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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7월 27일 17시 39분 KST

명세서만 내미는 동맹이 지속될 수 있나

볼턴의 ‘명세서’와 아베의 무역 보복

한겨레
지난 24일 오전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이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면담을 위해 서울 용산구 국방부를 방문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1971년 7월9~11일 헨리 키신저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중국을 방문해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만났다. 키신저는 파키스탄 방문길에 가짜 복통 소동을 벌이며 극비리에 베이징으로 갔고, 공동으로 소련에 맞서기 위해 미-중 화해로 나아가는 방안을 저우 총리와 논의했다. 이 방문은 이듬해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 1979년 미-중 수교, 1989년 소련의 몰락을 거쳐 세계 유일 강대국 미국의 등장과 뒤이은 중국의 부상으로 이어지며 세계를 완전히 바꿨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이 흐름을 거꾸로 되돌렸다. 그의 당선 직후 2017년 초 미국에선 ‘닉슨 거꾸로 하기’(reverse Nixon), ‘키신저 거꾸로 하기’ 같은 용어가 유행했다. 이번에는 미국이 러시아와 손을 잡고 중국을 거꾸러뜨리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 개입해 트럼프의 당선을 도왔다는 ‘러시아 스캔들’이 터지면서 트럼프-푸틴 동맹은 무산됐다. 결국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손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잡았다. 중국과 러시아는 이제 준군사동맹을 형성해 미국에 맞서고 있다. 지난 23일 독도 상공에서 벌어진 중-러의 합동비행 훈련과 러시아 전투기의 영공 침범은 그 결과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이란 그물로 중국을 포위하겠다고 한다. 2017년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처음 공개한 이 전략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아이디어로 알려져 있다. 아베 총리는 대중국 견제에 인도를 끌어들이고 한국의 위상은 낮추려 했다. 이 전략은 초기에는 중국의 일대일로(중국과 유라시아 국가들을 연결하는 경제권 구상)에 맞서는 경제 연합 성격이 강했지만, 지난 6월1일 중국과 러시아를 ‘현상을 변경하는 위협’으로 명시한 미 국방부의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가 나오면서 군사전략 성격이 뚜렷해졌다.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는 중국·러시아와 패권을 방어해야 하는 미국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수십년간 한반도 주변 질서를 규정했던 체제가 최근 모두 무너지고 있다. 1971년부터 계속된 미-중 화해의 질서는 최근 미중 무역·기술 패권전쟁으로 끝이 났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과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만들어진 ‘65년 체제’는 아베 총리의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으로 무너지고 있다. 이와 함께 미국의 패권 아래 한국과 일본을 묶어놓은 ‘샌프란시스코 체제’(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이후 미국이 일본을 핵심 파트너로 삼아 냉전시기 동아시아를 관리한 체제)도 흔들린다.

일본은 8월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안보상 수출 심사 우대 국가)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각의에서 처리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달 초 반도체 생산용 3개 핵심 소재의 수출을 규제해 한국을 뒤흔든 일본이 이제는 사실상 한-일 무역의 전 분야에 영향을 끼치는 품목 1000여개의 수출을 제한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게 된다. 한국을 안보상 믿을 수 없는 국가로 취급하며 수출 통제에 나선다는 점에서, 일본은 한-일 관계를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몰아가고 있다. 다만 화이트리스트 제외 이후에도 싱가포르나 대만 등이 활용하는 ‘비화이트리스트 국가용 포괄허가’를 한국도 활용할 수 있을지, 품목별 허가 방법 고시를 통해 한국 산업에 핵심적인 품목을 이 포괄허가 대상에서 제외할지 등에 따라 한국 기업들이 입는 타격은 달라진다. 일본은 한국의 반응과 세계 여론 등을 살피며 이런 구체적 수위를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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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변수는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이다. 한-일 갈등과 러시아의 독도 영공 침범 등에 대한 미국 당국자들의 태도는 ‘립서비스’에 그치고 있다. 이 와중에 지난 24일 한국에 온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과 우리 해군의 호르무즈해협 파병 등을 요구하는 명세서만 잔뜩 내밀고 갔다.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이 지역 국가들에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 동참해 중국을 견제하는 군사적 역할을 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동맹의 역할은 하지 않고 요구만 많은 미국에 얼마나 많은 나라가 호응할지는 미지수다. 아베 총리마저도 트럼프의 미국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지난해 방중 이후 중국과의 화해를 치밀하게 추진하면서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미-일 무역협정을 통해 미국산 농수산물 관세 인하 등 일본의 대폭 양보와 방위비 증액을 압박하는 트럼프에 대한 대응이다.

한국도 미국만 바라보지 말고 중국, 러시아, 일본 등과의 현명하고 적극적인 외교에 나서야 한다. 볼턴의 ‘명세서’와 아베의 무역 보복은 ‘미국의 역할이 고장난 세계’라는 현실을 깨닫고 외교안보의 틀을 완전히 새롭게 짜는 각성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