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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80팀 출연을 예고한 '우드스톡 50 페스티벌'은 어쩌다 사망했나?

페스티벌의 계절이다

우드스톡 뮤직 페스티벌의 관중을 촬영한 와이드 뷰 사진. 1969.
우드스톡 뮤직 페스티벌의 관중을 촬영한 와이드 뷰 사진. 1969. ⓒJohn Dominis via Getty Images

50년 전인 1969년, 뉴욕주 베델 평원에서 그때까지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음악 축제 ‘우드스톡 뮤직 앤드 아트 페스티벌’이 열렸다. 당대의 슈퍼스타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산타나, 리치 헤이븐스가 무대에 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시 이 역사적인 행사를 주최했던 프로모터들이 우드스톡 50주년을 맞아 기념 페스티벌을 준비 중이었다. 이름하여 ‘우드스톡 50’. 인생 말년에 접어든 히피 세대의 마지막 축제가 될 전망이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드스톡 50는 ‘공식적으로 사망‘했다. 지난 31일 ‘우드스톡 50’ 기획 총괄이자 1969년 우드스톡의 오리지널 기획자였던 마이클 랭은 ”시간이 모자란다”는 말과 함께 취소를 공표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간단하게 종합하자면 마이클 랭을 비롯한 기획자들은 페스티벌을 열 장소를 정하고, 관계 당국의 허가를 얻는 데 실패했다. 장소를 옮기자 아티스트들이 출연을 거부했고, 투자가들은 떠나갔다. 한번 무너진 연쇄작용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이클 랭과 기획자들이 출연진의 섭외를 타진하고 다닌 건 약 1년 전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당시 에이전트들은 ‘제너레이션 Z’(밀레니얼 이후 세대인 1990년대 후반에 태어난 세대)에게 우드스톡의 이름값이 먹힐지에 대해 회의적이긴 했지만, 계약금을 먼저 주는 조건으로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마이클 랭의 팀은 80여 아티스트를 섭외할 수 있었다. 제이지, 마일리 사이러스, 더 킬러스, 산타나, 이매진 드래곤스, 할시 앤드 데스 앤드 더 컴퍼니 등이 출연을 약속했었다. 주최 측은 이들에게 3천200만 달러를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래는 지난 3월 20일 우드스톡 50가 공개한 라인업이다.  

그러나 변동사항이 생겼다. 4월 22일로 예정되어 있던 티켓 오픈이 별다른 설명 없이 취소됐다. 나중 알고 보니 주최 측은 행사를 열기 위해 반드시 받아야 하는 뉴욕주 보건부의 대형 집회 허가도 받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허가 신청을 한 날짜가 4월 15일이었으며 이 신청마저도 허가가 나지 않았다.

4월 29일 주요 투자자였던 일본의 광고회사 덴츠의 자회사 덴츠 이지스 네트워크(Dentsu Aegis Network)가 기획자들의 무능을 비판하며 손을 떼고 페스티벌의 취소를 발표했다. 마이클 랭 측은 페스티벌이 취소된 게 아니라며 맞섰지만, 덴츠 측과 법정에서 투자금 회수로 다툼을 벌이는 사이 자연스럽게 페스티벌의 미래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3월 19일 우드스톡 50의 라인업을 발표하고 있는 마이클 랭과 존 포거티. 
3월 19일 우드스톡 50의 라인업을 발표하고 있는 마이클 랭과 존 포거티.  ⓒEvan Agostini/Invision/AP

덴츠 측이 발을 뺀 가장 큰 이유는 행사의 규모가 약속과 달라서로 보인다. 애초에 이들이 페스티벌을 열기로 한 곳은 뉴욕주 왓킨스 글렌에 있는 ‘왓킨스 글렌 인터내셔널’ 레이스 트랙이었다. 마이클 랭의 팀이 애초에 덴츠 측에 약속한 수용인원은 15만 명이었으나 이후 제작 파트너사(社)인 슈퍼플라이가 시찰한 뒤 7만5000명으로 재조정됐다. 심지어 6월에는 15만 달러(1억7950만 원)를 지불하지 못해 왓킨스 글렌에 걸어둔 행사 예약을 날렸다. 페스티벌 예정일이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이었으니 불과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행사 장소를 변경해야 할 위기에 봉착한 셈이다.

두 달 안에 10만 명이 모일 공간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왓킨스 글렌과의 계약이 파기되자 마이클 랭의 팀은 뉴욕주 남서부에 있는 시러큐스 인근의 마을인 버넌에 있는 ‘버넌 다운’ 경마장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버넌이 속한 오나이더 카운티의 보안관은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행사의 허가를 거절했다.

버넌의 행정 관청 역시 교통환경, 주차 환경, 보안 계획 등을 지적하며 마이클 랭 팀이 제출한 4번의 허가 신청서를 모두 거절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버넌의 행정관청이 이들의 집회 허가 신고를 마지막으로 거절한 시점은 7월 22일이다.

마이클 랭의 팀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상주의자’로 불리는 마이클 랭은 원형 극장인 메리웨더 포스트 파빌리언(Merriweather Post Pavilion)의 섭외에 들어갔다. 심지어 7월 29일 우드스톡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우드스톡 50는 공짜다...만약 열린다면”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청년 유권자 등록 캠페인을 전개 중인 비영리단체 `헤드 카운트’와 함께 무료 공연을 준비 중이며 1일권 수만 장이 공짜로 풀릴 예정이라는 기사였다.

그러나 이 기사가 나온 지 불과 이틀 후 마이클 랭은 우드스톡 50 페스티벌의 공식 취소를 발표했다. 현재 메리웨더 포스트 파빌리언의 홈페이지에 가보면 우드스톡 50  8월 17일 자에 스매싱 펌킨스의 공연이 잡혀있다. 이 시점에서 마이클 랭은 사실상 이미 죽은 우드스톡의 갈비뼈까지 부러뜨려 가며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음악 업계에서 우드스톡 50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를 불러일으킨다”라며 ”이는 초특급의 페스티벌을 열기 위한 여러 조건을 맞추는 일이 그저 애호가인 사람이 함부로 덤빌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증명하는 또 다른 사건이다”라고 밝혔다. 샤덴프로이데는 다른 이의 불행에서 느끼는 행복한 감정을 뜻하는 독일어로 우리 말로 하면 ‘깨소금 맛’이 가장 가까울 것이다. 

박세회 sehoi.park@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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