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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8월 01일 11시 10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8월 01일 11시 10분 KST

가슴에 대한 예의

여성의 몸에 향하던 시선을 좀 돌려보자.

Sakan Piriyapongsak via Getty Images

1980년대 중반에 나는 공공장소에서 수유하는 여성을 간혹 보았다. 시장에서 장을 보다가 우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숙모의 모습을 기억한다. 시장 상인이 한쪽에 자리를 내어주자 숙모는 몸을 돌리고 앉아 내 사촌에게 젖을 먹였다.

여성의 가슴이 섹슈얼리티의 대상으로 강하게 자리잡으면서 공공장소에서 수유하는 여성은 사라졌다. 모유 수유를 강조하지만 정작 수유하기 편한 환경은 아니다. 아이에게 젖을, 그러니까 밥을 먹이는 행위를 성적인 신체 부위를 노출하는 행동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럼 수유실을 늘리든가!) 이러한 모순된 환경 속에서 아이가 있는 여성들이 공공장소에 나와 모유 수유 캠페인을 벌인 적도 있다.

수유하는 여성은 공공의 영역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인물이 사회를 휩쓸었다. 많은 아류작을 만들어낸 1995년 에로영화 <젖소 부인 바람났네>의 ‘젖소 부인’. 한국 에로영화에서 유명한 이 캐릭터는 미성년자는 물론이고 성인 비디오를 소비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알 만한 이름이었다. 극중 ‘젖소 부인’이었던 배우는 한때 이름을 날렸고 잠시 방송에 고정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에로영화 배우로는 이례적인 일이다.

여성의 가슴이 성애의 대상으로 보여지는 문화가 강해지면서 ‘큰 가슴’은 아름다운 몸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가슴 성형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시기도 90년대 후반부터다. 여성의 몸은 구석구석 전쟁터지만 그중에서도 가슴은 매우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얼마나 많은 남성 예술가가 여성의 ‘젖가슴’을 찬양하고 그리워했던가. 가슴이 여성의 상징이 되면 될수록 남성의 지배 아래에서 대상화되고 통제받는다.

미국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의 일생을 다룬 영화 <바이스>에서 아내 린 체니가 남편 대신 선거 유세를 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동부에서는 여성들이 브래지어를 태우지만 우리 와이오밍 여성들은 ‘그것을 입는다’고 강조한다. 브래지어는 여성의 신체를 물리적으로, 문화적으로 구속하는 상징이다. 그렇기에 브래지어 태우기는 여성을 구속하는 문화에 도전하는 행위다. 보수적인 와이오밍에서 정치적 색채를 부각하는 한 방식으로 ‘우리는 브래지어를 착용합니다’라고 말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노브라’를 둘러싼 논란이 있다. ‘노브라’가 예의 없는 옷차림이 아니라 이 사회가 여성의 가슴에 대체로 예의가 없다. 조심할 입장은 여성의 가슴이 아니라 가슴을 향한 시선이다. 여성의 가슴이 성애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면서 가슴은 ‘섹시하게’ 통제받는다.

자유한국당은 ‘엉덩이춤’을 추고 7년 전 ‘나꼼수’는 여성들에게 비키니 수영복 응원을 독려했다. 가슴 품평은 덤으로 따라왔다. 여성의 몸을 정치적 응원의 도구로 활용할 때는 표현의 자유니 뭐니 하면서 차별적 시선을 변호한다. 그러나 여성이 누구의 독려도 필요 없이 그저 제 편한 대로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을 뿐인데, 이때는 ‘노브라 논란’이 일어난다.

덥고 끈적이는 여름. 여성에게는 두가지를 관리하는 계절이다. 가슴과 털. 털을 밀고 가슴의 젖꼭지를 잘 단속한다. 더불어 브래지어 끈 처리는 여름 패션에서 중요하다. 내게 브래지어가 옷에 따라 착용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속옷이 된 지 오래다.

여성의 몸에 향하던 시선을 좀 돌려보자. 여름이면 소매 없는 흰색 러닝셔츠를 입고 젖꼭지가 보이는 차림으로 집 앞에서 담배 피우는 중년 남성들을 심심찮게 본다. 그들은 딱히 이상한 시선을 받지 않는다. 여성이 그와 같은 차림새로 거리를 활보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쩜 이렇게 몸을 바라보는 방식이 다를까.

요즘 일본에서는 남자의 젖꼭지가 셔츠에 비치는 것을 문제 삼는다고 한다. 최근 번역 출간된 <성스러운 유방사>의 저자는 남자들도 젖꼭지를 감추는 날이 올지, 아니면 젖꼭지를 자랑스럽게 내보일지 궁금해한다. 한국은 어떨까. 여성의 ‘노브라’를 문제 삼는 남성들이 앞으로 자신의 ‘젖꼭지 관리’를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 남성의 젖꼭지는 어떻게 ‘발견’될까.

* 한겨레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