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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미터 고공 철탑 망명지

삼성 해고 노동자 김용희씨는 50일 넘게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뉴스1

이민국가 뉴질랜드에서 수많은 인종, 다양한 국가와 문화권의 내담자들을 만났었다. 모든 내담자들이 하나하나 다 특별했지만 가장 힘든 기억으로 남아 있는 내담자는 망명자들이었다. 내가 만났던 이들은 주로 아프리카 출신이었는데 그들과 상담을 하는 것이 마음이 무거웠던 이유는 그들이 겪은 참혹한 일들을 듣고, 그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담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상담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 가장 큰 이유였다. 고통받고 있는 한 인간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가득한 마음에 비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내 직업에 대한 회의감까지 들게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 대부분은 뉴질랜드 정부에 의해 잘 보호받고, 그 사회에 잘 적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삼성 해고 노동자 김용희씨를 처음 만난 지가 이제는 한달도 넘었다. 그는 서울 강남역 2번 출구 앞 교통통제 관제철탑에서 50일 넘도록 고공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6월 말, 한 비정규직 노동자 단체의 책임자로부터 김용희씨를 만나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고공에서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길래 비상구나 외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건물의 옥상에서 만나는 줄 알았는데, 그가 농성을 이어가는 곳은 비상구는커녕 외부 사다리도 없는 철탑의 꼭대기였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소방 사다리차를 타고 25미터까지 허공으로 올라가 철탑에 사다리차를 맞대면 그저 맨몸으로 좁은 공간으로 옮겨가야만 했다. 철탑의 중간은 또 작은 철탑이 차지하고 있어서 한평도 채 안 되는 원형의 고공 농성 공간은 아이라도 발을 직선으로 뻗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 그는 단식 열흘이 넘었고, 그 전에 감행했던 백일 단식 투쟁을 마친 지 일년이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나는 그날 이후로 두번 더 김용희씨를 올라가 만났다. 까마득한 철탑은 사방으로 뚫려 있어 한여름의 땡볕도, 요즘의 거센 비바람도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철그물로 된 바닥은 스티로폼 방석이 없으면 제대로 앉을 수도 없는 그곳에서 그는 지난달 27일 55일간의 단식은 끝냈지만, 고공 농성은 현재도 이어가고 있다.

그는 24년 전 삼성에서 해고되었다. 노동조합을 설립하려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노조 설립을 막으려고 그에게 가해진 삼성의 회유, 협박, 폭행, 직장 내 따돌림 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김용희씨의 아버지는 아들의 고통을 보다 못해 유언장과 같은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가신 후 지금까지 생사를 모른 채 연락이 끊어져 버렸다. 3대독자인 김용희씨가 대학 시절 강제 징집을 당하자 자신이 대신 근무를 서겠다고 할 정도로 아들을 사랑하셨던 아버지였다. 철탑에서 김용희씨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울었다. 지난달 10일은 그의 생일이자 그대로 삼성에 근무했다면 정년퇴직을 하는 날이었다. 원직 복직을 요구하며 수십일째 단식을 이어갔던 그는 결국 삼성으로부터 단 한마디의 말도 듣지 못한 채, 정년 전 원직 복직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아직도 철탑에 갇혀 있다. 다행히 여러 동지들의 간곡한 뜻을 받아들여 단식은 중단했지만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도 병원 치료를 받는 것도 거부한 채 그저 하루 한 종지의 미음으로 복식을 하며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철탑 위로 망명을 간 것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철저히 추방되었다면 망명자라고 부르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의 망명지는 한평도 안 되는 고공 철탑이다. 정권도 촛불혁명으로 끌어내렸는데 삼성이라는 저 난공불락의 괴물은 어찌해볼 수 없다. 김용희는 죽어 가고 있고, 그를 구해줄 나라도 없다. 차라리 아프리카 망명자들이 부럽다.

* 한겨레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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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해고 노동자 #김용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