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9년 08월 11일 17시 31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8월 12일 10시 14분 KST

‘오부치의 일본’과 ‘아베의 일본’은 전혀 다른 나라다

김대중 정부 시절의 한-일 공동 선언을 아베가 걷어차 버렸다

lockon16 via Getty Images

한국과 일본의 경제 전쟁이 벌어지자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을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체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비판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외교 실력이 뛰어나서 오부치 일본 총리와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 선언’을 끌어냈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외교 실력이 부족해서 일본과의 갈등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주장입니다. 자유한국당과 이른바 보수 언론 논객들 가운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김종필 前총리는 한일국교 정상화를 진두지휘했던 장본인이고, 김대중 前대통령은 국민 반대를 무릅쓰고 문화개방까지 했던 미래지향적인 입장에서 한일관계를 관리했던 경험이 있다. 그 두 지도자를 우리가 지금 원조 토착왜구라고 비난할 것인가. 그렇지 않지 않은가. 국민감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첫째도 둘째도 국익을 우선으로 임해야겠다.
7월 17일 자유한국당 당대표 및 최고위원 -중진의원 연석회의 (정진석 의원 )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한일 간 문화개방정책을 펼쳤던 故김대중 대통령의 국익 우선 외교정책을 거울삼아 전략과 지혜를 얻으라는 충고를 하고 싶다.
7월 24일 원내대표 -중진의원 연석회의 (정갑윤 의원 )

 

정말로 중요한 건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으로 이상(理想)과 현실을 통합하는 것이다. 한국은 2004년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수출 심사 우대국 )에 포함된다. 그것은 1998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맺은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 ·일 파트너십 공동 선언‘이 낳은 한 ·일 상호 선린의 옥동자였다.
8월 2일 조선일보 윤평중 칼럼 ‘국가의 근본을 생각한다’(윤평중 한신대 교수 )

 

DJ가 98년 10월 일본 국회에서 한 연설은 역사의식을 보여준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불행했던 것은 약 400년 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7년간과 금세기 초 식민지배 35년간입니다 .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런 냉철한 판단이 ‘21세기의 새로운 한 ·일 파트너십’을 천명한 김대중 ·오부치 선언을 끌어냈다.

7월 26일 중앙일보 중앙시평 ‘죽은 대통령들과의 대화’(고대훈 수석논설위원)

 

 

<조선일보>는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 선언에 깊숙이 개입하고 주일본대사(2000년~2002년)를 지냈던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를 7월 5일 치 신문에 실었습니다.

―한국 정부도 대일(對日) 강경 기조를 굽히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도덕적 우위의 관점에서 한 ·일 관계를 바라본다. 도덕성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지만 외교를 도덕화해 상대국을 선악 이분법으로 보면 협상이 불가능하고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도덕적 우선권이 있는 쪽이 관대하게 나가면서 명분 ·실리를 동시에 확보한 전례가 있다 . 바로 일본의 식민지배 반성 ·사죄를 구체화한 ‘김대중 ·오부치 선언‘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일본 국회 연설에서 ‘일본이 과거사를 직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면서도 전후 일본이 쌓은 평화와 경제성장, 한국 외환 위기 극복에 공헌한 점에 감사도 표했다.”

 

최상용 교수는 8월 5일 정동영 대표 초청으로 민주평화당 최고위원회에 참석해 강연했습니다. 최상용 교수는 “개인적으로 아베 총리와 많은 교류가 있다. 아베 총리는 예측 가능한 정치가다. 정치적 유연성도 대단하다. 우리 대통령을 못 만날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또 “피해자에게 우선권이 있지만 외교를 도덕화하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며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 선언과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국회 연설문을 읽어보라고 권고했습니다.

뭔가 좀 이상했습니다. 1998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10월 7일 일본을 국빈 방문했습니다. 아키히토 일왕을 예방하고 만찬에 참석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일왕을 ‘천황’이라고 불렀습니다.

10월 8일에는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고 ‘21세기 한-일 파트너십’이라는 공동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공동 선언에는 “오부치 총리대신은 금세기의 한·일 양국관계를 돌이켜 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痛切)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였다”는 대목이 포함됐습니다. 일본 총리가 처음으로 외교 문서를 통해 우리나라를 지칭해서 공식 사죄한 것입니다.

또 공동 선언에는 “양국 정상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북한이 개혁과 개방을 지향하는 동시에, 대화를 통한 보다 건설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였다. 오부치 총리대신은 확고한 안보체제를 유지하면서 화해와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한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는 대목도 들어갔습니다. 일본 총리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지지한 것입니다.

이와 함께 공동 선언은 “양국 정상은 이상 각 분야의 양국 간 협력을 효과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기초는 정부 간 교류뿐만 아니라 양국 국민 간의 깊은 상호이해와 다양한 교류에 있다는 인식하에 양국 간의 문화·인적교류를 확충해 나간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일본의 대중문화를 한국 시장에 개방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날 참의원 본회의장에서 연설했습니다. 730명쯤 되는 중의원·참의원 중에서 527명이 참석했습니다.

