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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가 가져올 파국, 재팬 디스카운트

한일 무역분쟁 한달이 지났다. 계산기를 두드려보자.

  • 백승호
  • 입력 2019.08.08 11:27
  • 수정 2019.08.08 16:32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어쩌면 후세는 이 사건을 두고 일본이 ‘제2의 진주만 공습‘을 벌였다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단순하게 ‘일본이 한국을 공격했다‘는 측면만 놓고 보자면 이 표현은 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중소기업이 세계 10위권 글로벌 대기업을 상대로 납품을 거부하며 공격을 해왔다’고 요약하면 무리가 가는 설명도 아니다.

일본이 반도체 소재 3종에 대한 수출 규제를 발표했던 초창기만 해도 한국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물건을 팔지 않겠다‘는 선언은 어려운 부연 설명 없이 그냥 장사꾼의 시선으로만 바라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다. 이 자해와도 같은 수를 우리는 이해하지 못했다. 뒤에 대단한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보다 더 볼륨이 큰 경제 대국 일본이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을 거라고 쉽게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로부터 한달이 지났다. 혼란스러웠던 초기와는 달리 이제는 차분히 의견이 모이고 있다. 일본은 정말 자신들이 담당했던 국제 분업의 한 축을 볼모 삼아 협박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그 협박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한국은 불확실성에 빠졌다. 소재 3종을 넘어 1000종에 이르는 전략물자까지 ‘수출 제한’에 빠질 가능성이 생겼다. 당장 찾아오지는 않겠지만 일본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실현 가능한 위기다.

 

 

삼성은 결국 일본이라는 불확실성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반도체 생산 공정에 들어가는 일본산 소재를 국내산이나 유럽, 미국 등 제3국이 생산한 소재로 모두 교체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삼성의 ‘재팬 프리’선언으로 일본 중소기업은 주요 납품처를 잃게 될 처지에 놓였다. 삼성의 조치로 이제는 눈에 확실히 들어오게 되었다. 아베의 카드는 정말 성급하게 내놓은 ‘자해’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제 차분히 계산기를 두드려보자. 한국에게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한국의 위기는 ‘불확실성’으로 요약된다. 일본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추가 조치를 취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불확실성은 그것을 어떻게 제거해나가느냐에 따라서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산업자원부는 지난해 2월, 소재·장비의 국산화율을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목표에는 몇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먼저 대기업은 이미 오랜 업력으로 안정적인 품질과 가격을 유지하고 있는 일본의 중소기업과 거래를 중단하면서까지 국산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수지타산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또 정부 주도의 산업 지원은 자칫 잘못하면 WTO 보조금 규정 위반으로 분쟁에 휘말릴 소지도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일본이 만들어준 불확실성 덕분에 한국은 이제 강제로 몸을 움직여야 할 상황에 놓였다. ‘부당한 경제 보복의 대응 조치’라는 명분도 갖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일본의 ‘무역 공격‘은 한국의 전환기에 맞춰 일어났다. 한국 제조업은 이미 형성된 시장에 침투해 가장 효율적인 공정을 만들어내고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패스트 팔로워’ 전략 대신 고도화된 제조업 기술을 바탕으로 시장을 선도하는 ‘퍼스트 무버’로 이행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삼성전자는 지난 4월, 133조라는 엄청난 규모의 투자계획을 밝혔다. 메모리반도체 시장을 장악해 확보한 현금으로 비메모리반도체 분야까지 진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건 단순히 삼성만의 일이 아니다. 용인에 구축될 삼성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각종 연관 중소기업이 들어서게 된다. 이 중소기업은 삼성이라는 안정적인 납품처를 확보하면서 기술력을 키우게 된다. 향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삼성을 넘어 전세계를 상대로 납품하게 된다. 여기서 확보된 자금력은 다시 연구, 개발 등 경쟁력 확보에 쓰인다. 바로 이런 강소기업을 형성하는 게 이행기에 놓인 한국의 과제였다. 그리고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부품, 소재, 장비 분야에 대한 지원, 육성이 절실했다. 일본은 한국의 갈림길 앞에 놓인 돌을 대신 제거해줬다.

한국의 손익계산서는 단기적으론 흐리지만 장기적 전망까지 어둡지는 않다. 다만 치밀해야 한다. 양향자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은 지난 7월, MTN에 출연해 ”일본이 소재 강국으로 갔을 때 처음 어떻게 했는지 국가의 콘트롤 타워, 연구소, 대학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봐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학계와 연구 분야를 아우를 수 있는 방향 설정이 필요하다.

 

ⓒGetty Editorial

 

그렇다면 일본이 받아들 계산서는 어떨까? 먼저 한국이 국산화에 성공한다면 일본의 중소기업들은 그만큼 납품처를 잃게 된다. 물건을 팔 곳이 줄어든 중소기업들은 시장가치가 떨어질 것이며 개중에는 심각한 존폐의 위기를 겪는 곳도 있을 것이다. 위기를 피하기 위해서 ‘탈일본’을 고려하거나 국내 대기업에 M&A 되기를 희망하는 기업이 나올 수도 있다.

양국의 손익계산서를 나열해보면 아베의 조치는 더 이해되지 않는다. 일본 경제는 양적완화와 인위적 엔저로 버텨왔지만 좀처럼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해법을 찾아내는 대신 언젠가는 일본을 위협할지 모를 한국 기업에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그리고 그 일격은 고스란히 일본 소재기업이 떠안게 됐다.

결국 일본은 ‘화이트리스트 배제’ 선언만 한 뒤 별다른 추가 조처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뒤늦게 정신차리고 다시 돌려본 손익계산서에는 자국 중소기업의 탄식이 가득했을 것이다. 한국 국민들의 자발적 불매운동과 여행자제 운동으로 일본의 소매기업은 머리를 숙였고 한국인 관광객으로 먹고 살았던 지자체는 해결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제는 원점으로 되돌아가기도 힘들다. 일본은 국제사회에 ‘정치적 갈등을 경제적 보복으로 이어갈 수 있다’는 인식을 남겨줬다. 이 불신의 씨앗은 두고두고 일본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아베가 만들어 낸 재팬 디스카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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