은 않게 얘기하거나 글을 쓰는 게 일상적이었다. 우리는 적응해나갔다. 그저 아버지가 늘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어느 글에서 아버지가 비관론자로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고 어쩌면 자식을 잃은 트웨인이나 링컨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고 쓰자 아버지는 분통을 터뜨리셨다.

“전 그저 독자들을 끌어들이려고 한 거예요. 그걸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버지 말고 아무도 없을걸요.”

“난 농담이 어떻게 먹혀드는지 안다.”

“저도 알아요.”

딸깍, 딸깍. 우리는 전화를 끊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물론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몇 년마다 아버지는 당신이 돌아가실 경우에 어떻게 할지 알리는 편지를 보내오셨다. 마지막 경우를 제외하고, 매번 편지를 보낸 뒤에는 내게 전화를 걸어 유서가 아니라고 안심시키셨다. 내게 마지막 ‘만약 내가 죽는다면’ 편지를 보내기 전날에는 커트 보니것의 해를 시작할 인디애나주를 위한 연설문을 완성하셨다. 이 주 후 아버지는 넘어져 머리를 부딪히셨고, 소중한 뇌는 돌이킬 수 없이 스크램블드에그처럼 되어버렸다.

나는 그 마지막 연설문을 다른 글들보다 훨씬 더 꼼꼼히 읽어보게 되었다. 내게 그 연설을 대신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는 어떻게 이따위로 연설을 하고 다녔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은 청중이었다. 내 아버지와 깊은 사랑에 빠져 어디든 따라갈 객석과 세상을 향해 아버지의 글을 읽고 있음을 나는 곧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성애자 로마가톨릭 성직자의 오십 퍼센트와 마찬가지로 순결을 지킵니다”는 아무 의미 없는 문장이다. “얼간이란 엉덩이에 의치를 끼우고 택시 뒷좌석 시트의 단추를 물어뜯는 사람이다.” “게걸스러운 인간이란 여자아이들의 자전거 안장을 킁킁대는 사람이다.” 아, 아버지,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대체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그러고서 아버지는 갑자기 핵심을 찌르는, 충격적이고 진실된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이 그걸 믿게 되는 이유 중 일부는 그가 방금 전까지 순결과 얼간이와 게걸스러운 인간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 의사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아마 세계 최악의 직업일 테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네가 몇 살이지, 마크?”

“쉰아홉이에요, 아빠.”

“늙었네.”

“네, 아빠.”

나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 책의 글들은, 언제 쓰였는지 대부분 표시되어 있지 않고 출판된 적은 한 번도 없는 것들이며, 그 자체로 아주 훌륭하다. 내가 무언가 덧붙일 필요가 없는 글들이다. 당신이 보기에 흥미롭지 않은 내용이 있다 해도, 구조와 리듬과 단어의 선택에 주목해주시길. 커트 보니것에게서 읽고 쓰기에 대해 배울 수 없다면, 당신은 다른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쓰신 연설문의 마지막 문장은 아버지의 작별인사로서 그 어떤 말 못지않게 훌륭하다.

 

주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이제 여길 뜨겠습니다.

 

마크 보니것

2007년 9월 1일

 

* 커트 보니것의 신작 ‘아마겟돈을 회상하며’(문학동네)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서문은 커트 보니것의 아들인 마크 보니것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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