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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가구에게 민어계는 필요 없다, 수박계가 있었으면

혼자 사는 사람에게 수박은 거대 과일이다

  • 홀로
  • 입력 2019.07.29 16:48
ⓒDeeNida via Getty Images

‘돼지갈비, 묵은지 김치찌개, 떡볶이, 갈비만두, 짜장면….’

몇 주 전부터 자매 단톡방의 카톡 게시판에 작은언니가 한국에 와서 먹고 갈 음식 목록이 주르륵 올라왔다. 외국에서 지내는 작은언니가 잠시 서울에 들르기로 해서다. 이번 주말엔 뿔뿔이 흩어져 살던 세 자매가 오랜만에 모여 저녁을 먹기로 했다. 틈날 때마다 카톡에 띄워진 맛있는 음식 목록을 들여다보며, 주말 대여섯 끼 안에 이 메뉴들을 소화해낼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다 문득, 작은언니가 제일 좋아하는 여름 음식이 떠올랐다. 수박.

요새 퇴근길에 집 앞 과일가게를 지날 때마다 진열대에 푸짐하게 앉아 있는 수박들을 본다. ‘안쪽에 시원한 냉장수박 있어요’ 하는 팻말에도 꼭 한 번씩 눈길이 머문다. 냉장고에 수박 들어갈 자리가 있던가 떠올려본 뒤, 절레절레 도리질을 하고 지나갈 뿐이지만. 오늘 집에 오는 길에, 나는 작은언니의 귀국 환영 선물로 잘생긴 수박을 한 통 살 것이다.

사실 올여름 처음 맛본 수박은 내가 직접 산 게 아닌 식당의 ‘서비스’로 나온 음식이었다. 보름 전 초복 날, 글 쓰는 동료들과 단골 호프집에 갔더니 사장님이 큼직큼직하게 썬 수박을 한 접시 내주셨다. 딱 맞게 잘 익은 수박은 달고 아삭했다. 혼자 살아서 수박 먹을 일이 귀하다고 했더니, 사장님이 혀를 차며 수박을 더 권하셨다. “아유, 알지. 수박은 같이 먹어야지, 혼자선 그게 보통 일이 아냐.” 이상하게 그날 들은 사장님의 말씀은 수박보다도 시원하고 달았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수박은 감히 지르기 어려운 거대 과일이었기 때문이다.

수박 먹을 때 감수해야 할 일

가끔 수박 이야기가 나오면 주변에서 반 통, 반의반 통을 사라는 말을 하곤 한다. 혹은 컵 과일, 큐브 과일같이 과육을 절단해놓은 걸 사라는 말을 듣는다. “마트 가면 먹기 좋게 잘라놓은 것도 많은데 왜 안 먹냐.” “요샌 편의점에서도 수박 한 조각씩 팔던데?” 주변의 충고들이다. 수박처럼 혼자 먹기엔 양이 많은 음식 이야기가 나오면, 살림을 오래 하신 분들께 꼭 타박 비슷한 잔소리도 듣는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부지런하질 못해서 그렇지. 사자마자 딱딱 잘라서 김치통에 넣어놓고 한 그릇씩 꺼내 먹으면 간편한걸.” 아이고, 수박도 부지런해야 먹는 거였구나. 무안함을 웃음으로 넘겨오다 들은 호프집 사장님의 말씀이 그래서 그렇게 반가웠던 것이다.

카페에서 파는 수박주스도 있다. 매주 스터디를 하러 가는 카페에서 수박주스를 시키면, 수박 살을 간 주스 위에 깍둑썰기 한 수박 두 조각이 고명처럼 얹혀 나온다. 하지만 미리 잘라놓은 수박 조각은 모서리가 삭아 있다. 달콤한데도 입에 넣자마자 입천장과 혀 사이에서 허무하게 뭉개진다. 동네 과일가게에서 한 통 사와 집에서 바로 잘라 먹는 그 아삭함은 온데간데없다. 학교 다닐 적에, 정말 여름이면 밥 대신 수박을 먹을 만큼 수박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도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는데, 혼자서도 일주일에 두 통은 거뜬히 먹을 만큼 수박을 좋아한다고 했다. 여름 언젠가 친구 집에 놀러 가서 냉장고를 열었더니, 조그만 냉장실에 수박을 썰어놓은 밀폐 용기만 차곡차곡 쌓여 있어서 놀랐던 적도 있다.

