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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단 걸 싫어한다"라며 거짓말을 하고 다닐까?

최근 미국에는 '초민감자'가 늘어나고 있다

ⓒFlashpop via Getty Images

아내의 선배 부부와 함께 식사하기로 한 날이었다. 삼겹살집에 예약을 잡았다고 하자 아내가 핀잔을 줬다. “선배는 고기 싫어한다니까.” 예약을 바꿀 수가 없어 우리는 결국 삼겹살집에 갔다. 넷이서 4인분을 먹고 2인분을 더 시켰다. 장담컨대 아내의 선배가 제일 많이 먹었고, 추가 주문을 할 때도 가장 열정적으로 찬성했다. 공교롭게 그 주에 우리 집에 놀러 온 또 다른 친구 역시 비슷한 거짓말을 했다. 테이블 가득 올려둔 빵을 올리브 기름에 계속 찍어 먹으며 말했다. “저는 탄수화물은 잘 안 먹어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폭소를 터뜨렸다. 웃음이 지나가고 나자 혼란이 남았다. 대체 우리는 왜 고기나 탄수화물을 좋아하면서 싫어한다고 말할까?

나 역시 그렇다. 난 항상 “단 걸 싫어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단 걸 싫어한다고 말하고 다니는 나는 그날 탄수화물을 싫어하는 친구와 함께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밥숟가락으로 퍼먹었다. 카페에 가면 주문하기 전에는 “디저트는 별로 안 당긴다”고 말하지만, 막상 파이가 눈앞에 놓이면 이성을 잃고 먹는다. 곰곰이 가슴에 손을 얹고 지나온 인생을 반추해보면 나는 그저 ‘단 걸 좋아하는 건 유아적 식성’이라는 사회적 압력 때문에 단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고기를 싫어한다고 했던 선배에게 살짝 물었더니, 그는 “고기를 진짜로 싫어한다는 게 아니라 고기가 몸에 안 좋으니 적게 먹겠다는 걸 선언한 것”이라며 “그런 방향으로 식습관을 바꾸고 싶다는 의지”라고 답했다. 탄수화물을 잘 안 먹는다고 말한 지인은 “잘 안 먹는다고 했지 아예 안 먹는다고는 안 했다”라며 “엄밀하게 말하면 거짓말은 아니다”라고 잡아뗐다. 삼겹살을 먹으면서 고기가 몸에 나쁘다고 말하고, 파스타를 먹으면서 탄수화물이 나쁘다고 말하고, 파이를 먹으면서 설탕을 죄악시하는 이 사회가 우리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특정 단어는 자기방어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술자리에서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내게 버럭 화를 낸 적이 있다. “당신이랑 함께 술을 몇 번이나 마셨는데 아직도 나를 못 알아보느냐!” 얘기를 들어보니 그 사람과 나는 서너 번 정도 술자리에서 마주쳐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아 거짓말을 했다. “제가 안면인식장애가 있어요.” 내가 왜 그랬을까? 세상에 안면인식 장애가 있는 기자는 있을 수가 없다. 사람 사진 고르는 게 직업의 일부인데 안면인식 장애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이며 실제로 안면실인증을 겪는 분들께는 진심으로 죄송한 헛소리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꽤 자주 그런 소리를 듣다 보니 아무나 써도 되는 변명의 방패인 줄 착각한 모양이다.

2017년께부터 미국에서는 “나는 엠패스(Empath)”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출간을 앞둔 정신과 의사 주디스 올로프의 책 〈나는 초민감자입니다〉에서 ‘초민감자’가 엠패스의 번역어다. 주디스 올로프의 주장에 따르면 초민감자는 다른 사람과의 접촉에서 아무런 방어막 없이 타인의 감정과 에너지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녹초가 된다.

초민감자는 다른 사람들의 에너지를 뽑아 먹고 사는 에너지 뱀파이어(반사회성 인격장애인 소시오패스나 나르시시스트)와는 달리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는 직관과 통찰력을 갖춰 ‘치유자’(healer)로 거듭날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Elaine N. Aron)이 주장한 ‘매우 민감한 사람‘(Highly Sensitive Person)과 비슷하지만, 초민감자들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샥티’(눈에 보이지 않는 힘)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대상의 기를 느낀다는 것이다.

초민감자의 존재 여부를 두고는 학계에서도 찬반이 갈린다. 기를 느끼는 초민감자의 존재를 확증한 연구는 아직 없다. 다만 눈에 띄게 자신을 초민감자로 정의하는 사람이 많아지긴 했다고 한다.

화장품 업계에 있는 친구에게 이 얘기를 하자, “민감성 화장품이랑 비슷하다”라며 “이름을 붙여주면 없던 소비자가 생긴다”라고 말했다. 그는 민감성 피부라는 정의가 널리 퍼진 시기와 ‘더마코스메틱’(피부과학과 코스메틱의 합성어) 제품이 팔리기 시작한 시기가 일치한다고 말했다. 한 화장품 회사에서 설문조사를 해보니 한국인의 10명 중 6명꼴로 자신의 피부가 민감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민감성 화장품을 쓴다. 당연한 거 아닌가? 내 피부는 항상 소중하고 그래서 민감해야 하니까.

*해당 기사는 한겨레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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