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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따’, 이제 사직 대신 신고하세요

회사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계세요? 당신 탓이 아닙니다

7월1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직장갑질 119’ 회원들이 ‘슬기로운 직장생활’ 캠페인을 하고 있다.
7월1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직장갑질 119’ 회원들이 ‘슬기로운 직장생활’ 캠페인을 하고 있다. ⓒ한겨레

미라(가명)씨는 한 중소기업에서 사무관리직 업무를 시작했다. 배울 게 없었던 전 직장과 달리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에서 생산관리 업무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출근시간보다 일찍 나와 일을 시작했고 열심히 익히려고 애썼다. 생산라인 업무가 끝나야 정리를 할 수 있어서 퇴근이 늦었지만, 나이 어린 사원들을 하대하지 않는 사무실 분위기가 좋았다. 붙임성이 좋은 미라씨는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여사님’과 이주노동자들에게도 밝게 인사하며 지냈다. 사장님은 전체 회식을 할 때 사무직이 생산직을 챙기라고 했다. 미라씨는 즐거운 회사 생활을 하고 싶었다.

대체휴무일에도 출근, 일요일 업무 전화

이사가 회사 운영을 총괄했고 부장 두 명이 관리자로 일했다. 직속 상사인 부장은 미라씨에게 특정인을 지목하며 그 사람과 통화하거나 이야기한 것을 모두 보고하라고 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고 불합리하다고 느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만 충실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생산직에게 먼저 인사하지 말라고 했다. 미라씨가 어려 생산직에 휘둘릴까봐 걱정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장은 생산동에 내려가면 노동자들에게 악쓰고 소리를 질렀다. 욕설을 섞어서 업무를 지시했다. 생산동에서 일하는 ‘여사님’들은 부장을 싫어했다. 부장은 미라씨가 ‘여사님’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이주노동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다니는 것을 싫어했다. 회사 생활을 즐겁게 하고 싶었던 미라씨는 부당한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생산 일정 때문에 휴일에 미리 일하고 평일에 대체휴무를 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부장은 거래처가 일한다는 이유로 대체휴무일에 출근을 시켰다. 일요일에도 월요일 생산 준비를 해야 한다고 수시로 전화를 걸었다. 휴일에 출근한 부장은 사무관리직 단체대화방에 업무 내용을 올리고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못 받으면 “왜 전화를 안 받냐? 일부러 전화를 안 받는 거냐?”고 소리쳤다. 부장은 다른 직원들과 같이 있을 때는 상냥했고, 둘이 있을 때나 통화할 때는 함부로 대했다.

직원이 새로 들어오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나갔다. 부장은 미라씨에게 지게차, 출하, 부자재 관리 업무뿐 아니라 퇴사한 사람들이 했던 지게차·포터 운전과 배달 업무를 시켰다. 과중한 일을 주고 실수하면 업무 집중력이 떨어진다고 나무랐다.

송년회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미라씨는 공식 회식이 끝나고 사무직 동료와 귀가하기 위해 차에서 대리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산직 여성노동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에 가고 싶은데 이사와 부장의 강요로 여직원 두 명이 노래방에 끌려왔다고, 집에 같이 데려가달라고 했다. 노래방으로 내려간 사무직 동료가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돼서 미라씨가 노래방으로 갔더니 이사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회사에 적응을 못해서 대화하려고 한 건데 네가 왜 간섭하냐고 했다. “병으로 맞아봤냐, 남자한테 맞아봤냐, 또라이 같은 년들이네.” 폭언을 참다못한 여직원 둘이 노래방을 나갔다. 그러자 부장은 그들을 향해 “미친년”이라고 하며 미라씨에게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하라고 했다. 노래방 사건 직후 사무직 동료는 회사를 그만뒀다. 이사는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퇴사한 여직원에 대해 평소 불만이 많고 행실이 안 좋은 친구라고 했다.

갑작스런 업무 가중과 부서 이동

어느 날이었다. 새로운 제품 생산으로 생산직 노동자들이 헷갈려 문제가 생겼다. 이사에게 질책받은 부장은 생산 현장에 있는 미라씨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이거 몰랐어요? 상자 확인도 안 했어요? 나를 일부러 엿 먹이려고 그런 거 아니에요?” 미라씨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야기해달라고 했지만, 부장은 “모르면 됐어요. 가보세요”라고 했다. 이후 부장은 미라씨와 나눠서 함께 하던 업무에서 손을 뗐다. 업무 부담을 가중하려는 의도였다. 작은 회사에서 그녀는 혼자 더 많은 일을 감당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이사는 회의 시간에 미라씨에게 부서 이동을 통보했다. 징계위원회나 어떤 절차도 없이 주임에서 사원으로 강등시켰다. 이사에게 문제를 제기했더니 “너와 트러블이 있다고 부장을 보낼 수는 없지 않느냐”고 했다. 이사가 한 직원에게 미라씨는 불편한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평소 같이 밥도 잘 먹고 즐겁게 지내던 신입사원들마저 갑자기 그녀를 멀리했다. ‘왕따’가 주먹보다 무서웠고 ‘은따’ 때문에 숨이 막혔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사직서를 썼다. 개인적 사유라고 적고 싶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이 더 이상 따돌림당하지 않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상급자의 갑질에 의한 퇴사

상급자의 갑질에 의한 사유로 더 이상 정상적인 회사생활이 불가하므로 퇴직하고자 회사에 통보합니다. 아울러 이미 본인이 이전에 행하던 직무를 하지 않고 있고, 관련 자료 및 인수인계서를 전달했으니 인수인계 의무를 다했음을 알립니다.

미라씨는 상사의 갑질 행위 10가지를 적었다. 하지만 결재가 나지 않을 것 같아 위 내용만 제출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사장은 미라씨에게 전화를 걸어 식사를 하자고 했다. 가장 오래 다닌 직원이 그만두는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사장에게 이유를 설명하고, 회사에 제출하지 않은 10대 사직 사유를 보냈다. “저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 않지만 제가 쓴 사직서로 인해 회사가 조금이라도 바뀌면 좋겠어요.” 미라씨의 용기 있는 ‘사이다 사직서’로 회사가 달라졌을까?

7월16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제76조 등)이 시행됐다. 앞으로는 사직서 대신 신고서를 쓰면 된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매뉴얼에는 “집단적으로 따돌리거나, 정당한 이유 없이 업무와 관련된 중요한 정보 또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행위”와 “다른 직원들 앞에서 또는 온라인상에서 모욕감을 주거나 개인사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는 등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는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돼 있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직장갑질119는 7월16일 ‘갑질 타파 10계명’(직장 내 괴롭힘 대처 10계명)을 발표했다. ①내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②가까운 사람과 상의한다 ③병원 진료나 상담을 받는다 ④갑질 내용과 시간을 기록한다 ⑤녹음, 동료 증언 등 증거를 남긴다 ⑥직장 괴롭힘이 취업규칙에 있는지 확인한다 ⑦회사나 노동청에 신고한다 ⑧유급휴가, 근무장소 변경을 요구한다 ⑨보복 갑질에 대비한다 ⑩노조 등 집단적인 대응 방안을 찾는다.

갑질타파 10계명의 첫 번째의 의미는 이렇다. “회사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계세요? 당신 탓이 아닙니다.”

* 한겨레21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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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