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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10조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대정신은 ’1965년 체제’를 흔들고 있습니다.

ⓒnito100 via Getty Images

‘한국 측이 시종 말하고 있던 것은, 일본 측 안은 숲으로 도망친 개를 죽이기 위해 숲을 모두 태워버리려는 생각이다, 그렇게 하지 말고 개를 끌어내어 죽이면 되는 것 아니냐는 것 같은 이야기였다. 이 개를 둘러싼 논의를 많이 했다.’

1965년 6월 한·일 청구권협정 체결을 앞두고 막판 조문 작업을 하던 당시 상황을 일본 측은 이렇게 전합니다. ‘숲으로 도망친 개’는 대체 무엇일까요.

한국의 개인청구권입니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이들이 자국민의 권리를 개로 표현하며 죽이는 방법을 이야기했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이 내용은 일본 외무성이 편찬한 『일한 국교정상화 교섭의 기록』(도서출판 삼인, 이하 『교섭의 기록』) 920면에 담겨 있습니다.

『교섭의 기록』은 1951년 회담이 시작된 이래 일본 정부가 ‘해방’이 아닌 ‘분리’의 관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①한국은 ‘종주국’ 일본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②식민 지배는 합법이었다 ③불법을 전제한 배상은 있을 수 없다. 5·16쿠데타 이후인 1962년 10월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인심 쓰듯 ‘독립 축하금’을 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당신 나라의 독립 달성을 축하하게 해주지 않겠는가.”(『교섭의 기록』 563면)

협정 조문화 과정에서도 일본 측은 ‘경제협력을 하는 것이지 배상이라는 생각은 없다는 취지를 표현하고자’ 합니다. (911면)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길 희망하고’ ‘경제협력을 증진하길 희망하여’ 같은 모호한 문구들이 들어간 까닭입니다. 그리고, 탕탕탕 못을 박습니다.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요. 하지만 ‘불법 식민지배’와 ‘배상’ 문제는 어디에도 반영돼 있지 않습니다.

지금 ‘1965년 체제’가 뿌리째 흔들리는 건 단순히 판결 한두 개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자체의 모순과 더불어 헌법의 문제입니다. 헌법 제10조는 선언합니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헌법재판소가 2011년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한 근거도 헌법 10조였습니다. 강제징용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도 같은 맥락 위에 있습니다.

2016년 겨울, 시민들의 가슴을 울린 건 헌법 1조2항(‘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었습니다. 2019년 여름, 한국 사회는 헌법 10조 앞에 서 있습니다. 대법관 몇몇이 아니라 시대정신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헌법 1조에서 10조로 나아가는 여정은 의지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시민의 인권이 ‘도망친 개’ 취급을 당하지 않으려면 국가의 실력이 필요합니다. 정부의 대응 자세가 달라져야 합니다. 전문가들의 끝장 토론을 통해 중·장기 전략을 세우고, 국제사회에 우리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일본 정부에 당당하게 대화를 요구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편협한 감정으로 일본 시민들을 적대하는 일은 없길 바랍니다. 자국민의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나라와 시민들이라면 국적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할 리 없습니다. 배타의 언어로는 누구의 마음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이유, 아베 정부가 실패할 이유입니다.

이국땅에 끌려가 강제로 노동해야 했던 이들의 권리를 보장할 것이란 믿음, 배 안에 갇혀 있을 때 구해주러 올 것이란 믿음, 노동현장에서 목숨 잃고 무시당하는 일만은 막아줄 것이란 믿음에 응답하는 데서 국가는 완성됩니다. 어쩌면 그 당연한 믿음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들이 모여 시대를 바꾸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제 헌법 10조의 시대가 개막됐습니다. 국가가 개인 위에 군림하는 대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것은 보수든, 진보든 다를 수 없습니다. 그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중앙일보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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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한국 #헌법 #한일청구권협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