일본 국회 연설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은 과거를 직시하고 역사를 두렵게 여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고, 한국은 일본의 변화된 모습을 올바르게 평가하면서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의 ‘과거 직시’를 요구한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특히 일본과 역사적인 공동 선언을 채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했습니다.

“일본은 흥망성쇠의 근대사를 거치면서 이제 세계의 중심국가로 우뚝 섰습니다 .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독자적 근대화에 성공했고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여 큰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 그러나 , 당시의 일본은 제국주의와 전쟁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일본 국민은 물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의 국민들에게 큰 희생과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달라졌습니다. 일본 국민은 땀과 눈물을 바쳐 의회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세계가 놀랄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 제 2의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은 아시아 각국의 국민들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의 길을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

지금의 일본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세계 최대의 경제 원조국으로서 자신의 경제력에 상응하는 국제적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습니다 . 또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원폭의 피해를 체험한 일본 국민은 변함없이 평화헌법을 지켜왔고 , 비핵 평화주의의 원칙을 고수해 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이 평화헌법을 잘 지켜왔고 비핵 평화주의 원칙을 고수해 온 점을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동북아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열쇠는 한반도에 평화를 뿌리내리는 것이라는 당부도 했습니다.

“동북아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역동적인 역사의 현장입니다 . 현 단계에서 동북아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열쇠는 한반도에 평화를 뿌리내리는 것입니다 . 나는 한반도에서는 통일에 앞서 남북한 간의 평화와 협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나는 취임과 동시에 새 정부의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세 가지 원칙을 발표했습니다 .첫째는 북한의 어떠한 군사적 위협이나 무력도발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 둘째 , 우리는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 셋째 , 남북 간 화해와 교류협력을 통하여 남북관계를 실질적으로 개선한다는 것입니다 .
우리의 이러한 대북정책에 대해 한국 국민은 물론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가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 나는 확고한 안보태세를 바탕으로 한 남북한 화해와 협력의 증진은 , 궁극적으로 북한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이끌어 내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최근 북한은 인공위성 발사실험을 통해 중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 북한의 이러한 미사일 개발능력은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 나는 이런 사실에 대한 일본 국민의 충격과 우려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 이럴 때일수록 한국과 일본 , 그리고 미국이 함께 협력하여 튼튼한 대북한 공조체제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북한을 상대함에 있어 우리는 일희일비하기보다는 단호한 안보태세와 함께 인내와 포용의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 고립되었을 때의 북한이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국 김대중 대통령은 김대중-오부치 공동 선언 채택의 ‘전제’로,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통절한 반성과 사죄, 전쟁을 금지한 평화헌법 준수, 동북아 지역 안보를 위한 한반도 평화 정책 지지를 요구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 선언은 일본의 반성과 사죄, 평화헌법 준수, 그리고 한반도 평화 정책 지지라는 세 개의 기둥 위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겨레
한일 대학생들이 7일 오전 서울 신촌 유플렉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반일, 반한이 아닌 노(No) 아베를 위해 연대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글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고 다음 사람을 지목하는 ‘피스 챌린지’를 제안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그런데 지금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어떻습니까? 첫째, 아베는 2015년 8월 ‘아베 담화’에서 일본이 더는 과거사와 관련해 사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둘째, 일본의 군대 보유와 교전권을 부인한 평화헌법 개정을 공공연히 추진하고 있습니다.

셋째, 극우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동북아 지역과 한반도에 긴장과 갈등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한-일 공동 선언을 떠받치고 있던 세 개의 기둥을 모두 걷어차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최근 한-일 갈등의 원인을 문재인 정부의 외교 실력 부족에서 찾는 것은 번지수가 틀린 것입니다. 물론 문재인 정부의 잘못도 있겠지요. 외교는 상대적입니다.

2000년대 들어 벌어지는 한-일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요? 노무현 대통령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이명박 대통령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박근혜 대통령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문재인 대통령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일본 정치를 극우세력이 점점 더 많이 장악해 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특히 아베는 최근 일본 총리 가운데 가장 극우 성향이 강한 정치인입니다. 좀 거칠게 표현하면 1998년의 일본과 2019년의 일본은 전혀 다른 나라입니다.

자유한국당과 이른바 보수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에 대한 정치적 반감 때문에 한-일 갈등의 책임을 자꾸 문재인 정부로 떠미는 것 같습니다.

눈이 밝은 국민이 이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자유한국당과 이른바 보수 논객들을 향해 쏟아지는 친일 논란은 상당 부분 그들이 자초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이미 경제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이번 전쟁은 일본 정부가 도발한 것입니다. 전쟁을 끝내려면 일본 정부가 도발을 스스로 철회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의 지혜와 힘을 모아서 아베 정부와 싸워야 할 때입니다.

*이 글은 한겨레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