하지만 혼자 살면서 수박을 먹으려면 정말로 그 정도 열정과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냉장고 광고에선 늘 수박 한 통이 널찍한 냉장실 한가운데 놓여 있다. 그러나 100리터 남짓한 원룸 냉장고에 수박을 넣어 놓을라치면 그런 시원스러운 광경은 도저히 연출할 수가 없다. 밀폐 용기든 어느 그릇이든 일단 자르고 눕힌 뒤에야 좁은 냉장고 안에 입성이 가능한 것이다. 껍질 버리기도 일이다. 2리터짜리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제대로 채우려면 괄호 모양 그대로 버릴 수 없다. 하나하나 자근자근 잘게 자르고 물기도 빼야 한다. 그 과정을 해치우려면 정말 수박을 좋아하든지, 정말 부지런하든지. 나는 둘 다 해당되지 않아서 수박을 사 먹기가 어렵다.

실은 수박 맛 자체보다, 수박을 먹는 순간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혼자 살면서도 때로는 온전하게 누리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게 내겐, 여름에는 아마 수박인 것 같다. 수박 한 통을 사다 식히고 잘라서 먹는 그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서일 것이다. 뜨거운 길 위를 걸어 돌아온 집, 개운하게 씻고 나와 맞이하고 싶은 어떤 것이 있다. 반질반질, 질긴 수박껍질에 칼끝을 댔을 때 쩍 갈라지는 시원한 것. 그런 것들.

애플수박도 좋지만

수박에 대해 글을 써야지 했더니, 사방에서 ‘애플수박’에 대한 제보가 쏟아졌다. 애플수박을 사 먹어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건, 예전에 먹어본 ‘개구리수박’ 탓이 컸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 단지에선 해마다 ‘개구리수박’이라고 써붙인 트럭이 왔다. 손바닥만한 수박이 한 통에 삼천원이라니. 신기해서 두어번 사 먹어봤다. 반을 뚝 갈라놓고 보니 한 통의 반이 흰 속껍질이었다. 수박 살도 질기고 밍밍했다. ‘수박 비슷한 걸 샀더니 맛도 수박 비슷만 하구나’ 교훈을 얻고 끝이 났다.

그러나 지난 주말에 취재(?) 삼아 사본 애플수박은 다르기는 했다. 한 통에 4500원. 몇 해 전만 해도 마트에서 한 통에 만원씩 하는 걸 보고 기겁을 하고 지나갔던 것 같은데, 그새 많이 보급이 되었는지 값도 적당했다. 개구리수박과 달리 일단 애플수박은 속껍질 두께가 무척 얇았다. 나중에 포털에서 ‘애플수박’으로 검색을 하니 칼로 껍질을 깎아 먹는 사진도 나올 정도였다. 먹어보니 수박 살도 아삭아삭하고 나름대로 단맛도 있었다. 속껍질이 얇아 하얀 속 부분을 손끝으로 쥐고 와작와작 먹는 재미는 없었지만, 작고 가볍다. 껍질 쓰레기도 적다. 남는 것도 적다. 1인 가구에 그만이다.

이런저런 불편을 다 없애주고 남은 애플수박은 그런데도 어딘가 조금 싱거웠다. 애플수박을 먹으면서, 나는 역시 수박은 큰 게 맛있다고 속으로 은근히 까탈을 부렸다. 아니면 나 역시도 불편함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는 고리타분한 믿음을 굳혀가는 것일까. 요즘 나는 나서서 불편을 택하지도 무미를 감내하지도 못한 채, 수박도 애플수박도 선택하지 못하고 여름을 보내고 있다. 수박 한 통 제대로 맛보는 게 혼자서는 이렇게나 어렵다.

여름철 생선 마니아들이 다소 비싼 생선인 민어를 먹기 위해 계를 꾸린다고 하던가. 민어처럼 비싸고 화려한 여름 음식은 아니지만, 수박을 위해 계를 꾸려봄직하다. 일단 이번 주말엔 자매의 파티를 위해 낑낑대며 냉장수박 한 통 사들고 들어와야지.

글 · 유주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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